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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하는 농노 곁에 벌거벗은 채 물놀이하는 농노… 풍경화에 숨겨진 문화 코드

양정무의 미술 읽어드립니다

<7>풍경화의 비밀(1) : '아주 호화로운 기도서' 속 중세 프랑스의 풍경

성큼 다가온 휴가철을 맞아 풍경화를 주제로 미술 이야기를 풀어보고 싶다. 아름다운 자연이 담긴 풍경화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곳곳에 비밀스러운 문화 코드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당시에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일들이 시간이 지나면 부자연스럽게 보이기 때문에 풍경화 속엔 읽을 것이 넘쳐 난다. 미술의 매력에 푹 빠지게 해 줄 풍경화 명작을 골라 10회에 걸쳐 살펴보고자 한다.

600년 전 영주를 위해 만든 초호화 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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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부르 형제, '베리 공작의 아주 호화로운 기도서: 7월', 1412∼1416년, 콩데 미술관. 배경 속 성은 베리 공작이 소유한 푸아티에 성(Palace of Poitiers)으로 알려져 있다. 위키피디아

7월 풍경을 꼭 집어 그린 그림이라면 랭부르 형제의 '베리 공작(Duke of Berry)의 아주 호화로운 기도서' 속 한 장면이 먼저 떠오른다. 지금으로부터 600년 전 그림이지만 당시 프랑스의 전원 풍경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먼 배경엔 산과 하늘이 펼쳐져 있고 그 앞을 육중한 성채가 버티고 있다. 강줄기가 이 성을 둘러싼 후 앞쪽 벌판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흐르고 있다. 강의 왼쪽에는 밀을 수확하는 농부들의 힘찬 낫질이 보이고, 오른쪽 농부들은 분주히 양털을 깎고 있다.


강둑에 줄지어 심어 놓은 버드나무와 그 주변에서 평화롭게 풀을 뜯는 양들이 인상적이다. 강줄기를 따라 한가로이 노니는 백조들도 풍경을 한층 더 여유롭게 만드는데, 농부들은 이와 반대로 아주 분주한 모습이다. 이 그림에 따르면 중세 프랑스의 7월은 수확의 계절로 무더위 속에서 농부들이 분주히 일해야 하는 농번기였다.


이 7월 그림은 당시 프랑스의 강력한 영주 베리 공작을 위해 제작된 기도서 속 한 장면이다. 베리 공작은 14세기 프랑스의 국왕 장 2세의 셋째 아들로 아버지와 함께 전장을 누빈 공로로 프랑스 중부 지역을 중심으로 막대한 땅을 지배하는 공작의 자리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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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화롭게 장식돼 '아주 호화로운 기도서(Très Riches Heures)'라고 불리는 기도서. 구글 캡처

이후 베리 공작은 막강한 권력과 부를 바탕으로 온갖 진귀한 물품을 수집했는데 그의 수집 목록에는 이전의 어느 누구도 꿈꾸지 못한 진귀한 책도 포함되었다. 그는 1412년경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랭부르 삼형제(Limbourg pothers)에게 아주 호화롭게 장식된 기도서 제작을 의뢰했고, 이렇게 해서 지금과 같은 풍경 그림이 포함된 기도서가 탄생한다.


이 책은 당시에도 너무나 호화롭게 장식돼 도서 목록에 '아주 호화로운 기도서(Très Riches Heures)'로 등록됐고 오늘날에도 이 이름으로 불린다. 실제로 이 기도서의 그림 속엔 당시에 구하기 어려운 울트라마린이라는 파란색 물감이 한껏 사용되었고, 현미경으로 봐야 제대로 감상할 것 같은 초정밀 디테일까지 갖추고 있어 이름 그대로 '아주 호화롭게 장식된 책'으로 부를 만하다.


안타깝게 랭부르 형제뿐만 아니라 베리 공작도 1416년 발생한 흑사병으로 모두 사망하면서 이 기도서는 미완성으로 남았다가 1485년경 다른 작가의 손에 의해 비로소 완성됐다. 하지만 풍경화의 초기적 형태로 보이는 기도서 속 달력 장면은 대체로 랭부르 형제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기도서는 가톨릭 신자들이 1년 365일 하루하루 해야 할 기도문과 성가를 적은 책으로 14세기 중반부터 자주 제작되기 시작했다. '베리 공작의 아주 호화로운 기도서'는 1년 열두 달의 풍경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7월 풍경에 나와 있듯 그림 상단에는 반원형 아치에 그달의 대표적 별자리, 낮과 밤의 길이가 표시돼 있다.


전체적으로 기도서 속 열두 달의 풍경 그림들도 일정한 패턴을 보여주는데, 배경엔 베리 공작이 소유한 성이 등장하고 전면에 당시 사람들의 일상이 그려져 있다. 일종의 중세 프랑스 버전의 달력 그림으로 봐도 좋을 것 같다.

귀족과 농노 사이... 계급 긴장감 감도는 중세 농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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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 공작의 아주 호화로운 기도서: 8월'. 귀족들은 매사냥을 가고 있고 배경에는 농노들이 추수에 바빠 보인다. 더위를 피해 물놀이하는 농노들이 더 많이 보인다. 위키피디아

7월 풍경은 농사일로 바쁜 모습이지만 이어지는 8월 풍경은 한결 여유롭다. 흥미롭게도 8월 그림 속엔 귀족과 농민이 함께 등장한다. 전면에 멋지게 차려입은 다섯 명의 귀족 남녀들이 말을 타고 매사냥을 떠나고 있고, 배경의 들판에는 밀을 추수하기 위해 분주히 일하는 농민들이 보인다. 특히 배경 속엔 더위를 피해 물놀이하며 쉬고 있는 사람들도 보인다. 전체적으로 베리 공작이 다스리는 세계를 평화롭게 그려 내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으나, 여기에 등장하는 농민들이 실제로 베리 공작에게 속한 농노들이라는 점을 고려하고 그림을 다시 보면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말하자면 배경의 농노 중 일부만 일하고 있고 나머지는 한가롭게 놀고 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일곱 명 중 세 명만 일하고, 네 명은 대놓고 낮 시간에 물놀이를 즐기며 쉬고 있다. 이런 장면은 분명 당시 농노들을 나태하고 게으르게 잡아내고 있다. 특히 벌거벗은 농노들의 몸은 격식을 갖춘 귀족들의 옷차림과 강한 대조를 이루면서 이들을 무례한 존재로 낮춰 보게 만든다.


8월 풍경에서 보이는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긴장감은 9월 풍경에서 한층 더 강화된다. 배경에 등장하는 성은 소뮈르 성(Château de Saumur)으로 오늘날에도 잘 남아 있다. 그림 전면에는 포도 수확 장면이 펼쳐져 있다. 그런데 왼쪽 아래를 보면 농노 중에 몰래 포도를 따 먹는 이가 보인다. 이들의 천박함은 관람자 쪽을 향해 엉덩이를 내밀고 양말을 올리고 있는 농민의 모습에서 절정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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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 공작의 아주 호화로운 기도서: 9월' 풍경에 등장하는 소뮈르 성(Château de Saumur). 오늘날에도 소뮈르는 포도주로 유명하다. 실제로 성 앞에 지금도 그림에 등장하는 포도나무밭이 펼쳐져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베리 공작의 아주 호화로운 기도서'에 나타난 나태하면서 무례한 모습의 농민들은 우아하고 화려하게 그려진 귀족들의 세계와 완전히 구분되어 있다. 여기서 농노들을 향한 시선에 베리 공작의 관음증적 성적 취향까지 반영되어 있다는 해석도 제기되고 있다. 8월 풍경의 배경에서는 벌거벗은 채로 수영하는 남녀 농노들이 보이고, 2월의 경우 불을 쬐는 농노들의 바지와 치마 사이로 성기가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여러 해석이 나올 수 있는데, 일단 분명한 사실은 농노들을 향한 지배층의 시선이 복합적이라는 점이다. 풍경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농노들은 부지런한 모습이지만, 간혹 쉬거나 불손한 행동을 하는 농노들과 함께 몸을 거리낌 없이 노출하는 이들도 함께 등장한다. 이들 때문에 이상적이고 안정적인 자연 풍경은 계층 간 갈등을 품은 정치적 풍경으로 변모하게 된다.


실제로 당시 유럽은 흑사병을 겪으면서 인구가 절반 가까이 감소한다. 이 때문에 극심한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노동자의 몸값이 상승하고 대우도 좋아지게 된다. 여기서 농노들의 행동은 이전과 달리 대범해지게 되는데 그 결과가 기도서의 풍경 속에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베리 공작의 가혹한 폭정으로 당시 농민 반란이 빈번해졌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자신이 지배하는 백성들의 반란이 거세지자, 이들을 바라보는 베리 공작의 눈초리가 매서워지면서 착한 농민과 나쁜 농민을 구분 지어 보려는 시도가 나왔다고 볼 수도 있다.

조화로운 세계 묘사한 낙관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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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 공작의 아주 호화로운 기도서: 2월'에는 추위를 녹이기 위해 겉옷을 올리고 성기를 노출한 두 남녀가 등장한다. 위키피디아

어떠한 해석을 선택하든 '베리 공작의 아주 호화로운 기도서' 속 풍경화는 보기보다 흥미진진하게 다가온다. 당시 유럽 사회에 벌어졌던 계층 간 긴장 관계도 엿보이지만, 무엇보다 달마다 변화하는 자연에 맞춰 중세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 다채롭게 펼쳐져 있다는 점도 놓쳐서는 안 된다. 물론 사회 구성원들 간의 계급적 긴장감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풍경화는 우리가 기대했던 평화로운 세계와는 사뭇 다르게 보이게 된다. 그러나 이런 긴장감도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펼쳐진다는 점에서 풍경화는 궁극적으로는 인간사가 조화로운 세계로 갈 것이라는 낙관적 메시지의 그림이다. 바로 이 점이 풍경화의 존재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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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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