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의 취향] 숙종의 죽음 슬퍼한 반려묘 금묘, 울다 울다 목숨까지 버렸다
※ 조선왕실이라 하면 치열한 궁중암투만 떠올리시나요. 조선의 왕과 왕비 등도 여러분처럼 각자의 취향에 따라 한 곳에 마음을 쏟았습니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사들이 그간 쉽게 접하지 못했던 왕실 인물들의 취미와 관심거리, 이를 둘러싼 역사적 비화를 에 격주 토요일마다 소개합니다.
<1> 왕실의 고양이 집사, 숙명공주와 숙종
단원 김홍도(1745~1805 이후)가 그린 '노란 고양이가 나비를 놀리다(黃猫弄蝶)'. 숙종의 애묘처럼 황금색 털을 가진 고양이의 모습을 사랑스럽게 묘사했다. 고양이와 나비를 바라보는 화가의 정겨운 시선이 느껴진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
감춰 둔 나의 고기를 훔쳐 배를 채우고
천연스레 이불 속에 들어와 잠을 자누나
쥐들이 날뛰는 게 누구의 책임이냐
밤낮을 불구하고 마구 다니네
고려의 문인 이규보(1168~1241)가 지은 ‘고양이를 나무라다(責猫)’라는 제목의 시다. 제가 해야 할 일은 하지 않으면서 말썽을 피우고 어느새 주인의 이불을 차지하고 있는 얄미운 고양이를 책망하고 있지만, 행간에서 녀석에 대한 잔잔한 애정을 읽을 수 있다. 고양이는 대체로 10세기 이전 중국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규보의 시는 약 800년 전 고려 사람들도 고양이와 더불어 집안에서 함께 생활했음을 알게 한다.
‘인간은 개를 가축화했지만 고양이는 인간을 가축화했다’는 어느 인류학자의 말처럼, 개와 다르게 고양이는 주인에게 무조건 순종하거나 한결같이 사랑스럽게 굴지 않는다. 조선후기 학자 이익(1681~1763)의 말처럼 여러 해를 길들여 친하게 지내다가도 제 비위에 맞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돌변해 주인을 남 보듯 하는 매정한 짐승이다. 그럼에도 녀석들의 귀여운 외모와 도도한 자태에 마음을 빼앗긴 인간들이 마치 고양이의 주술에 걸려든 것처럼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해 몸과 영혼(?)을 바쳐 봉사하고 노력을 아끼지 않는 상황에 이르곤 한다. 요즘 이런 이들을 일컬어 ‘고양이 집사’라고 칭하기까지 한다.
엄격한 분위기 속에서 개인의 시간이라고는 거의 없었을 것 같은 조선왕실에도 이름난 고양이집사들이 있었다. 바로 숙명공주(1640~1699)와 숙종(1661~1720)이다. 공교롭게도 이 두 고양이집사들은 고모와 조카 사이다. 숙명공주는 현종(1641~1674)의 누님이고 숙종은 현종의 아들이다.
효종이 셋째 딸 숙명공주에게 보낸 한글 편지. 부드러우면서도 기상과 위엄이 느껴지는 서체다. 효종과 인선왕후 등이 숙명공주에게 보낸 60여 편의 한글 편지를 묶은 '숙명신한첩(淑明宸翰帖)'(보물 제1947호)의 일부이다. 국립청주박물관 제공 |
숙명공주는 효종(1619~1659)과 인선왕후(1618~1674)의 셋째 딸로 태어나 1649년 효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공주로 진봉되었다. 1652년 이조참판 심지원의 아들 심익현(1641~1683)과 혼인했다. 효종의 딸 사랑은 지극했다. 숙명공주를 위해 인왕산 아래에 짓고 있는 집이 지나치게 크고 사치스러우니 절검(節儉)을 실천하라는 지적을 사헌부로부터 받을 정도였다.
숙명공주가 애묘가였다는 사실은 효종이 시집 간 딸에게 직접 써서 보낸 한 장짜리 한글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다. 국립청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편지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공주가 혼인한 1652년에서 효종이 승하한 1659년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겨우 세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편지에서, 아버지 효종은 어찌하여 고양이를 품고 있느냐며 사랑하는 딸의 철없는 행동을 꾸짖는다. 사소하다고도 할 수 있는 공주의 취미생활을 두고 궁궐의 친정아버지까지 걱정하여 한 말씀 하실 정도였다면, 숙명공주의 지나친 고양이 사랑에 대해 시댁 안에서 불만의 소리가 이미 나왔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사대부가에 시집와서 고양이 따위나 품에 안고 노는 며느리의 모습이 집안 어른들 눈에 예뻐 보일 리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하여 지엄한 신분인 공주를 불러 면전에서 나무랄 수도 없었을 터. 이에 소식을 접한 효종이 직접 나서서 딸에게 짧지만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날린 것은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숙종은 조선왕실 제일의 애묘가라 칭해도 좋다. 그의 고양이 사랑을 전하는 기록들이 다수 남아 있다. 고양이에게 깊은 애정을 쏟았다는 점 때문에 일단 숙종을 고양이 집사로 명명하긴 했지만, 숙종의 반려묘는 고양이답지 않게 절대적 충심을 보였다. 그 덕분에 당시 사람들의 기록에 이름을 남기는 영광을 누리었다.
김시민(1681~1747)의 ‘금묘가(金猫歌)’는 숙종의 반려묘에 대해 가장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책의 서문과 본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숙종 때 궁중에 고양이가 살았는데 임금께서 그 고양이를 매우 아껴 ‘금묘(金猫)’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름 그대로 고양이는 황금색이었다고 하는데, 요즘에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누런색 고양이로 추정된다. 금묘는 궁 안에서 임금을 가까이 모시고 밥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추운 밤이면 감히 용상( 床) 곁에서 잠을 잤다고 하니 숙종의 고양이 사랑이 어느 정도였는지 대략 짐작이 간다. 하지만 어느 날 금묘는 임금께 올릴 고기를 훔쳐 먹었다는 죄를 뒤집어쓰고 궁인들에 의해 절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후 숙종이 승하하고 그 사실을 알게 된 금묘는 음식을 먹지 않고 3일 동안 슬프게 울기만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대비(숙종비 인원왕후)께서 그를 가엾게 여겨 궁궐로 다시 돌아오게 했지만, 주인을 영원히 잃은 고양이는 여전히 먹기를 거부하고 애처로이 울며 빈전(殯殿ㆍ장례를 지내기 전 망자의 시신을 모셔 두는 건물) 주변을 맴돌 뿐이었다. 슬피 울기를 수십여 일, 결국 금묘는 빈전 계단에서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숨진 채 발견되었다. 끝내 주인을 따라간 금묘에게 감동한 대비의 지시에 따라 금묘는 비단옷에 싸여 숙종의 능인 명릉(明陵) 가는 길 옆에 묻혔다.
영조대에 활동한 화가 변상벽(1730~1775)이 그린 '고양이와 참새(猫雀圖)'.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이하곤(1677~1724)도 숙종이 승하한 해인 1720년 ‘궁중의 고양이에 대해 쓰다(書宮猫事)’라는 글을 지었다. 이 글에 따르면 숙종의 반려묘가 슬픔에 젖어 죽기까지는 나름의 사연이 있었다. 이하곤의 글은 숙종의 죽음을 애도하다 숨진 반려묘의 이름을 ‘금손(金孫)’이라 하였는데 김시민이 기록한 ‘금묘’와 동일한 고양이이다. 어느 날 숙종이 후원을 거닐다 굶어 죽기 직전의 어미고양이를 발견했다. 숙종은 궁인들을 시켜 그 어미고양이를 궁궐에서 기르게 하고 ‘금덕(金德)’이라는 이름도 지어 주었다. 금덕이 낳은 새끼가 다름 아닌 금손이었다. 이후 어미고양이 금덕이 세상을 떠나자 숙종은 장례를 지내주도록 명하고 금덕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까지 지었다. 이하곤이 생각하기에 금손이 숙종의 죽음을 슬퍼하여 목숨까지 버린 것은 자신의 어머니를 살리고 거두어 준 은혜에 보답한 것이었다.
조선시대 역대 왕들이 지은 시문을 모아 편찬한 ‘열성어제(列聖御製)’에는 숙종이 지은 ‘죽은 고양이를 묻어주다(埋死猫)’라는 글이 실려 있다. 이 고양이가 바로 어미고양이 금덕으로 짐작된다. 숙종은 귀한 짐승이 아님에도 고양이를 예우하여 묻어준 까닭을 글에 남겼다. 주인을 친근히 여기며 따르는 그 모습을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한낱 짐승에 불과하면서도 주인을 사랑할 줄 알았던 고양이에 대한 이 같은 예우는 지나친 것이 아니라고도 했다. 숙종이 고양이의 죽음 앞에서 지난날 고양이와 나누었던 정을 되새기거나 이하곤이 기록하였듯이 상 아래에 엎드려 있는 금손이에게 자신의 음식을 나누어 주는 모습은, 조강지처(인현왕후)를 모질게 궁 밖으로 내쫓았던 비정한 왕과는 사뭇 다르다.
하찮은 미물에게 따뜻했던 숙종의 숨겨진 성정을 물려받은 것일까. 훗날 숙종의 아들 영조(1694~1776)는 그의 아픈 팔을 치료하는 데 고양이 가죽을 써 보자는 내의원 관리의 말에, 여러 마리 고양이가 궁궐 담장 사이로 오가는 모습을 본 일이 떠올라 차마 그렇게 못하겠다고 답한다. 이런 따뜻한 마음을 숙종과 영조가 자신의 부인과 아들(사도세자)에게도 베풀었다면 조선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지 자못 궁금해진다.
이종숙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