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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 이민자에 미국은 친절하지 않았다... 오스카 10개 부문 후보 '브루탈리스트'

오스카 10개 부문 후보 오른 ‘브루탈리스트’

유대 건축가 통해 20세기 이민자 역경 그려

수려한 영상과 놀라운 연기가 빚어낸 ‘걸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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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유대인 건축가 라즐로 토스는 힘겹게 생활하다 백만장자의 제안으로 새 건물 건축에 나선다. 유니버설픽처스 제공

한 소녀의 얼굴로 영화는 시작한다. 취조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화면에 흐른다. 무표정한 소녀의 얼굴에는 근심과 체념과 불안이 어려 있다. 다음 장면은 한 중년 남자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남자는 어떤 곳에 막 도착했다. 그는 선실 밖으로 나가 뭔가를 보고 환호한다. 미국 뉴욕 자유의 여신상이다.


소녀와 남자는 조카와 삼촌 관계다. 두 사람은 유대인이다. 소녀는 탈출에 실패했고, 남자는 아메리칸드림의 나라에 안착했다. 남자는 조카와 달리 안락하고 희망찬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거리의 삶에 백만장자가 손 내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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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즐로는 서재 인테리어로 백만장자 해리슨과 인연을 맺게 된다. 유니버설픽처스 제공

남자는 라즐로 토스(애드리언 브로디)다. 헝가리에서 건축가로 일했다. 새로운 양식으로 갈채를 받았던 인물이다. 미국에서 그의 화려한 이력은 아무 쓸모가 없다. 부상으로 더 커진 코(매부리코는 유대인 특징이라는 편견이 있다)를 걱정해야 할 처지다. 미국에 오래전 안착한 사촌에게 몸과 마음을 기대야 한다. ‘인종 세탁’을 한 사촌은 뜨겁게 라즐로를 맞이한다. 하지만 호의는 오래가지 않는다.


거리로 내쳐진 라즐로에게 백만장자가 손을 내민다. 서재 인테리어 작업으로 인연을 맺은 해리슨(가이 피어스)이다. 그는 라즐로의 재능을 알아보고 건물 건축을 맡긴다. 아직 유럽에 붙잡혀 있는 라즐로의 조카와 아내 에르제벳(펠리시티 존스)의 미국 입국을 돕겠다고 나서기도 한다. 라즐로는 광기에 사로잡혀 건축에 매달린다. 해리슨은 라즐로의 삶을 구원할 선량한 후원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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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성가한 백만장자 해리슨은 오만불손한 인물이나 라즐로의 재능을 알아보고 적극 지원하겠다고 나선다. 유니버설픽처스 제공

영화는 라즐로의 역경에 초점을 맞추며 20세기 중반 미국 이민자의 삶을 스크린에 불러낸다. 라즐로는 거리에서 돈을 주고 욕정을 해소하며 외로움을 달래거나 노숙자 구호시설에서 아침을 맞이한다. 그는 여러 곳에서 날품팔이를 하며 돈을 벌어도 생활비 대기 바쁘다. 라디오 뉴스는 이스라엘 건국, 6·25 발발, 20년 만에 이뤄진 공화당의 의회 장악 등 급변하는 정세를 전한다. 격변의 시기 변하지 않는 게 있다. 이민자에 대한 무관심과 박대다.

개인 삶 반영한 건축 양식 '브루탈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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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즐로는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건축 양식을 밀어붙이며 건물을 만들어 나간다. 유니버설픽처스 제공

라즐로가 추구하는 건축 양식 ‘브루탈리즘(Brutalism)’이 시대를 반영하기도 하다. 브루탈리즘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건축 양식으로 단순한 외관의 거대 콘크리트 구조물을 특징으로 한다. 나치 탄압을 피해 미국에 건너왔으나 여전히 척박한 삶을 살아가는 라즐로의 내면을 대변한다. 제목 ‘브루탈리스트’는 라즐로의 건축 성향을 뜻한다.


개인의 삶과 건축 양식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킨 전개와 표현이 놀랍다. 수려라는 수식이 떠오를 장면들이 릴레이로 이어진다. 때론 장엄하고 때론 처량하면서도 종국에는 경외롭다. ‘걸작’은 이런 영화를 위해 존재하는 단어다.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은사자상)을 수상했다. 다음 달 2일(현지시간) 열릴 제97회 미국 아카데미상 시상식에 작품상과 감독상, 남우주연상(애드리언 브로디), 남우조연상(가이 피어스), 여우조연상(펠리시티 존스) 등 10개 부문 후보에 올라 있다. ‘에밀리아 페레즈’(13개 부문) 다음으로 최다 부문 후보다. 브로디가 수상하지 못하면 올해 아카데미 최대 이변이 될 듯하다. 배우로도 활동 중인 브레이디 코베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다. 상영시간은 215분(인터미션 15분 포함)이다. 12일 개봉, 청소년관람불가.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