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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산 구들장길 지나 봇재 녹차밭... 득량만은 이미 봄!

<188> 보성 득량면·회천면

한국일보

추위가 한풀 누그러지자 득량만을 끼고 있는 보성에선 이른 봄기운이 감지된다. 보성읍에서 율포해수욕장으로 넘어가는 봇재 아래 대한다원의 녹차밭은 여전히 푸르름을 유지하고 있다.

득량만은 전남 보성과 고흥 사이 넓은 바다다. 이곳도 초겨울 맹추위와 폭설을 비껴가지 못했지만, 차츰 예년 기온을 되찾으면서 잔잔한 바다엔 봄기운이 감지된다. 넓은 들판엔 보리 싹이 푸릇푸릇하고, 낮은 산자락 상록활엽수림의 녹음도 여전하다. 득량역에서 해안도로를 거쳐 봇재까지, 아직은 가물가물하게 느껴지는 봄의 온기를 찾아 나섰다.

득량역 ‘추억의 거리’, 알고 보면 현실 삶터

“억수로 반갑데이~.” 전남 보성 득량역 입구에 걸린 환영 문구다. 진한 전라도 사투리가 아니라 억세고 정감 있는 경상도 억양이다. 득량역은 1930년 개통한 경전선 기차역이다. 밀양 삼랑진역에서 광주 송정역까지 대한민국 남해안을 횡단하는 선로다. 개통 당시에는 화물의 비중이 컸지만 지금은 상하행선에 하루 각 4회 여객 열차가 정차하는 무인역으로 운영되고 있다.


역 주변은 1970~80년대 풍경을 재현한 ‘추억의 거리’로 단장돼 있다. 좁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단층 건물이 죽 늘어서 있다. 일부 빈집은 관광객을 겨냥한 장식이지만 현재도 옛 모습 그대로 영업하는 가게가 수두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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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량역 추억의 거리의 시간은 1970~80년대에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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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슈퍼의 이순신 어록을 패러디한 글귀. 1965년 동명상회로 문을 열어 지금껏 영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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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량역 추억의 거리에는 겉치장만 한 빈집과 실제 영업 중인 가게가 섞여 있다.

1965년 문을 연 동명상회를 비롯해 역전이발관(1967), 영풍농약사(1972), 득량떡방앗간(1974), 행운다방(1977) 등이 수십 년 세월을 끌어안고 여전히 손님을 맞고 있다. 옛 사진첩을 들추듯 지나간 시절의 풍경이 고스란히 박제된 모습이다. 아주 큰 볼거리는 아니지만 너무 빨리 변해버린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포착한 영화 속을 걷는 듯한 느낌이다.


추억의 거리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충무공 이순신과 관련한 장식과 문구다. 낡은 선로에는 거북선 모형의 레일바이크가 놓였고, 광장 맞은편 동명슈퍼에는 커다랗게 ‘내가 득량역에 온 것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라는 글귀가 붙어 있다.


'득량(得糧)'이라는 지명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이곳에서 식량을 구했다는 데서 유래한다. 1597년 8월(음력) 이순신은 보성 조양창과 평소 인연이 있었던 지역의 부자 양산원의 집에서 군량미를 조달해 걱정을 떨쳐낼 수 있었다. 양산원의 집은 득량역에서 멀지 않은 박실마을이다. 그의 집에 머무는 동안 지역에서 왜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던 고흥 출신 송희립, 보성 출신 최대성 장군으로부터 전황을 보고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득량역과 박실마을 사이에 최대성 장군을 기리는 충절사가 있다.


득량역에서 또 멀지 않은 곳에 ‘백범김구은거기념관’이 있다. 1898년 인천의 감옥에서 탈옥한 김구는 삼남일대를 돌며 피신하게 되는데, 이때 득량면 쇠실마을 김광언씨 집에서 45일간 은거했다. 광복 후인 1946년 9월에는 다시 이곳을 방문해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안동 김씨 종친과 지속적인 교류를 이어갔다고 한다. 나라의 영웅이자 지도자로 대접받는 두 인물이 300년의 간극을 두고 득량면과 인연을 쌓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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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량면 쇠실마을의 백범 김구가 은거했던 집. 바로 옆에 은거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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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량면 강골마을의 열화정. 마을 안쪽 깊숙한 곳에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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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골마을 열화정 뒤뜰엔 동백과 대나무가 어우러져 생기가 넘친다.

득량역 인근 강골마을엔 1800년대 지은 광주 이씨 고택이 몇 채 남아 있다. 이진래 고택을 끼고 마을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개울가 산기슭에 열화정이 고풍스러운 자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조선 헌종 11년(1845) 이진만이 후진 양성을 위해 세운 정자다. 열화(悅話)는 중국 시인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따온 문구로 ‘기쁘게 이야기하다’라는 뜻이다. 먼 곳에서 온 지인과 학문을 논하고, 일가친척 간 우애와 화목을 강조하는 의미다. 정자 앞마당의 연못은 바닥을 드러내 스산한데 뒤뜰엔 푸릇푸릇 생기가 넘친다. 황토 담장을 사이에 두고 늙은 동백과 대숲이 녹음을 뽐내듯 어우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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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나무와 온갖 상록활엽수가 어우러져 푸르름을 자랑하는 초암정원.

열화정에서 산자락을 돌면 전라남도 민간정원 3호인 ‘초암정원’이 있다. 광산 김씨 후손 김재기씨 형제가 노령의 어머니가 농사일에 매달리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비탈밭을 갈아 잔디를 깔고 동백을 비롯한 상록활엽수를 심어 조성한 정원이다. 지난해 11월부터 피기 시작한 동백이 한창을 넘겼지만 붉은 꽃 가지 사이에서 동박새 지저귀는 소리가 요란하다. 뒷산 정상 바로 아래까지 편백숲이 조성됐다. 나무가 크지는 않지만 대숲과 어우러진 편백숲 산책로가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산 중턱 정자에선 간척으로 생긴 예당평야와 득량만이 평온하게 내려다보인다.

애환 서린 돌산 산책로… 오봉산 구들장길

득량역 추억의 거리에 소 한 마리가 무언가 가득 실은 수레를 끌고 가는 그림이 있다. ‘따스한 사람, 따스한 정, 구들장’이라는 문구가 적혔다. 인근 오봉산에 서린 주민들의 애환을 표현한 그림이다.


오봉산은 예전부터 널돌이 흔해 온돌방에 사용할 방돌(구들돌)을 채취하는 곳이었다. 아주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적당한 두께에 웬만한 불길에도 쉽게 터지지 않아 인근에서 집을 새로 지을 때면 지게로 져 날랐다고 한다.


1930년 기찻길이 놓이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오봉산 구들돌은 득량역을 통해 서울과 부산 등 전국 각지로 팔려나갔고, 주민들은 물량을 대기 위해 가파른 산비탈을 부지런히 오르내렸다. 힘들고 끔찍한 노동이었지만, 배고픈 시절 돈 되는 일이었으니 너도나도 매달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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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산은 구들돌을 채취하던 주민들의 애환이 서린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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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산 칼바위로 가는 등산로에서도 널돌을 흔히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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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산 칼바위 가는 등산로 주변에 널돌로 여러 기의 탑을 쌓아 놓았다.

노출된 바위는 열에 곧 터져 버리기 때문에 구들돌은 땅속에 묻힌 걸 쪼개서 캤다. 땅을 파고 정으로 쪼개 뜯어내는 것도 고된 노역이었지만, 산 아래까지 나르는 건 더 힘들고 위험한 일이었다. 가파른 산비탈에 갈 지(之)자로 길을 내고 8부 능선까지 소달구지를 끌고 올라가 구들돌을 실어 날랐는데, 이 과정에서 달구지가 구르거나 엎어지는 일이 다반사였고, 소와 사람이 다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목숨을 건 고된 노동은 1970년대 말까지 지속됐다.


그렇게 피눈물 섞인 오봉산에 현재는 등산로가 개설됐고, 그 애환을 녹여 ‘구들장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해발 300m가 조금 넘는데, 아주 힘들지는 않지만 그리 만만한 산도 아니다. 이름처럼 다섯 봉우리를 오르락내리락하기 때문에 종주에 3~4시간은 걸린다.


경관이 가장 특출한 곳으로 칼바위를 꼽는다. 종주 능선상 중간지점인데, 주차장에서 바로 올라가는 코스도 있다. 약 1㎞ 제법 가파른 산길이지만 험하지는 않다. 중턱부터는 주변에 흔한 널돌로 낮은 담장을 쌓아 등산로가 마치 돌담길 같다. 봉우리 바로 아래 너덜지대에는 여러 개의 돌탑을 쌓아 놓았다. 오봉산 전체에 이런 돌탑이 약 40개에 달한다.


이곳에서 조금만 치고 오르면 칼바위다. 지름 수십 미터에 달하는 커다란 바위가 번개를 맞은 듯 서너 덩어리로 갈라진 모양새다. 쪼개진 틈으로 난 통로로 들어서면 하늘만 뚫린 좁은 공간이 나타나는데 미답의 동굴 속으로 들어선 듯한 착각에 빠진다. 하늘을 올려보니 갈라진 자국이 예리한 칼로 도려내듯 날카로우면서도 물살에 닳은 듯 곡선이 부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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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산 칼바위는 커다란 바위가 예리하게 여러 조각으로 갈라진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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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진 틈 사이에서 본 오봉산 칼바위. 정면 덮개 모양으로 생긴 바위에 불상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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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산 칼바위의 가파른 암벽에 새겨진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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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산 능선에 오르면 득량만 해안마을과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부리처럼 휘어진 30m 높이의 바위 안쪽에는 희미하게 불상이 새겨져 있다. 통일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불도를 닦았다는 전설이 전해지지만, 누가 무슨 연유로 이 위험한 곳에 불상을 새겼는지는 알 길이 없다. 요즘처럼 든든한 암벽 장비를 갖춰도 오르기 힘든 지점이라 대담함과 집중력, 무엇보다 불심이 충만한 석공이라야 가능했을 듯하다. 칼바위에서 돌담으로 다듬은 산길을 조금만 오르면 오봉산 능선이다. 맞은편으로 비봉리 마을과 들판이 정겹게 내려다보이고, 그 앞으로는 득량만 바다가 풍성하게 펼쳐진다.

초록 가득 녹차밭은 이미 봄인 듯

득량만을 끼고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회천면 율포를 거쳐 장흥으로 이어진다. 칼바위 능선에서 내려다보이는 마을에는 공룡테마파크인 보성비봉공룡공원이 있다. 일대 해안은 약 8,500만 년 전 중생대 백악기 시대 공룡의 산란지로, 대규모 공룡알 화석이 발견된 곳이다. 인근 선소항 서쪽 해안에 산책로를 조성해 놓았는데, 안타깝게도 현장에서 실물을 찾기는 어렵다. 산책로 입구에 모형 화석을 전시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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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량만 선소항의 바다낚시터. 카페를 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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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향만 선소항 주변에선 대규모로 공룡알 화석이 발견됐다. 포구 옆에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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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량만을 따라 걷는 보성 남파랑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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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득량만 바다에 아침 햇살이 부서지고 있다.

이곳에서 율포해수욕장까지 해안도로는 남해안 걷기 길인 남파랑길과 나란히 이어진다. 잔잔한 득량만 바다를 바라보며 잠시 쉬어가도 좋겠다. 율포해수욕장에서 보성 읍내로 이어지는 봇재 남쪽 사면은 온통 차밭이다. 능선 따라 연결된 층층의 밭고랑이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봇재에서 율포로 내려가는 도로가에 3~4군데 전망대 겸 쉼터가 조성돼 있어 무료로 보성의 진풍경을 즐길 수 있다.


봇재 맞은편의 대한다원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차(茶) 관광농원이다. 1957년부터 농원을 가꿨으니 조경도 세월만큼 짜임새 있고 원숙하다. 입구에 삼나무 가로수가 하늘을 찌르고, 가파른 산자락에 조성된 차밭도 잘 정돈된 산책로를 갖췄다. 휘어지는 밭고랑마다 초록의 찻잎이 반짝거리고, 군데군데 가지만 남은 목련과 꽃사과가 은백색 매력을 발산한다. 눈길 닿는 곳마다 이른 봄 빛깔이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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봇재 도로변에서 본 보성차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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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관농원을 겸하고 있는 대한다원의 녹차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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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다원 삼나무 가로수 아래 차밭에 햇살이 부서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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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포녹차해수센터의 노천탕. 정면으로 율포해수욕장과 득량만이 펼쳐진다.

봇재에서 내려오면 율포녹차해수센터가 있다. 지하 120m에서 끌어올려 녹차를 우린 해수탕 안에 몸을 담그면 여행의 피로가 스르르 풀린다. 입장료 5,000원에 옷 대여료 2,000원을 더하면 노천탕까지 즐길 수 있다.


보성=글·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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