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실종 아니라 호랑이 밥 됐다"... 미국 백만장자 둘러싼 반전의 진실게임

<53> 미궁에 빠진 돈 루이스 실종 사건

한국일보

1997년 실종된 미국의 백만장자 돈 루이스가 자신이 키우던 대형 고양잇과 동물과 찍은 사진. 뉴욕포스트 홈페이지 캡처

미국의 백만장자 돈 루이스는 전형적인 '아메리칸 마초'였다. 미국 사회 주류인 백인 남성이었던 데다, 술·총·여자에 집착했고 말과 행동도 거칠 것이 없었다. 특이한 게 있다면, 유별난 대형 고양잇과 동물에 대한 사랑이었다. 루이스는 부동산 사업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렸고, 이 돈으로 호랑이·표범 등을 사들였다. 키우는 호랑이가 30마리를 넘어서자, 아예 '와일드 온 이지 스트리트'라는 개인 동물원도 만들었다.

한국일보

미국의 백만장자 돈 루이스의 부인인 캐럴 배스킨의 젊은 시절의 모습. 루이스는 1997년 실종됐는데, 배스킨이 그의 살해 배후로 최근 지목되고 있다. 레딧닷컴 캡처

루이스 옆에는 캐럴 배스킨이라는 금발의 백인 미녀가 있었다. 영화 '원초적 본능'의 주연배우 샤론 스톤을 닮은 배스킨은 30세였던 1991년, 23세 연상인 루이스와 결혼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배스킨도 대형 고양이들을 키우는 것에 큰 행복을 느꼈다. 이후 그는 돈 많은 남편을 설득해 '빅 캣 레스큐(Big Cat Rescue)'라는 이름의 대형 고양이 보호단체를 창설했다.


미 플로리다주(州)의 대저택 앞마당에 풀려 있는 호랑이와 '터프 가이' 갑부인 백인 남성, 그리고 매혹적 외모의 젊은 백인 여성. 루이스와 배스킨의 삶은 할리우드 영화의 클리셰, 그 자체였다.

"남편이 사라졌다"... 거액 유산 거머쥔 배스킨

한국일보

1997년 실종된 미국의 백만장자 돈 루이스(오른쪽)와 부인 캐럴 배스킨이 자신들이 키우던 고양잇과 동물들과 찍은 사진. 미국 CBS방송 홈페이지 캡처

화려하기 그지없던 루이스·배스킨 부부의 일상은 1997년 8월 17일 저녁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날 따라 부부는 더 험하게 싸웠고, 두 사람의 저택을 관리하는 직원들이 이 모습을 목격했다. 그러나 호랑이들이 자유롭게 뛰어놀던, 70헥타르(ha) 면적의 정글과도 같은 대저택의 밤은 금세 어두워졌고 직원들도 "또 저런다"고 혀를 끌끌 차면서 별일 아닌 듯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19일 오후 1시, 배스킨은 경찰에 "루이스가 실종됐다"고 신고했다. "17일 코스타리카로 보낼 짐을 싸던 루이스가 18일 아침 갑자기 사라졌다"고 뒤늦게 알린 것이다. 경찰은 인근 지역 수색에 나섰고, 이틀 후 미국 플로리다주 파일럿컨트리 공항에서 루이스의 차량을 발견했다.

한국일보

1990년대에 돈 루이스가 코스타리카인 명의로 구입한 것으로 확인된 코스타리카 수도 산호세의 한 주택의 모습. 뉴욕포스트 캡처

이후 상황은 간단하게 정리됐다. 플로리다 경찰은 루이스가 그의 호랑이들을 옮기기 위해 준비해 둔 코스타리카 농장과 다수의 차명 재산을 확인했다. "남편 루이스는 비행 면허도 없이 경비행기를 타고 코스타리카에 자주 가곤 했다. 그런데 아직 연락이 없는 걸 보면 경비행기가 멕시코만에 추락한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이 같은 배스킨의 차분한 진술을 끝으로 루이스는 실종 처리됐다.


그리고 5년 후인 2002년, 루이스는 '법적 사망' 상태가 됐다. 배스킨은 루이스가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세 딸을 제치고, 수백만 달러의 유산과 동물원을 상속받았다. 루이스 실종 사건은 이렇게 세간에서 잊히는 듯했다.

‘타이거 킹’이 쏘아 올린 "배스킨의 살해" 의혹

한국일보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타이거 킹'에 출연했던 조 이그조틱이 자신이 키우는 호랑이와 사진을 찍고 있다. 폭스뉴스 캡처

하지만 2020년 대반전이 시작됐다. 그해 3월 방영돼 미국에서 큰 화제가 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타이거 킹'이 루이스의 실종 사건을 짧게 언급했고, 대중의 관심도 커지면서 수많은 타살 의혹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타이거 킹'은 미 오클라호마주에서 루이스처럼 호랑이 등 대형 고양잇과 동물을 사들여 동물원을 운영하는 조 이그조틱이 그의 사업을 막아선 배스킨과 겪은 갈등을 다룬 프로그램이다.


대중의 관심이 쏟아지자, 이그조틱과 그를 지지하는 미국인들은 배스킨을 향해 '위선자이자 살인자'라는 비난을 쏟아냈다. 20년 가까이 배스킨과 갈등을 빚으며 광범위한 자료를 수집했다는 이들은 "실종되기 직전 이혼을 생각하던 루이스가 위자료를 줄이려 자산을 코스타리카로 몰래 이전하다가 배스킨한테 들켰다"며 "루이스를 계속 위협하던 배스킨은 그를 살해한 뒤 실종된 것으로 위장했다"고 주장했다.

한국일보

캐럴 배스킨이 자신이 운영하는 '빅 캣 레스큐' 동물원에 있는 호랑이를 소개하고 있다. 더미러 캡처

심지어 익명의 제보가 잇따르면서 "배스킨이 루이스를 죽인 뒤, 동물원 내 고기 분쇄기에 그의 시신을 갈아서 호랑이한테 먹이로 던져 줬다"는 극단적 음모론도 나왔다. 루이스 실종 사건을 추적하던 사설탐정 잭 리퍼 역시 '루이스 살해설'에 힘을 보탰다. 리퍼는 "여러 정황을 종합하면 루이스의 시신은 그의 사유지 내 호수에 던져져 악어의 밥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배스킨은 다음과 같이 짧고 간결하게 대응했다. "거짓말 좀 그만해라. 나는 절대 남편을 죽이지 않았다."

접근금지 신청·고기 분쇄기 진술… 배스킨이 진짜 살해범?

한국일보

2020년 9월 캐럴 배스킨(왼쪽)이 미국 인기 예능 프로그램 '댄싱 위드 더 스타'에 출연한 모습. 엔터테인먼트 투나잇 홈페이지 캡처

논란이 일던 초기, 여론은 배스킨 옹호 쪽으로 쏠렸다. 동물 애호가인 여성이 남편을 살해한 뒤, 그의 시신을 호랑이 먹이로 던졌다는 건 쉽사리 믿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배스킨은 미국 인기 예능 프로그램인 '댄싱 위드 더 스타'에 출연하면서 전국구 유명인사가 됐다. 수백만 명이 그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접속했고, 빅 캣 레스큐에 대한 후원금도 쏟아졌다.


그러나 지난해를 기점으로 상황이 묘하게 변했다. 우선 루이스의 행적이 사라지기 불과 한 달 전인 1997년 7월, 실제로 그가 "배스킨이 나를 죽이겠다고 협박한다"며 법원에 접근금지 신청을 했던 사실이 뉴욕포스트 등 언론 보도로 드러났다. 법원이 이를 기각해 루이스는 배스킨과 물리적 거리를 두지 못했지만, 이그조틱과 일부 추종자들이 내놓은 주장이 사실로 밝혀진 셈이다.

한국일보

1997년 실종된 미국의 백만장자 돈 루이스의 저택 관리 잡부였던 케니 파의 부인 트리시 파페인이 미국 CBS방송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CBS 캡처

그 결과, 황당한 음모론으로 치부됐던 '호랑이 밥' 얘기도 재조명을 받고 있다. 미 CBS방송 보도에 따르면, 루이스가 자취를 감춘 시간으로 추정되는 1997년 8월 18일 밤 11시쯤 루이스의 저택 관리 잡부였던 케니 파는 "루이스가 평소 아끼던 장총 등 총기류를 잔뜩 싣고 자신의 집에 도착했다. 총기류는 배스킨이 선물로 준 것"이라고 말했다.


파는 아내에게 "루이스가 사라졌다. 너는 이 이야기를 앞으로 절대 하면 안 된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그럼에도 아내가 자꾸 진실을 캐묻자 그는 "(자꾸 그러면) 너도 '루이스처럼' 고기 분쇄기에 처넣겠다"고 고래고래 소리쳤다고 한다.


파는 단순 목격자가 아니라, 루이스 살해의 공범이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미 폭스뉴스는 "2021년 5월 한 시민이 '루이스가 사라진 지 1년이 지난 뒤 파가 이지 스트리트 동물원이 아닌, 172에이커 규모인 루이스의 또 다른 개인농장 안에서 그의 시신을 다시 확인하는 모습을 봤다'고 수사기관에 진술했다"고 보도했다. 현재 파와 관련된 복수의 진술은 검찰로 이첩된 것으로 알려졌다.

조작된 유언장, 다시 시작된 경찰 수사

한국일보

지난해 11월 캐럴 배스킨이 영국 ITV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ITV 캡처

배스킨을 향한 의심의 눈초리는 지금도 여전하다. 우선 루이스의 유언장 내 서명이 위조된 것으로 판명됐다. 유언장 발동 조건도 '사망'이 아닌 '실종'으로 적시된 것으로 확인됐다. 누군가 루이스의 실종을 예견하지 않고선 쓰기 힘든, 매우 이례적인 표현이다. 배스킨은 2002년 따로 보관하고 있던 유언장을 직접 당국에 제출한 당사자다.


여론이 꿈틀대자 배스킨도 가만있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영국 ITV와의 인터뷰에서 "미 국토안보부(DHS)가 코스타리카에서 잘 살고 있는 루이스의 존재를 확인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멕시코만에서 실종된 줄로만 알았던 루이스의 생존 사실을 내세워 '난 살해범이 아니다'라는 방어 논리를 펼친 셈이다. 그러나 플로리다주 경찰은 "여전히 우리의 주요 관심사는 루이스의 행방"이라며 "DHS로부터 이와 관련된 어떤 통보도 받은 바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한국일보

미국 플로리다주의 한 도로변에 설치된 광고판의 모습. 돈 루이스 사망과 관련된 결정적 제보를 한 사람에게 10만 달러를 주겠다는 취지의 문구가 적혀 있다. 주마프레스 캡처

현재 플로리다 경찰은 의욕이 넘치는 모습이다. 최근 20여 년 만에 배스킨과 파에 대해 재소환을 통보했고, 코스타리카 현지 탐문도 재개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배스킨 측은 "(루이스의) 실종 당시 거짓말탐지기 조사를 포함한 모든 진술을 마쳤다"는 태도로 버티며 수사에 협조하지 않고 있다.


과연 루이스는 실종된 것일까, 살해된 것일까. 배스킨은 호도된 여론의 억울한 희생자일까, '얼음 송곳'을 뒤에 숨긴 살인마일까. 현재로선 수사당국의 결론을 예단할 순 없다. 다만 아직까지도 오리무중인 루이스의 행방이 해답의 열쇠라는 건 분명해 보인다.


정재호 기자 next88@hankookilbo.com

오늘의 실시간
BEST
hankookilbo
채널명
한국일보
소개글
60년 전통의 종합일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