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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도] “스태프야, 배우야” 조롱 딛고 여우주연상 쥐기까지

[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48>배우 정영주


안해본 알바 없고, 성추행범 퇴치도 여러 번


“필요한 때 말을 안하는 게 가장 비겁해…


배우에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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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이런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꿈을 꿨다. 슬그머니 “이리 와봐, 뭐 힘든 일 있어?” 물어주는 언니, 듣더니 “나는 네 나이에 그런 고민조차 못했는데”라고 말해주는 언니. 언니 덕분에 한결 표정이 가벼워지면, 언니는 환하게 웃으며 “자, 어서 가봐!”하며 엉덩이를 세상 속으로 밀어준다.


언니는 비밀을, 정말 비밀로 여겨준다. “이거 나만 알아야 하는 일이야? 입 다물고 지킬게. 그런데 혹시라도 다른 사람한테 얘기할까 봐 불안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하지 않아도 돼.”


그러니 그 언니가 “이런 작품이 있는데, 나랑 공연 할래?” 했을 때, 동생 배우들이 개런티(출연료)도 안 묻고 “알았어요!”한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여성 배우 10명이 뭉친 작품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다. 여성 배우들만 무대에 오른, 한국에선 전무후무한 뮤지컬이다. 배우 정영주(49)씨는 이 작품으로 지난해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데뷔 25년 만에 처음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그는 최근엔 드라마에서 미워할 수 없는 악역으로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열여덟의 순간’, ‘황금정원’, ‘부암동 복수자들’, ‘저글러스’, ‘시그널’이 주요 작품이다.


키 169㎝에 구릿빛 피부, 시원시원한 몸매만으로도 눈길을 사로잡는 그는 데뷔 초엔 “스탭(스태프)같이 생겨서 (연기) 몇 년이나 하겠어”라는 소리를 별명처럼 듣고 살았다. 인형 같은 외모의 배우들이 예나 지금이나 주연에 조연까지 꿰차는 게 공연판이니 말이다. 누구는 그렇게 불렀을 망정, 그는 동료와 후배들에게 믿을 수 있는 친구이자 언니가 돼줬고, 이들과 함께 ‘베르나르다 알바’라는 큰 족적을 만들어냈다. ‘여배우 10명이 나오는 작품을 누가 보겠어’란 우려를 관객은 ‘티켓 예매 시작 2분 만에 매진’으로 시원하게 깨줬다. 그가 출연 배우들에게 원작 희곡집을 선물하며 적은 말 ‘우리 ‘베르나르다 알바’로 날자!’처럼, 진짜로 비상한 것이다. 언니는 다시 여성들의 서사를 준비한다. ‘마음 움직일 수 있는 좋은 작품을 써봐’라는 심연의 메시지에 응답해 습작을 시작했다. 그는 뮤지컬에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언니의 인생 구력은 다양한 노동 경험에서 나왔는지 모른다. 주유소 아르바이트, 과수원ㆍ가락시장 노동, 카페 직원, 에어로빅 강사, 나레이터 모델, 신문 광고지 삽입…. 당장 꼽아도 이 정도다. 지하철과 버스, 카페에서 성추행범을 퇴치한 일화는 또 어떻고. 언니는 말했다. “필요한 말과 행동을, 필요한 때에 하지 않는 게 가장 비겁한 일이잖아요.” 뭐지? 이 언니에게 자꾸만 기대고 싶어진다.


15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한국일보 K-ART 스튜디오에서 배우 정영주씨를 만났다. 인터뷰는 6시간을 훌쩍 넘겼다. 과거를 재연하는 그의 연기와 유머 덕분에 뮤지컬을 보는 듯 흥미진진했다.


◇여성만 서는 뮤지컬로 ‘BTS’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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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여우주연상을 받게 한 작품이 ‘베르나르다 알바’라서 더욱 의미가 있었을 것 같아요.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된 게 처음이었어요. 숫자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그래도 데뷔 25주년(2019)에 받아서 괜히 기분도 더 좋았고요. 이 작품을 두고 처음엔 ‘한국에서 이걸 할 수 있겠어’ 했거든요.”


-여성 배우들만 나오는 작품이라서요?


“그렇죠. 이런 작품이 있다는 건 11년 전쯤 처음 알았어요. 각국 유명 극단에서 연극으로 많이 올렸고, 또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로도 공연됐죠. ‘아니, 그런 작품이 있어? 한국에서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러다 2013년 즈음 작곡도 하고 번역도 하는 친구 박천휘가 뭘 열심히 작업하기에 ‘뭔데’하며 들춰봤는데 그 작품인 거예요! 그 자리에서 다 읽어내려갔죠.”


미국 뮤지컬 작곡가 겸 극작가 마이클 존 라키우사의 ‘베르나르다 알바’였다. 스페인 시인 겸 극작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희곡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이 원작이다. 1930년대 초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이 배경인 비극이다. 두 번째 남편의 장례식으로 시작하는 극의 주인공이 베르나르다 알바다. 다섯 딸의 행동과 본능을 억압하는 폭군이자, 가부장 권력의 상징으로 그려진다.


-뮤지컬로 올리려고 번역을 하던 거였군요.


“맞아요. 내가 서지 않아도 누가 공연하는 걸 보기라도 하면 좋겠다 싶었는데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준비가 시작됐죠. (공연 기획사인) 우란문화재단과 함께 배역마다 어울릴 만한 배우들을 떠올리고 모든 인맥을 동원해 섭외를 했어요. 그 중에 제가 연락을 할 수 있는 배우들에겐 직접 전화를 했죠. 황석정, 이영미, 전성민, 오소연, 정인지였어요. 김국희, 백은혜를 우란에서 섭외했고요. 또 오디션을 봐서 김환희, 김희어라가 선발됐죠.”


-섭외 연락을 했을 때 반응이 어땠나요.


“그 다섯 배우 모두 한번에 ‘오케이’를 했어요! (친구인) 황석정 배우한테 전화해서 ‘자기야, 공연할래?’ 했더니, ‘뭔데?’ 하기에 ‘베르나르다 알바!’ 하니까 ‘나 들어봤어! 자기도 해?’, ‘응!’, ‘그래, 하자!’ 이렇게 섭외 끝. 정인지 배우도 ‘인지야, 작품하자’ 하니, ‘네, 언니! 뭐든 해요!’ 이랬죠. 다들 돈을 얼마 주는지 묻지도 않고 말이에요. 연출을 구스타보 자작이 맡았는데 첫 연습 뒤 회식에서 그러더군요. ‘어떻게 이렇게 모였니. 이런 에너지를 가진 배우들은 처음 봐!’라고.”


-여성 배우들이 이끌어가는 무대에 대한 갈증이 있었을 것 같아요.


“맞아요. 우리 얘기를 좀 하자는 거였죠. 뮤지컬뿐 아니라 영화도 비슷할 거예요. 예를 들어, ‘고유정 사건(전 남편을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혐의로 구속기소)’을 영화로 만든다 쳐도, 실제 제작할 때는 주인공을 고유정이 아니라 이 사건을 쫓는 남자 형사로 하겠죠. 우리 배우들끼리는 그런 얘기를 해요. 그런데 그걸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여기면 안 되잖아요.”


시종일관 음습하고 소름마저 끼치는 무대에서 배우들이 만든 합일의 에너지는 관객을 공명시킨다. 그 중에서도 손뼉을 치고 바닥을 구르며 보는 이의 마음에 내리꽂히는 플라멩코 장면은 백미로 꼽힌다.


“플라멩코는 스페인의 정신이 담긴 춤인데, 한국 정서에도 잘 맞아요. 우리 전통악기 중에 북, 징, 장구가 심장을 건드리는 특성이 있잖아요. 플라멩코도 바닥을 울리는 리듬감이 있기 때문에 거기서 오는 정서적 교감이 있죠. 이 작품은 관객이 코앞에 있지 않으면 안 돼요. 배우와 관객의 눈높이가 같아야 하죠. 내 콧속에서 삐져나온 코털이 보이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배우들이 모인 거예요. 오케스트라도 굉장히 중요한 작품이죠. 한 박자, 한 기운으로 가야 하거든요. 그러니 이 작품의 배우는 오케스트라까지 22명이라고 할 수 있어요.”


-티켓 오픈 2분 만에 매진 기록도 세웠죠?


“그래서 제가 ‘우리는 뮤지컬계의 BTS다’라고 그랬어요. ‘베르나르다 알바 티켓 솔드아웃’을 줄여서요! 하하.”


◇男主 개런티 3,000만원 받을 때 女主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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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배우들이 작품을 만들면 과정도 다를 것 같은데요.


“우리는 연출과 배우들이 동등하게 소통하길 바랐어요. 외국인 연출가들이 한국에 와서 작품을 할 때 배우들과 충돌하는 일이 더러 있거든요. 그걸 원치 않았죠. 처음 구스타보가 자신이 생각하는 디렉션을 얘기할 때 때로 배우 입장에선 불만이나 이견도 더러 있었지만, 모두 존중하고 들었죠. 신 바이 신(scene by scene)으로 워크 스루(work through)하면, 연출가도 스태프도 배우들도 문제가 보이기 마련이거든요. 그때 연출가에게 배우들의 의견을 전했어요. 첫 공연 때 올 기립박수를 받았거든요. 커튼콜 때 제가 마지막으로 나가서 인사를 하면서 연출가를 보니까 어깨를 들썩이면서까지 눈물을 흘리고 있더라고요. 제가 연출가를 향해 손을 뻗으니 관객이 또 박수를 쳐주고요. 그날 회식을 하는데 구스타보가 ‘당신들에게 정말 고맙다’고 하더군요.”


실제 공연 준비 과정에서 연출가가 배우들에게 일방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하달하거나, 배우가 연출가의 지시를 거부하는 일이 생각보다 잦다. 이 공연을 준비하면서는 그런 정서적 시행착오나 소모를 하지 않고 싶었던 거다. 배우도, 연출도 모두 자신의 기를 죽이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의 얘기가 배우들의 노동권까지 흘러갔다.


“후배들에게 참 미안해요. 제 세대에서도 해결을 못해서요. 지금 최저임금이 8,000원대 중후반(8,590원)인데 막내 앙상블 배우들은 이 수준도 받지 못하곤 하죠. 배우는 공연 시간에만 노동을 하는 게 아니거든요. 공연 3, 4시간 전이 분장콜(분장시작 시간)이니까요. 극단에서 정해주는 출근 시간부터 따지면, 한 회 공연에 적어도 7만원은 받아야 해요. 그런데 그렇지가 못해요. 출연료 불균형은 점점 심해져서 빈익빈 부익부의 악순환이죠.”


-출연료 격차가 어느 정도이길래요?


“주인공 배우가 1회 출연에 수천만 원을 받는데 반해 막내 배우는 1회에 3만원, 5만원을 받기도 해요.”


-주연 개런티도 성별 격차가 있나요.


“그럼요. 많게는 남자 주인공이 1회에 3,000만원 받을 때, 여자 주인공은 100만원을 받기도 하니까요. 남자 배우가 주인공을 하면 강북에서 강남으로 이사 가고, 여자 배우는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예요. 이게 세계적 추세라는 게 슬픈 일이죠.”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는 배우 정영주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하고 싶고,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걸 다 한 작품! 예를 들면, 관객을 정말 우습게 봐야 하는 신이 있었어요. ‘우리 다 그 마음으로 하자’ 해서 배우 누구 하나 벗어나지 않고 그 신을 했죠. 그런 에너지에 관객의 마음이 움직였다고 봐요. 후기 중에 이런 게 있었어요. ‘예쁜 남자 배우의 홍수 속에서 이 멋있는 배우들을 보는데 나는 그들의 성별을 잊어버렸다’는. 그런 후기를 보면서 우리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했죠.”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안고 머리를 힘있고도 우아하게 쓸어올리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배우란 말, 안좋아해요. 그냥 배우! 대한민국의 배우입니다. 여배우 10명 모으는 거 어렵지 않았어요. 여배우 10명이 나오는 공연을 올리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20일간, 총 2,350명의 관객이 보셨습니다. 혹시라도 저를 롤모델로 삼고 있는 후배들이 있다면, 버티세요. 끝까지 버티세요. 이런 날이 오네요.”


유머와 페이소스가 녹아든 소감이었다.


◇자랑 좀 하자면, 타고난 솔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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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유쾌한 성격인가요?


“네, 좀 시끄러운 사람이에요. 하하. 집에서만 축 쳐져있죠. 후줄근하고 무릎 나온 바지를 입고서 ‘소파 귀신’이 돼요. 하지만 일주일이면 그런 날은 하루도 못 가요.”


-어릴 때 합창단과 성가대를 꾸준히 했더군요.


“노래 부르는 걸 좋아했어요. 친구 따라 ‘누가누가 잘하나’(TV 동요대회) 예심 갔다가 저만 본선에 간 일도 있었죠. 4학년 때 가을 소풍 가는 버스 안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때 이미 바이브레이션을 할 줄 알았어요. 태어날 때부터 솔리스트였던 거죠! 하하.”


학교 안에선 합창단, 밖에선 성당 성가대로 노래를 했다. 전문 성악교육을 받은 것도 아닌데 고등학교 때 콜로라투라(빠른 트릴과 화려한 꾸밈음이 특징인 성악 기교)가 됐다.


“중창단 선생님이 성악과를 권하더라고요. 그래서 고3 때 6개월 간 성악 공부를 했지만, 성악과는 그 정도로 갈 수 있는 학과가 아니었어요.”


성악과는 낙방하고, 서울예전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그마저도 개강 두 달 남짓 만에 그만 뒀다. 동아리방에서 시답잖은 농담을 했다가 당한 인간적 모멸감 때문이었다. 학교에 나가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제적 처리가 됐다. 등록금 212만원을 대준 부모에게 미안해, 1년이나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학교에 안 나가고 그럼 뭘 했나요.


“운동이나 하려고 동네 에어로빅 학원에 갔더니 딱 저같이 생긴 선생님이 있더라고요. 키는 175㎝, 허스키하고도 볼륨 있는 음성! 에어로빅이 아니고 재즈 엑서사이즈를 가르치는 원장님이었어요. 이름도 마음에 들고 동작도 세련됐더라고요. 하하. 저를 보더니 원장님이 ‘자격증 따자’ 해서 4개월 만에 자격증을 땄죠. 그때 16㎏이 빠져서 제 인생에서 가장 날씬한 시절이었어요. 하하. 그 학원에서 ‘새끼 강사’로 1년 9개월을 일했죠. 원장님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시면서 저도 그만두게 됐어요. 그때부터 다양한 알바의 생활이 시작됐죠.”


-어떤 일들이었어요?


“주유소 알바, 또 과수원에 가서 포도나 사과를 갱지나 신문지로 싸는 일도 했어요. 진짜 힘들지만 돈을 많이 받았죠. 가락시장에서 팔 수 있는 과일을 골라내는 작업도 했고요. 신장개업한 매장 앞에 서서 노래 가사 바꿔 부르면서 홍보하는 일도 했죠. 신문지 사이에 광고지 끼우는 것도 했어요. 저 그거 진짜 잘해요! (TV프로그램) ‘생활의 달인’ 보면서 ‘아, 나도 저렇게 했는데’ 하죠. 하하. 돈을 벌어서 세계일주를 하고 싶었거든요. 배낭여행 한번 다녀오고 말았지만.”


-‘알바의 세계’는 얼마나 경험했나요.


“띄엄띄엄이긴 했지만, 한 2년쯤 했죠.”


-알바도 사회생활이니 별의별 일을 다 겪었을 듯해요.


“한번은 작은 아버지가 제가 노는 게 딱해 보였는지 아는 분께 부탁해서 역삼동 서울상록회관 공무원매장 커피숍에 취직을 시켜줬어요. 매니저 입장에서는 제가 낙하산이었죠. 그런데 진짜 X또라이였어요!”


-어땠기에요?


“매니저가 일상적으로 직원들을 의심했죠. 저는 입바른 소리를 했다가 행주로 얻어맞기도 했고요. 속으로 ‘아니, 내가 이딴 데 왜!’ 했다가도 작은 아버지를 생각하면 있어야 했죠. 그러다 일한 지 3개월도 안 돼서 사달이 났어요.”


-무슨 사건이죠?


“금요일이면 늘 아침 운동 끝나고 들르는 퇴직한 교장이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제가 옆 테이블에 설탕과 프림을 갈아 넣고 있는데 제 엉덩이를 탁 만지시더군요.”


-헉! 그래서요?


“화들짝 놀래지지도 않고 순간 속으로 ‘어, 이거 뭐지’ 싶더군요. 지금이라면 바로 대처를 했겠지만.”


-불과 스물 셋이었으니까요.


“맞아요. 지금처럼 성추행이니 성희롱이니 하는 말도 없던 때고요. 아무튼 나쁜 짓이니 성질이 확 나더군요. 그래서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했더니 매니저가 왔어요. 그런데 ‘너 이 분이 뉘신 줄 아느냐’면서 ‘당장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하더군요. 저는 가만히 있었죠. 그때 그 전직 교장이 ‘내가 미스 정한테 무슨 짓을 했어요?’ 하는데 얼굴이 괴물처럼 보이더라고요. 배운 사람도 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날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결정했죠. 그 전에도 매장에서 손님들이 직원들의 몸을 집적대는 일이 정말 많았지만 매니저는 매번 눈감았죠. 제가 그날 벌로 당직을 서고 나서 얼마나 못된 짓을 했느냐면, 매니저 라커에 설탕과 프림을 가득 부어서 산처럼 쌓아놨어요. 그리고 그날로 그만뒀죠. 정말 못된 짓이었지만, 그렇게 하고 싶었어요.”


그게 뭐가 못된 짓일까.


◇커피숍, 버스, 지하철서 성추행범 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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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예능에서 밝힌 지하철 성추행범 퇴치 에피소드가 그냥 나온 건 아니군요.


“그때도 순간 갈등을 많이 했어요. 그때도 제가 망치처럼 생긴 모토로라 휴대폰을 끼고 있었는데 뒤에서 이상한 인기척을 느끼고 딴에는 혼자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했죠. 마침 얼굴이 제 옆으로 딱 오길래 왼쪽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폰을 오른손으로 집어서 스매싱을 한 거죠. 그게 처음이 아니었어요. 집으로 가는 심야 좌석버스에서 앉아있는 아가씨가 졸고 있는데 서서 가던 아저씨가 움직임이 이상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아가씨 가방을 노리는 건가 했는데 그게 아니라 허벅지를 만지더라고요. 제가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했죠. 그랬더니 되레 나한테 욕설을 하더니, ‘내가 뭘 만졌다는 거야’ 하는 거예요. 하하. 나는 아무말도 안했는데. 제가 기사한테 ‘이 사람이 아가씨 몸을 만진다. 내려달라’고 하니까 승객들도 함께 요구했죠. 그래서 기사가 그 놈을 끌어내렸어요. 아가씨가 정말 고맙다고 하는 거예요. 지하철 사건 때도, 그때도 승객들이 막 박수를 쳐줬죠.”


그는 쑥스러워했지만, 듣는 나는 자랑스러웠다.


-에이콤 배우학원 2기잖아요. 커피숍을 나와서 들어간 건가요?


“커피숍 나오고 나서 복장학원에 다녔어요. 일본식 표현인데 지금으로 치면 의류디자인 아카데미죠. 앙드레 김 선생님이 나온 명동 국제복장학원에 다녔어요. 엄마가 옷 파는 일을 오래 하셨거든요. 의류디자인을 배워서 의상실을 해보라는 거였죠. 그런데 명동에 얼마나 볼 거리가 많아요? 하루는 출석 등록만 하고 구경 다니다가 짐 챙겨 집에 가려고 학원에 올라가는데 어떤 남자가 벽에다 뭘 붙이더라고요. 아무리 봐도 연예인은 아닌데 콧날이며, 쌍거풀 없이 큰 눈에 보브 단발을 한 생김새가 정말 잘생겼더라고요. 뭘 붙였나 봤더니 에이콤 배우학교 2기 단원 모집 공고였어요. 그때는 단원 모집한다고 하고선 입단비만 받고 사라지는 사기 사건이 많았죠. 그날은 그냥 집에 갔는데 계속 생각이 나더라고요. 다음날 공고문을 보러 갔더니 다 떼어지고 전화번호랑 ‘춤, 노래, 연기에 재능이 있는 자’라는 자격조건만 남았더군요. ‘춤은 에에로빅 했으니까 됐고, 노래? 중창단 계속 했잖아. 연기? 아,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하는 생각으로 단원 모집 오디션에 갔어요. 대기실에 들어서는데 그 순간, ‘아, 망했다’ 싶었죠.”


-왜요?


“땀과 향수 냄새, 열기가 한데 섞여서 뿜어나오는데 그 기에 질린 거죠. (오디션 한 개 조인) 60, 70명이 한쪽에선 다리 찢어서 벽에 붙이고 있고, 또 한쪽에선 ‘우오오오오’ 노래 연습을 하고, 또 다른 데선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대사 연습하고 있고요. ‘나 여기 왜 왔나’ 싶더라고요. 게다가 다들 발레나 무용 연습복 같은 걸 입고 있고요. 운동하기 편한 옷에 운동화를 신고 오라고 하기에, 저는 선물 받고 몇 번 입지도 않은 에어로빅 복을 입고 갔거든요.”


-하하.


“대기실 문을 열자마자 시선이 저한테 딱 꽂히는 걸 느꼈어요. 창피했죠. 구석에 짱박혀서 ‘마이마이’(삼성의 옛 미니 카세트 플레이어)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고 있는데 오디션용 춤을 배울 때 옆에 서있던 언니가 노래를 부르고 있더라고요. 춤을 정말 잘 췄던 언니거든요. 그런데 듣자하니, 남도 사투리가 노래에도 콱 박혀있는 거예요. 윤복희의 ‘여러분’을 부르는데 못들어주겠더라고요. 하하. 제가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는데 잘한다 싶었는지 언니가 대뜸 이래요. ‘저기요, 노래를 잘할라믄 워츠케 해야 돼요?’ 제가 그랬죠. ‘잘하는 부분을 정말 힘있게 하세요. 나는 너의~~~!!! 이렇게. 대신 진심으로 하셔야 해요, 땀이 날 정도로요.’ 그랬더니 ‘노래 부르는 데도 땀이 난당가’ 해서 ‘그렇다’고 하고는, ‘언니는 춤 잘 추시잖아요. 저한테는 춤을 좀 알려주세요’ 했더니 ‘자신있는 동작을 이렇게 심사위원을 쌔리 막 째려보면서 해’ 하더라고요. ‘모르는 동작은요?’ 했더니 ‘그냥 넘어가도 돼’ 하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둘다 오디션에 붙었어요! 하하.”


-오디션에서 부른 곡이 뭔가요?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에서 크리스틴의 ‘씽크오브미(Think of Me)’예요. 완곡을 했는데 심사위원들이 그걸 다 들어주셔서 신기했죠. 이 곡이 저한테는 뮤지컬을 시작하게 해준 곡이에요.”


고2 때 성가대 오빠에게 선물받은 ‘오페라의 유령’ LP판을 플레이어 바늘이 세 번이나 부러질 정도로 듣고 또 듣고, 이걸 카세트 테이프에도 녹음해 듣고 따라 부른 결과였다. 그때는 뮤지컬 배우가 되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다. 게다가 ‘씽크오브미’의 마지막은 오페라 아리아의 콜로라투라 같은 고난도다.


◇윤석화 “너 같이 생긴 사람은 너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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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션에 붙고 나서 어땠나요.


“합격 소감을 말하기에 ‘떨어질 줄 알았는데 붙여주셔서 감사하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당시 심사위원 중 한 분이셨던 윤석화 선생님이 ‘(성대모사를 하며) 왜? 왜 떨어질 줄 알았는데?’ 하시더라고요. 제가 ‘이렇게 생겨서요’ 했더니, 이러셨어요. ‘너같이 생긴 사람은 너밖에 없어서 뽑았어.’ 극단에는 다 (1기였던) 임상아처럼 생긴 애들만 있었는데 말이죠.”


490명이 응시한 오디션 합격자는 채 30명이 안됐다. 그 2기 중 지금까지 배우 활동을 하는 이는 그가 유일하다. 단원 모집 공고를 붙이던 남자는 1기 출신 배우 서영주씨다.


-에어로빅과 노래, 다양한 경험이 몸에 차곡차곡 쌓여 결국 뮤지컬로 이끈 것 아닐까요.


“그게 다 축적돼 있더라고요. 트레이닝 받고 연기하는 동안 스탭(스태프) 같은 외모는 다 잊히고요.”


-스태프 같은 외모요?


“별명이 ‘스탭 같이 생겨서’였거든요. 다들 ‘저거저거, 스탭 같이 생겨서 몇 년이나 하겠어’라고 했죠. 하하.”


그는 1994년 에이콤의 뮤지컬 ‘스타가 될 거야’에서 앙상블로 데뷔했다. 오디션으로 배우를 뽑았는데, 떨어지면 배우의 길도 열리지 않는 거였다. 2기 연습생들이 트렁크에 합숙 공연 준비를 할 짐을 싸와서 한 명씩 오디션을 보고 나오던 장면을 그는 아직도 또렷이 기억했다. 합격하면 맨몸으로, 떨어지면 트렁크를 끌고 집에 가야 했던 상황이 요즘의 TV 오디션 프로그램 같다. 나머지 연습 단원들은 앙상블 연습곡 ‘스타가 되면 보기 힘들 걸. 언젠간 나도 뜰 거야!’를 부르면서 말이다.


-오디션 때 어땠나요?


“저한테 ‘너는 계속 방글이를 해’ 하시더라고요. 원래는 없는 캐릭터인데 제가 아이디어를 낸 거였거든요. 극의 배경이 전남 목포에 있는 한국나이트클럽인데, 당시 활동했던 그룹 서울시스터즈를 카피해서 ‘항구시스터즈’로 만든 거예요. ‘새벽 안개 헤치며 달려가는~’하는 노래 ‘첫차’를 부르고요. 제가 서울시스터즈의 방실이 동생이라면서 방글이를 맡았죠.”


이런 재기 넘치는 배우를 어떻게 떨어뜨리겠나. 그는 그렇게 예술의전당 무대에서 데뷔를 했다. 이듬해엔 ‘명성황후’에서 박 상궁 역할을 맡았다. 초연부터 계속 무대에 서서 그간 그가 호흡을 맞춘 명성황후만 11명이다.


-뮤지컬이 정말 천직이라고 깨달았던 순간이 있나요.


“한국에서 ‘오페라 유령’을 초연(2001)할 때 오디션에서 떨어졌어요. 그러다가 2009년 재연 오디션을 볼 때는 속으로 칼을 갈고 갔죠. 안무감독 마담 지리 역할이었어요. 그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어요. 목부터 발목까지 내려오는 딱 붙는 원피스를 구해 입고 머리도 까맣게 염색해 올리고요. 눈 화장까지 강렬하게 해서 갔죠. 오디션 볼 때 그렇게 가는 경우는 별로 없어요. 연출이 배우를 보며 상상할 여지가 없어지니까요. 그런데 저는 여지를 두지 않고 작정을 하고 간 거죠. 심사위원이 6명이었는데 ‘Great! Well done(굉장해! 잘했어)’하는데 속으로 ‘흥, 나 좀 잘했지’ 싶었죠. 하하. 첫 공연날, 시작 전에 일부러 아들을 데리고 백스테이지 투어를 시켜줬어요. ‘여기가 엄마 일하는 데야’ 하면서요. 세트와 소품을 일일이 장면하고 연결 시켜서 설명을 해줬죠. 아이가 그러는 거예요. ‘엄마, 되게 멋있다!’ 그래서 ‘멋있어?’ 했더니, ‘응, 멋있어!’ 하더군요. 그러고 나서 무대를 이렇게 보는데 ‘내가 괜찮은 직업을 가진 사람이구나’ 새삼 느꼈죠.”


◇‘왜 아이를…’ 신에게 따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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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대 파열이라는 위기도 겪었지요.


“2006년 감기가 채 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메노포즈’ 공연을 하다가 성대가 뚝, 나가는 경험을 했어요.”


그는 성대 근육 손가락 두개를 브이(V)자로 만들어 보이며 설명을 해줬다. 양 근육 중 한쪽의 중ㆍ저음을 내는 부분이 파열된 거였다. 수술을 해서 이어 붙인다 해도 좌우 길이가 다르니 탄력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나마 최대한 빨리 수술을 해야 부작용을 줄일 수 있었다. 병원에선 성대가 회복될 때까지 적어도 4개월 간 말을 하지 말라고 했다. 최악의 경우 목소리를 잃을 수도 있다는 경고와 함께. ‘메노포즈’ 공연이 끝나려면 3주나 남은 시점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도중에 하차했다. 수술을 하고 집 안에만 머물렀다. 그 시기 소화한 일정은 취소가 어려운 시상식 참석 하나였다. 윤호진 에이콤 대표와 함께 시상에 나서 몸짓과 “네” 정도의 소리로만 무대에 섰다가 퇴장했다.


-성대 수술 후 어땠나요.


“저는 인생이 끝났는데 나중에 보니 주위에서 ‘뭐야, 프로가’, ‘걔 때문에 공연에 얼마나 피해가 간 거야’, ‘인성이 글러먹었어’라는 악담도 많았더군요. 말을 못하니까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고요.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데도 한계가 있고. 사정을 아는 사람들한테 받는 위로도 위로로 들리지 않더라고요.”


-그때는 주위에 관심을 돌릴 여유도 없었겠죠.


“맞아요. 세상 아무것에도 관심 없었어요. 앞으로 목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못하겠구나, 뮤지컬과 함께 하던 애니메이션 더빙도 못하겠구나 이런 생각에 빠져 지냈어요. ‘장사를 해야 하나, 어디에 취직을 해야 하나, 내 나이가 이제 30대 중반인데 받아주는 곳이 있으려나, 뜨개질은 좀 하는데 뜨개질 가게를 열까’ 이런 생각을 끝없이 하다 결국 종착은 ‘나 이제 뮤지컬 못하는구나’였어요.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 밥 먹는 일 따위도 관심이 없고요. 소파에 누워 계속 넋 놓고 있는 거죠. 시야가 방송 수신이 꺼졌을 때 화면처럼 지지직거리다가 잠이 들곤 했죠. 어느날 이러다 죽겠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병원에 갔죠. 수술 후 한 달 반 만이었어요. 우울증 약을 먹으니 아무 생각 않고 TV만 볼 수 있게 되더군요. 하루종일 틀어놨는데 무얼 봤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


그를 구원한 건 다섯 살 아들이었다. 어느 날, 소파에 붙어 있는 그에게 다가와 아들이 행주로 눈곱을 떼어줬다. 그는 방송에서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치명적인 망치가 제 머리를 때린 듯한 느낌”이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4개월 만에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래서 “아들”이다.


“아들 덕분에 정신을 차리고 자장가를 한번 불러봤는데 허스키하게나마 목소리가 나오더라고요.”


그때부터 재활에 매달렸고 7개월 만에 무대에 섰다. 다시 ‘맘마미아’였다.


-그 시기가 어떤 의미였나요.


“상태가 생각보다 덜 심각했는데 스스로 너무 절망을 했는지도 모르죠. 성대가 잘 회복될 조건이었는데, 내 정서만 망가지고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런 일을 겪고 나니 웬만한 고통에는 무던해졌죠. 뭐 ‘목잽이’가 목소리도 잃었었는데 이런 것쯤이야, 하는 거죠.”


하지만 인생에서 더 큰 시련은 또 닥쳐왔다. 2017년 11월 열다섯 살 아들의 교통사고였다. 자전거를 타고 가던 아들이 자동차와 부딪힌 거였다. 갑자기 차가 서면서 생긴 사고였다.


“드라마 촬영이 끝나고 의상을 반납하러 가려고 매니저와 차 안에 있을 때였어요. 전화가 왔는데 119 구급대원이라는 거예요. ‘노태유 학생 보호자 되시죠. 학생이 많이 다쳐서 병원으로 왔는데 여기는 구강안면외과가 없어서…’라는데 제가 ‘구강… 안면… 외과요?’ 되물었죠. 그랬더니 ‘안면을 심하게 다쳐서요. 신촌세브란스병원으로 옮기겠습니다’ 하는 거예요. 바로 병원으로 갔어요. 상수동에 있었기 때문에 제가 구급차보다 먼저 도착했죠. 응급실로 옮겨지는 아들을 봤는데, 그건… 그건,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더라고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에요. 너무 선명해서 그리라고 해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차에 얼굴을 부딪혀서 턱, 치아 13개, 코, 인중, 양쪽 광대뼈까지 얼굴 뼈가 30조각이 났다는 거예요. 눈 아래부터 턱까지, 얼굴 생김이 다 사라진 거죠. 지금도 감사한 건 구강안면외과가 있는 종합병원으로 발 빠르게 이송해준 구급대원들, 그리고 응급실에서 허리 한번 안 펴고 4시간도 넘게 얼굴을 꿰매준 여자 성형외과 의사 선생님이에요. 무려 1,400바늘을 꿰맸대요. 아이가 호스 10여개를 몸에 꽂고 13일 동안 중환자실에 누워있었죠. 하루 두 번, 20분씩 면회 때 보는데 아이가 뭔가 말을 하고 싶어 하더라고요. ‘엄마한테 할 얘기 있어?’ 하면서 스케치북을 주니까 배에 올려놓고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사랑해’를 쓰더라고요.”


정말 사랑스러운 아들이다. 그 순간에도 미안해하고 아파할 엄마, 망가진 몸보다 더 소중하고 감사한 걸 생각할 줄 아는, 대단한 마음을 지녔다.


“아직도 아이 얼굴에는 지렁이 네다섯 마리가 지나가요. 어서 뼈를 맞추는 재건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성장판이 닫혀야 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들이 키가 183㎝에 발이 300㎜인데 아직 성장판이 안 닫혔대요. 내년이나 내후년에 수술을 해야죠.”


-아들은 사고 이후 어떤가요.


“본인이 ‘나도 주의하지 않아 생긴 사고인데 엄살 부리면 안 되잖아’ 해요. 아이가 비트박스를 하는데 없어진 치아 13개 중에 8개는 입 안에서 찾았고 나머지 5개는 없어져서 나중에 임플란트를 해야하거든요. 이가 없는데도 비트박스를 하더라고요. ‘그게 정말 하고 싶구나’ 싶어서 그냥 하게 해요. 연예인 뺨 치는 얼굴은 아니어도 남자답게 잘 생겼었거든요. 사춘기라 얼굴이 늘 마음에 걸릴 텐데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잘 다녀요. 그걸 보면 고맙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요. ‘누가 얼굴 때문에 놀리지 않아? 그런 놈 있으면 바로 말해. 엄마가 가서 아주 젖은 빨래 널 듯 확 널어줄 테니까’ 하면 ‘워워, 나한테 아무도 손도 못 대’ 해요. 누가 얼굴이 왜 그러냐고 얘기라도 할라치면 ‘자전거가 센 지, 자동차가 센 지, 제가 한번 겨뤄봤어요’ 하고 응대한대요.”


-지켜보는 엄마는 정말 힘들었겠지요.


“내가 뭘 잘못해서 아이가 대신 벌을 받나 싶어요. 주위에서 이걸로 전화위복이 될 거라고 위로도 하는데 그런 생각은 열 번이면 한 번 밖에 안 들고요. 마음 속으로 신에게 ‘차라리 나를 어떻게 하시지’ ‘도대체 나한테 왜 이래요’ ‘당신이 정말 존재하기는 해요’ 따지기도 했어요. 애가 아픈 건 정말 대책이 없는 일이에요.”


뭐라 반박도, 위로도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왕관 쓴 채 타이어를 짊어진 자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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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계속 쓴다고 들었어요.


“배우를 하다가 대학에 다시 들어갔어요. 1997년에 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과에 지원했다가 떨어지고 이듬해 서울예전 극작과에 합격했죠. 둘다 실기 주제가 ‘아버지’였어요. 한예종 시험 볼 때는 미화한 글을 냈죠. 그런데 서울예전 시험 볼 땐 첫 문장이 이거였어요. ‘나는 그를 전혀 존경하지 않는다.’ 제가 실기 수석이었다고 그러더군요.”


-배우하는 데도 도움이 많이 됐나요?


“그럼요. 극작과에 다니면서 무대를 함께 만들고, 극을 분석하고, 캐릭터 구축하는 걸 배웠어요. 지금도 잘 써먹고 있죠! 제가 무대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지 그때 극작과에서 다 배운 셈이에요.”


-배우는 대중의 심연에 어떻게든 가 닿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런 일을 해낼 에너지는 어디에서 얻나요.


“사람한테서요. 오래 곁에 두고 지내는 벗들요. 성대가 파열됐을 때 깨달았는데 혼자서는 전혀 에너지를 만들 수 없더라고요. 사람은 사람한테 에너지를 얻는구나, 에너지의 융통은 사람이 하는구나, 내가 에너지를 운용하는 능력도 사람한테 나오는구나, 사람이 답이구나 알았죠.”


-자신에게 연기란 뭔가요?


지금까지 거침없이 답하던 그가 한참 생각에 잠긴 뒤 입을 열었다.


“왕관과 타이어.”


-네?


“연기를 삶의 목적으로 하든, 즐거움의 이유로 하든, 결과적으로 성과가 나타날 때는 왕관과 타이어가 함께 와요. 영광과 고됨이 동반된다는 거죠. 운동 선수들이 훈련할 때 코어 근력을 키우려고 타이어를 질질 끌면서 뛰잖아요. 왕관 쓰고 타이어를 끌고 가는 느낌이죠. 저도 4개까지 묶고 끌어봤어요. 하하.”


-앞으로 배우로서 끝내 해보고 싶은 일이 있나요?


“배우는 평생 배우여야 해요. 그런데 ‘베르나르다 알바’를 준비할 때부터 저 심연에서 그래요.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좋은 작품을 써 봐.’ 요즘 스케줄이 없을 때 책을 엄청 읽었더니 또 쓰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무작정 썼는데 소설이 나왔어요. 30쪽을 훅 써 내려갔죠. 저는 손으로 쓰거든요. 오랜만에 열정이 솟아올라서 스스로 ‘잘했어’ 해요.”


-마음을 움직이는 극은 세상도 바꿀 수 있을까요.


“어릴 때 ‘제발 총대 좀 매지 마’ 하는 충고를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제 성질이 많이 안 변했더군요. 지적으로 양식이 좀 더 생긴 나이가 되니까 다른 방법으로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청각이 가진 힘을 이용해보자는 거죠.”


동질감이 들었다. ‘좋은 기사는 세상을 바꾼다.’ 기자가 된 이유였다. 지금은 그게 무척이나 어렵다는 걸 깨닫고 ‘그래도 기사가 사람의 마음은 바꿀 수 있다’고 고쳐먹었지만.


-뭘 그렇게 바꾸고 싶은가요?


“불의를 못 견뎌요. 합당하고 합리적이어야 납득이 돼요. 그럴 때까지 물고 늘어지는 스타일이죠. 하하. ‘이렇게 하면 왜 안 되는데요?’ 하는 거예요.”


-배우가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고 믿는군요.


“그렇죠. 속도는 느릴 테지만.”


-얼마 전 썼다는 소설도 세상을 바꾸는 얘기인가요?


“내 나이 여자가 세상과 맞닥뜨리면서 벌어지는 일들이죠. 작품에 어떻게 사회가 배제될까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순간이 세상인데. 픽션과 논픽션이 뒤섞여 있지만 작가적 망상을 한번 실컷 해보자 하면서 쓰고 있어요. 능력 있는 연출이 보고서 ‘글이 마음에 든다. 한번 발전시켜보자’ 하는 경험을 해보고 싶어요!”


◇배우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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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 진짜 만들어지면 연기도 직접 할 건가요.


“욕심 같아선 내가 쓴 거, 내가 연기해보자 싶기도 할테지만 배우란 직업을 가진 자들이 자주 범하는 오류죠. 하하. 다른 배우는 어떻게 해석해 어떤 인물을 만들어 내는지 보고 싶어요.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감성이 있나요.”


-여성이 이끌어가는 서사라면 좋겠어요.


“그게 결정적인 주제예요! 어차피 세상이, 사회가 불균형 할 수밖에 없다면 그 차별을 최소화 하는 것도 예술하는 사람들의 의무라고 생각해요.”


-배우 정영주가 지금까지 살면서 지키려고 해온 삶의 도가 있다면요.


“좀 둘러보며 살자. 동서남북에다 내 에너지를 다 쓸 순 없겠지만 최소한 ‘저 녀석이 오늘 왜 저런 애띄뜌드(그가 드라마에서 해 유행어가 된 애드리브)를 보이는지’ 살피는 거예요. 남들이 보면 오지랖이라고 할 지 모르지만, 뭐든 이유 없이 원래 그런 건 없거든요. 물어보고 얘기하면 오해를 하지 않을 수 있죠. 저는 누가 ‘이건 비밀이야’하고 말하면 정말 꾹 마음에 묻어놔요. 대신 그런 말을 할 때 나를 100% 신뢰하는 게 아니라면 말하지 말라고 하죠.”


-사람의 마음을 늘 살피는군요.


“관찰하는 걸 좋아해요. 공연을 하면 연습기간까지 길게는 1년을 여러 사람과 함께 하거든요. 그러니 직업에서 온 습성인 것 같기도 하고요.”


그는 남편과 이혼할 때도 법원을 나서며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나랑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게 뭐야?” 남편의 답은 “외로웠어”였다. “밥 먹고 갈까”, “아니, 연습 있어” 하는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다. 남편과는 지금도 친구처럼, 시부모와도 가족으로 지낸다고 한다. 이것도 극의 한 장면 같은 건 그의 재연술 때문인가.


-행복한가요?


“좋아요. 저는 제 긍정적인 에너지를 포자 날리듯 ‘옜다, 받아라’ 하면서 살고 싶어요. ‘이리 와봐, 뭐가 힘들어?’ 물어도 보고 얘기도 나누고. ‘선배님, 기분이 다시 좋아졌어요’하면 ‘응, 이제 가라’ 하면서요. 그러면서 저도 에너지를 받거든요. 길 가는 세 사람 중에 반드시 스승으로 삼을 사람이 있다는 공자님 말씀이 정말 맞아요.”


지금 내 앞에도 스승이 있었다. 이 멋진 언니를 닮고 싶어졌으니까. 언니가 쓴, 언니들의 서사를, 머지 않은 미래에 관객으로서 누리게 되기를.

한국일보

김지은 논설위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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