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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망해 시인 된 ‘문단의 아이돌’ “유머가 제일 중요해” 외치는 이유

[김지은의 ‘삶도’ 시즌2 : 실패연대기] <13>시인 오은

수술·재활 거듭한 1년… ‘쓰는 소중함’ 깨달아

“시는 작고 약한 걸 보는 마음 살려준 구원”

한국일보

시인 오은씨를 18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에서 만났다. 그가 든 시집은 5월에 낸 ‘없음의 대명사’다. 50일 만에 4쇄를 찍었다. 최주연 기자

‘월간 현대시’ 창간 이래 최초로 스무 살에 등단한, 그래서 ‘문단의 아이돌’로 불린 시인. 지능지수(IQ)가 상위 1% 안에 들어 멘사코리아 가입을 권유받은 수재. 지금까지 낸 모든 시집이 중쇄를 찍은 작가.


웃기지 않은 이력으로, ‘웃긴다’는 말을 가장 좋아하는 시인 오은(41)이다.


그런 그의 첫 ‘문장’은 실패였다.


백일장에 나간 전북 정읍 서초등학교 4학년생 오은. 대회가 끝나고 인솔 교사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은아, 대체 어떻게 썼길래 그러니.” 대회에 나간 같은 학교 학생 30여 명 중 그만 유일하게 입선조차 못한 것이다. 보다 못한 교사가 대회 본부로 가 그가 쓴 글을 받아왔다. 글은 이렇게 시작했다. ‘돌을 던지면 하늘이 쨍그랑 하고 깨질 것만 같았다.’


교사가 한숨을 쉬며 다시 말했다. “은아, 하늘을 봐! 저 하늘에 이 표현이 말이 되니.”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다. 말대꾸라고는 몰랐던 모범생 오은의 입에서 부지불식간에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선생님, 더러운 유리창이라고 해서 깨지지 않는 것은 아니잖아요.”


30년이 지났는데도 또렷하게 기억하는 장면과 문장. 그는 ‘실패’ 하면 떠오르는 첫 기억으로 일컬었지만, 반대 아닐까. 작가 오은의 여정은 그때부터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오은 식 ‘다르게 보기’의 시작 말이다. ‘다르게 보기’는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혈관이다. 일상의 흔한 사물과 경험은 그의 시속에서 새로워진다.


“밥을 먹고 쓰는 것/밥을 먹기 위해 쓰는 것/한 줄씩 쓸 때마다 한숨 나는 것” (‘이력서’ 중)


“질문만 있고 답이 없는 곳에 다녀왔다/서 있어도 앉아 있는 사람들보다 작았다/가장 많이 떠들었는데도 듣는 사람들보다 귀가 아팠다” (‘면접’ 중)


“한낮의 실패가/누군가에게는 한낱 실패일지도 모른다/언젠가부터 통화 연결음은 컬러링이라고 불렸다/발신인의 조바심은 무채색인데도” (‘그’ 중)


그가 궁금했던 이유도 한 문장에 있다. “이따금 쓰지만, 항상 쓴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과거 명함에 새겼던 글이다. 만나고 보니 그건 치열함의 소산이었다. 매일 실패할 각오가 서린 비장함이었다.


그의 시는 순진무구한 미소를 띤 어린이의 슬픈 노래 같은데, 그의 인터뷰도 그랬다. 성대모사의 달인인 그가 쏟아내는 일화에 웃으면서도 마음엔 말줄임표가 남았다.

[실패①] 시 언어와 C언어 사이의 벽

한국일보

백일장에 나간 같은 학교 학생 중 유일한 낙방, 그 글의 시작을 그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의 첫 문학적 문장 아닐까. 최주연 기자

서두의 백일장에서 이어받자면, 그랬던 그가 ‘글’로 맛본 첫 쓴맛은 무엇일까. 고교 2학년생이 된 오은. 이번엔 한 학습지 브랜드가 만든 문학상에 응모한다. 작심하고 상을 받을 만한 시를 썼다. 그는 영리했다. 이전 수상작들을 보니 감동이 있는 서사가 있어야 했다. 결과는 1등. 서울로 올라가 프레스센터에서 시상식도 참석하고 상패에 상금도 받았다.


-어땠나요.


“너무 화가 났어요. 상금도 50만 원이나 됐거든요. 그런데 그 시는 내 언어가 아니잖아요. (진짜) 나라면 이렇게 안 쓸 테니까.”


-그 사건으로 뭘 알았나요.


“어떻게 써야 사람들이 좋아하는 글인지를 알게 됐죠. 다른 수상작들을 보니 슬픈 서사로 감동을 주는 요소가 있어야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적중하니까 (글 쓰는 일이) 너무 시시해지더라고요. 그래서 그땐 시가 싫었어요. 이렇게 써야 1등을 하고 사람들이 좋아한다면, 시가 내 길은 아니구나.”


-‘이력서’라는 시를 쓴 오은의 이력에도 실패가 있나요.


“대학원 갔을 때요! 대학(서울대 사회학과)을 졸업하고 나서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에 들어갔어요. ‘한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육성하겠다’는 홈페이지 설명에 매료돼서. 그런데 대학원을 졸업하려면 필수로 프로그래밍 수업을 들어야 하더라고요. 학부생도 듣는 200명 규모 대형 강의. 매주 내야 하는 과제도 너무 어려웠죠. 그런데 시험은 오죽하겠어요. 중간고사를 보는데, 시작한 지 몇 분이나 됐을까. 막 강의실을 나가는 애들이 있더라고요. 속으로 ‘쟤들도 준비를 안 했나 보다’ 했죠. 웬걸, 나중에 보니 그 애들이 다 상위권. 나는 시험 시간 꽉 채웠는데도 결과가 어땠는지 아세요?”


-어땠는데요?


“1등부터 200등까지 벽보를 붙여서 다 공개했거든요. 근데 그간(학창 시절)에는 제 이름이 항상 맨 앞에 있지 않았겠어요. 그러니까 그때도 습관처럼 왼쪽부터 보고 있지 뭐예요. 하하.”


-그런데 어디쯤에서 이름을 발견했나요.


“끄트머리 어디쯤 있더라고요. 제 주변에 문과 출신 동기생들 이름이 옹기종기 모여있고. 그래도 내 이름 뒤에 한 25명쯤 있는 거예요!”


-오, 꼴찌는 아니었네요.


“기쁠 뻔했죠. 알고 보니 그날 결시가 17명. 와, 내가 태어나서 그렇게 날을 새워서 시험공부를 한 적이 없었는데.”


터지는 웃음을 추스르고 질문했다.


-그 경험으로 깨달은 건 뭔가요.


“내가 언어는 잘하는데, C언어(프로그래밍 언어)는 아닌가 보다. 시 언어와 C언어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구나.”


-대학원에 괜히 갔나 싶었나요.


“아뇨. 내 우물을 깨준 계기가 됐죠. 나는 굉장히 열려있고 관용적인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간 내 좁은 우물에 살면서 그 우물가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반기는 수준이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대학원 2년이 제게는 실패이자 성공의 시간이에요.”

[실패②] 수능 실패, 등단의 계기

한국일보

‘등단이 뭔지도 모르고 등단한 시인’, 그 사람이 오은이었다. 최주연 기자

-대입 첫 도전에 실패하기도 했죠. 그런데 그 덕에 등단을 했어요.


“맞아요. 2001학년도 수능 때 만점자가 60명 넘게(66명) 나왔어요. 저는 언어 영역을 채점하고 나서 다른 영역은 아예 보지도 않았죠. 그때 바로 재수하기로 마음먹었어요. 그런데 그건 실패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부모님도 마찬가지였죠. 아버지는 ‘돌이켜 보면 인생에서 1년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해 주셨어요. 어머니는 원래 ‘네 인생은 네가 알아서 하는 거지’라는 생각이셨고요.”


-시는 언제 쓴 거예요.


“재수를 전주에서 했거든요. 학원도 안 다니고 독서실만 끊어서 공부했죠. 그런데 독서실이 진짜 조용하더라고요. 앉아있으면 볼펜이나 샤프가 (종이에) 굴러가는 소리밖에 안 들리니 무섭고 괴기스럽더라고요. 지금처럼 카페에서 공부하는 문화가 있었으면 한결 수월하게 재수했을 텐데. 그때는 갇혀있는 느낌이 드니까 노트에다 글을 썼어요. ‘보이지 않는 손이 날 여기에 가둬놓은 다음 내게 이런 시련을 안겨준 거야.’ 그런 감정을 줄글로 쓴 거죠. 그런데 형이 그걸 읽어보곤 좋았나 봐요. 저 모르게 그 글들을 다 타이핑해서 문학잡지에도 내고, 문학상에도 공모한 거예요.”


-‘월간 현대시’로 등단한 배경이군요.


“맞아요. 그때 ‘현대시’가 신인상 겸 제1회 한국인터넷문학상을 언론사, 전자책 업체와 공동으로 주최했거든요. 형이 제가 쓴 시 50편 이상을 낸 거예요. 나중에 찾아보니, 제목이 ‘은둔하는 말에 관하여’ ‘디오니폴론’(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을 합쳐 만든 말) 이랬죠. 제가 느끼기엔 치기 어린 글이에요. 어려운 단어도 많이 쓰고, 현학적이고 추상적인 언어의 꿈틀거림이 가득한 작품들이었어요. 형은 그런데 그때 시들이 파닥거려서 더 좋대요.”


-등단이 뭔지도 모르고 등단 소식을 들었다고요.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날이 대학 합격 소식을 들은 날인데, 그다음 날 등단 소식도 들었어요. 전날 술을 좀 마시고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전화를 받았죠. ‘현대시’ 발행인인 원구식 선생님이 전화하셨어요. 제 시들을 읊으면서 ‘쓴 시가 맞느냐’고 하시는 거예요. 제가 깜짝 놀라서 ‘그걸 어떻게 아세요?’ 했죠. 그랬더니 ‘축하한다. 등단했다’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이번엔 ‘등단이 뭐예요?’ 되물었어요. 원 선생님이 엄청 큰 소리로 웃으셨어요. 데뷔했다는 뜻이라고 설명해 주셨죠. 나중에 저를 ‘이 사람은 등단이 뭔지도 모르고 등단한 시인’이라고 소개하곤 하셨어요.”


-대학 때는 시위에도 많이 참여했다고 들었어요.


“2학년 때는 아예 ‘집회 일정표’가 있었어요. KTX 여승무원 복직 투쟁, 한미FTA 반대 시위 같은 현장에 다녔죠. 그런데 어느 날 집회에서 맨 앞줄에 섰던 선배가 경찰 방패에 귀를 맞아서 피가 철철 나는 광경을 본 거예요. 그런 모습은 왜 꼭 슬로 모션으로 보일까요. 그때 깨달았죠.”


-뭘요?


“우리가 매일 나와서 아무리 목소리를 내도 바뀌는 게 없는데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싶었죠. 모든 집회가 ‘실패의 연대기’ 같았어요. 집회에 한 명이라도 더 나와서 작은 목소리를 더 크게 만드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아무리 외쳐도 현실은 변하지 않는데 내가 내 삶을 내팽개쳐둔 채 언제까지 이걸 해야 하나 싶은 자문이 들었죠. 무력감에 시달렸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3학년 1학기에 휴학을 하고 캐나다에 사는 친구한테 갔어요. 6개월을 머물면서 주로 영화를 보면서 살았어요. 보다 보니 귀가 열리더라고요. 영화 감상기를 블로그에 올렸죠. 그때는 대작 영화들이 북미에서 먼저 개봉했거든요. 그러니까 나름 영화계의 얼리 어댑터였던 셈이죠.”


-그 시기가 어떤 의미였나요.


“내가 돌아갈 곳을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길을 잘못 들었어도 결국 어딘가 도착할 곳,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이런 생각을 했죠.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내가 돌아갈 곳이 어디일까 고민도 하고요. 그때 시를 처음 썼어요.”


-등단한 이후로 처음 쓴 건가요.


“시인 김언 작가에게 (시 전문 잡지) ‘시와 사상’에 실을 시를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거든요. 제 블로그에 ‘시 쓰는 김언이라고 합니다’라면서 글을 남기셨죠. 등단한 건 2002년이지만 시인이 된 건 그때인 2004년이라고 생각해요.”


-왜 그런가요.


“한 자리에서 세 시간 반을 앉아서 썼어요. 제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 시간에 푹 빠져있던 거예요. 나중에 등 뒤로 신열 같은 게 올라오더라고요. 시큼하고 뜨끈한 기운. 기분이 나쁘지 않았어요. ‘시를 쓰는 일은 이런 건가 보다’ 처음 알았죠. 그때 쓴 시가 ‘어떤 날들이 있는 시절’이라는 산문시예요. 나중에 (시집에 실을 때도) 한 자도 안 고쳤죠. 지금도 제일 좋은 시는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쓴 시죠. 그 시를 정말 좋아하고 많이 사랑해요. 시인으로서 시작을 알려준 시이기도 하니까.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문예지 게재 작품 중 우수작을 뽑아서 지원금을 주는 제도가 있는데 거기에도 선정됐죠. 어떤 호명보다도 반갑더라고요. ‘너 계속 시 써도 돼. 그래도 괜찮을 거 같아’라는 응원을 보내준 느낌이었거든요.”


-돌아갈 곳이 시라고 생각했겠네요.


“그건 아니었어요. 시를 쓰면서 왠지 이 일을 오랫동안 하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돌아갈 곳이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았죠. 데뷔 때부터 어머니가 등단한 건 좋아하시면서도 ‘은아, 시는 취미로 써’라고 하셨거든요. 시인으로 살기 힘든 현실을 아시니까.”

[실패③] 영화도 내 길은 아니구나

한국일보

그는 잘 웃는다. 남을 웃기는 것도 좋아한다. 그는 “나중에 내 장례식장에도 웃음이 많길 바란다. 사람들이 생전 오은이 웃겼던 상황이나 말을 나누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가 얘기를 하다 까르르 웃고 있다. 최주연 기자

-그럼 캐나다에서 돌아와서는 뭘 했나요.


“동기, 선ㆍ후배 대부분은 고시를 준비했지만 전 그 길도 아니었죠. 그러다가 영화를 찍었어요.”


-영화요?


“막연하게 언젠가 영화를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영화 제작 지원 프로그램에 응모해 선정된 거예요. 시나리오, 시놉시스, 콘티를 내서 채택되면 제작비용 500만 원을 지원해 주는 공모전이었죠. 당선자들을 보니 다 영화과 출신이더라고요.”


-순탄했나요.


“맨땅에 헤딩을 해야 했죠. 저는 스태프 구하기도 쉽지가 않았어요. 우여곡절 끝에 배우도 찾고 스태프도 구하긴 했어요. 일주일간 촬영을 했는데, 결과적으로 지원금 500만 원에 사비 300만 원까지 들여서 일주일간 영화를 찍었죠.”


-완성은 했고요?


“완성은 했어요. 제목이 ‘존재하려는 경향’이었죠. 러닝타임이 24분 정도 돼요. 주인공이 1인 2역을 해야 하는 도플갱어가 소재였죠. 완성하고 상영회를 어디서 한 줄 아세요? 코엑스 메가박스! 그런데 하필 순번이 7명 중 가운데인 4번째인 거예요. 게다가 첫 번째 작품부터 왜 이렇게 좋아. ‘이 좋은 작품들 사이에 낀 형편없는 작품 하나가 바로 내 것이로구나.’ 태어나서 그렇게 얼굴 들기가 무섭고 도중에 도망가고 싶은 적이 없었죠.”


-심사평이 어땠나요.


“그때 심사위원 중에 영화감독 김조광수 선생님이 계셨어요. 선생님이 제 영화 중 서툰 대목들을 두고 ‘실험적인 부분이 돋보였습니다. 오은 감독님, 애쓰셨어요’라고 하시는데 눈물이 핑 도는 거예요. 애쓴 걸 알아줘서 고맙기도 하면서, 할 수 있는 칭찬이 없으니 애썼다고 하신 마음도 알겠고요. 그래서 눈물이 터져버렸어요. 그때 뼈저리게 느꼈죠. ‘영화는 보는 것이다’.”

[실패④] 병원에서 지낸 1년이 알려준 것

한국일보

그는 지금까지 낸 모든 시집이 중쇄를 찍은 흔치 않은 작가다. 올해 5월에 낸 ‘없음의 대명사’도 현재까지 4쇄를 찍으며 순항 중이다. 최주연 기자

그는 죽다 살아난 사람이다. 첫 시집을 2009년 3월 5일에 냈는데, 그 달 26일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늦은 밤 길 건너는 그를 보지 못한 차에 치인 것이다. 당시 차량은 시속 110㎞로 달리고 있었다. 불운이 한 번 더 왔다. 쓰러진 그를 다른 차량이 또 치고 달아났다. 머리와 팔다리 부상이 심했다. 응급실에 실려갔는데 심폐소생술(CPR)을 해도 호흡이 돌아오지 않자 포기하려는 의료진을 그의 형이 붙잡고 사정했다. 결국 신경외과와 정형외과 전문의가 있는 병원으로 전원하고 나서야 맥박도, 혈압도 돌아왔다.


-상태가 어땠나요.


“사고 직후부터 3개월 정도는 기억이 없어요. 다른 부위 부상도 심했지만 머리에 물이 고여있었거든요. 3개월 뒤에 뇌에서 물을 빼는 수술을 받고서야 오은으로 돌아왔죠. 그래도 피를 머리 바깥으로 쏟아서 다행이었대요. 내출혈이었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죠.”


-기억이 없는 3개월은 어땠나요.


“어머니나 다른 가족, 친구들에게 들어서 알아요. 헛소리를 많이 했대요. 예를 들면 ‘엄마, 우리 미국에 가야 해’ ‘미국에 뭐가 있는데’ ‘여기엔 나를 고칠 사람이 없어. 미국에 있어’ ‘미국에 누가 있기에?’ ‘닥터 하우스!’ 이런 식이었던 거죠. 제가 ‘미드 덕후’였거든요.”


-재활도 힘들었다고요.


“오른팔, 오른쪽 다리를 다쳤는데, 지금도 오른팔은 다 펴지지 않아요. 팔꿈치 관절이 몇 십 조각으로 분쇄 골절된 거죠. 인공관절 수술을 할 수도 있지만 젊은 나이였으니 주치의 선생님이 그 조각들을 다 붙여주셨어요. 모든 신체 부위는 원래 자기가 가진 게 제일 좋대요. 깁스를 풀고 나서 재활훈련을 하는데 마치 팔을 거꾸로 꺾는 고통이었죠. 문제는 밤사이 잠을 자고 일어나도 관절이 굳는다는 거였어요. 재활훈련을 8개월쯤 받고 나니 몸무게가 40㎏대까지 빠져있더라고요.”


재활치료가 어느 정도 진전돼 그는 부모님 댁이 있는 전북 전주로 병원을 옮겼다. 몸 상태가 그러했으니 본가에서 요양을 하며 물리치료를 계속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해서다. 그런데 거기서 사달이 났다. 옮긴 병원에서 이전 주치의가 써준 소견서와 달리 별안간 다시 깁스를 해버린 것이다. 의사 판단이 그렇다니 믿고 따랐다가 일이 커졌다. 팔꿈치가 완전히 굳어버린 것이다. 결국 그는 재수술을 받고 또다시 고통스러운 재활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렇게 1년을 병원에서 보냈다. 팔은 첫 수술 때보다 온전치 못했다. 팔이 완전히 펴지지 않고, 그 영향으로 팔목도 돌아가지 않는다.


-사고도 억울한데, 재활치료 중에 그런 일까지 당했네요.


“일단 어머니는 살았다는 것에 감사하셨어요. 머리 안 다친 것도 감사하고요. 만약 몸 쓰는 일을 했다면 팔이 이렇게 된 게 치명적이었을 텐데 그런 것도 아니었고요.”


-사고로 누워있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것 같아요.


“그때 내가 엄청 밝은 사람이라는 걸 알았어요. 긍정은 삶을 무조건 낙관하는 게 아니라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거잖아요. 저는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던 거죠. 아니었다면 어떻게 그 1년을 버텼겠어요. 모든 실패가 자기 자신한테 한 발짝 다가가는 과정이라고 볼 때, 그 사고로 내 성정이나 면모를 좀 더 알 수 있었죠.”


-그 1년이 어땠나요.


“전신마취 수술을 네 번 정도 받았어요. 재활도 너무 힘들었죠. 그런데 그 1년이 마치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 보라고 주어진 시간 같기도 하더라고요. 뭘 가장 하고 싶은지 생각해 보니 읽기와 쓰기더라고요. ‘아, 쓰는 일이 나한테 중요하구나’ 그때 깨달았어요.”


그렇다면 사고 직전 낸 첫 시집은? 6개월쯤 지나 출판사 담당 편집자에게 연락이 왔다. 중쇄한다고. “병원에서 그 소식을 들으니 더 기쁘더라고요.”


그 와중에, 어머니는 그에게 어머니다운 부탁을 했다. 뇌 수술을 받기 전 아들이 하도 헛소리를 많이 했으니 노파심이 인 것이다. 퇴원한 아들에게 어머니는 말했다. “은아, 엄마가 돈 줄 테니까 아이큐 검사 한번 받아보면 안 되겠니.”


-그래서 검사를 했나요.


“했죠. 하고 나서 어떻게 된 줄 아세요? 멘사코리아에서 연락 왔잖아요. (지능지수가) 상위 1%라고 가입하라고. 가입은 하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안심하셨겠어요.


“학교 다닐 때 했던 검사하고 종류가 다르니까 같은 선상에 놓고 볼 수 없는데도 엄마는 좋아하시더라고요. ‘얘가 큰 사고를 당하고도 아이큐가 1밖에 안 떨어져서 이렇게 감사할 수가 없다’고. (웃음) 그러시면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셨죠.”

[실패⑤] 아빠, 잘 지내나요

한국일보

그는 2019년 작고한 부친을 생각하면 아직도 울컥한다. 시집 ‘나는 이름이 있었다’는 투병 중이던 아버지와 산책을 하며 보내던 기간에 쓴 것이다. 그는 “그때 눈에 들어왔던 게 ‘사람’이었던 듯싶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속은 끓고 타고 닳고 있을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 시집으로 대산문학상을 받았고 수상 소식을 아버지에게 가장 먼저 전했다, 납골당에 가서. 최주연 기자

그는 2016년 세 번째 시집 ‘유에서 유’를 낼 때까진 ‘투 잡’이었다. 빅데이터 회사인 다음소프트 회사원이자 시인. 다음소프트는 3년 10개월 다닌 뒤 퇴사했다. 두 번째 시집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에 실린 ‘이력서’ ‘면접’은 취업준비생일 때 경험이 녹아든 시들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전업 시인으로 산 것도 아니다. 문화기획사 ‘응컴퍼니’를 만들기도 했고, 복합문화공간을 지향하는 레스토랑에 투자해 공동대표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사업은 본디 들쭉날쭉한 것. 하필 어려워진 시기에 가장 큰 아픔도 찾아왔다.


-아버지의 병환은 언제 알게 됐나요.


“2018년 아버지가 요로 결석으로 병원에 가셨는데, 당시 담당 의사가 큰 병원에 가서 검사받기를 권했어요. 알고 보니 신장암이었죠. 발견했을 때는 이미 림프절과 폐까지 전이가 됐고요. 교장으로 퇴임한 뒤에 좋아하시던 바둑, 등산, 낚시, 당구 같은 취미를 즐기며 사셨는데. 서울의 큰 병원에서 치료받는 동안 저랑 형과 함께 지냈어요. ‘너희들이 다 크고 나선 명절 때 아니면 얼굴 보기가 어려운데 이렇게 다 모여 살 수 있으니 이것도 아빠는 나쁘지 않네’라고 하셨죠. 밝은 분이셨어요.”


-치료가 잘 안 됐나요.


“두 번째 항암치료 뒤에 뇌경색이 와서 처치를 해야 했죠. 그사이에도 암세포는 자라더라고요. 항암치료로 큰 효과를 보지 못했어요. 당시 면역항암제가 나왔을 때라 그걸로 치료해 보기로 했죠. 보험 적용이 안 될뿐더러 가격도 한 번 맞는 데 600만 원 가까이 들 정도로 고가였어요. 방법은 그것뿐이었으니 고민의 여지는 없었어요. 그런데 면역항암제를 네 번째 맞으러 간 날 병원에서 ‘더 이상 치료가 무의미할 것 같다’는 말을 들었죠.”


-아…


“다리에 힘이 풀려 스르르 쓰러졌어요. 화장실로 가서 펑펑 울었죠. 여러 생각이 들었어요. 마치 아빠의 몸이 내가 돈이 없다는 걸 안 것 같기도 했죠. 네 번째 치료부터는 일단 신용카드를 쓰고 돈을 만들거나, 어디선가 돈을 빌려야 하는 상황이었거든요.”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라 그런 마음까지 들었군요.


“아버지가 치료받으시면서 어머니한테 그런 말을 하셨대요. ‘은이가 진이 빠져있다고. 지금 뭔가 괴로운 일을 겪고 있는 것 같다’고요. 아빠의 건강 악화와 경영. 이 두 가지는 그간 제게 닥쳐본 적 없는 어려움이어서 해결 방법을 몰랐죠. 거기다 병원에서 더 이상의 치료가 무의미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아버지를 살리는 데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투자금을 포기하고 몸담았던 사업체를 그만뒀다. 부친은 본가가 있는 전주의 호스피스 병원으로 옮겼고 그도 전주에서 지냈다. 아버지가 드신 마지막 음식은 그가 사다 드린 칼국수였다. 밀가루 음식은 좋아하지 않던 아버지가 어느 날 칼국수를 먹고 싶다고 하신 거다. 발병 1년 만인 2019년 1월 그의 아버지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아직도 오은의 카카오톡 프로필 상태 메시지는 ‘아빠, 거기서 잘 지내죠?’다.

[실패란] 살아 있고 걷고 있다는 증거

한국일보

그의 시집 표지가 대부분 주황색인 이유가 있었다. 그는 ‘주황 마니아’다. 이제는 지인들이 주황 물건만 보면 사다 줄 정도. 주황 우산, 주황 시곗줄, 주황 지갑… 그는 자기가 지닌 주황의 물건들을 줄줄이 읊었다. 최주연 기자

-시인에게 실패란 뭔가요.


“내가 아직 도중에 있음을 일러주는 이정표 같아요. 성공은 끝처럼 여겨지잖아요. ‘성공해서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같은. 반면 실패는 내가 아직 도중에 있다는 뜻이죠. 그건 갈 데가 있다는 것이고, 가고 있다는 건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며, 움직인다는 건 살아 있다는 생생한 증거잖아요. 실패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좀더 분명하게 알 수 있게 하는 경험이죠.”


-시 ‘구원’에서 “이 시가 너를 살렸어/이 문장이 이 시를 살렸어/이 단어가 이 문장을 살렸어”라고 했죠. 시가 구원인가요.


“시가 나의 소중한 마음을 살렸죠. 내 안엔 여러 마음과 감정이 있는데 시를 쓰면서 작은 것, 보잘것없는 것, 남들이 보고 지나치거나 외면하는 것들을 응시하게 되거든요. 소수자, 약자에게 마음을 쓰는 태도를 심어준 것도,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어려운 사람들의 목소리를 길어 올려서 전달하게 해 준 것도 시지요. 삶의 태도를 만들어줬어요.”


-어머니는 시인으로서 밥벌이를 걱정해 ‘취미로 쓰라’고 하셨지만, 지금은 어떤가요. 중쇄를 찍는 드문 시인이잖아요.


“시인이 경제적으로 성공하기란 정말 힘들어요. 예전 명함에 ‘이따금 쓰지만, 항상 쓴다’고 새긴 이유도 시인은 직업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서예요.”


-직업이 아니면요.


“시인은 직업이 아니라 상태 같아요. 저는 산책을 나가도 뭔가 (쓸 거리를) 발견하고 돌아오자는 미션을 스스로에게 주거든요. 편치 않은 일이죠. 그러니 돌아오면 축 늘어져요. 이따금 쓰지만, 항상 쓴다고 생각하기에 가능한 몸의 상태죠. 우리는 항상 살지만, 삶의 역경이나 실패에 부딪쳤을 때 살아있음을 생생하게 느끼잖아요.”


-산책 나갈 때 발견하는 건 뭔가요.


“예를 들어 이런 거예요. ‘헌 옷 수거함’이 무슨 색인지 아세요? 진한 녹색. 그럼 어떤 물건을 넣어야 하고 넣으면 안 되는지는 아나요? 저는 그런 것도 다 읽거든요. 그 물품 목록에 캐리어가 뭐라고 적혀있는지 아세요? 우리말을 쓰려고 그런 것 같긴 한데 ‘바퀴 달린 가방’이라고 쓰여 있죠. 제가 지금 사는 동네는 헌 옷 수거함 이름이 ‘옷체통’이에요. 정말 예쁘지 않아요? 그 옷체통을 보며 저는 생각하죠. 우체통은 발신인과 수신인이 분명한데, 옷체통은 수신인도 발신인의 존재를 모르고, 발신인도 수신인의 존재를 모른다는 의외성이 있구나. 이런 걸 발견할 때 미소를 짓게 되죠.”


-실패가 ‘도중에 있음을 알려주는 이정표’라면, 그건 시를 쓰는 이유가 되기도 하겠네요.


“실패는 마치 내일(tomorrow) 같기도 해요. 시간을 어떻게 쓰든, 찬란하든, 깜깜하든 오기 마련인 게 내일이잖아요. 시를 쓰면서 점점 더 많이 실패하는 것처럼 느껴져요. 시집을 엮을 때, 써둔 시 중에 빼는 작품이 더 많아지거든요. 시는 쓸 때마다 처음 쓰는 거니까 늘 실패할 수밖에 없어요. 지금까지 써온 게 아닌 새로운 걸 써야 하니까. 실패를 기약할 수밖에 없는 작업을 하는 게 아닌가 싶죠. 그래서 새 시집을 내면 일주일은 들떠있지만, 그다음부턴 다음 시집 걱정에 불안이 찾아 들어요.”


-그런 실패들에서 길어 올린 시인 오은의 삶의 도는 뭔가요. 2009년 첫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을 낸 뒤 인터뷰에서 삶의 신조가 ‘유머를 잃지 말자’라고 했던데요.


“네, 유머가 제일 중요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동사가 ‘웃다’거든요. 나중에 내 장례식장에서도 웃음이 많으면 좋겠어요. 시를 쓸 때도 찰리 채플린을 생각하죠. 롤모델이에요. 그의 무성 영화를 보면 엄청 희극적인데, 다 보고 나면 눈물이 나잖아요. 웃음을 짓기 위해서 쏟았을 각고의 노력이 보이거든요. 그 웃음의 고갱이에는 울음이 박혀있을 수밖에 없겠단 생각이 들어요.”


그는 올해 5월 낸 시집 ‘없음의 대명사’에서 “‘잃었다’의 자리에는 ‘있었다’가 있었다(시인의 말)”고 말했다. ‘있었다’의 자리에도 ‘잃었다’가 올 테다. 실패도 그런 것 아닐까. 원래 잃어서 실(失)패지만, 그럼으로써 얻은 열매 실(實)이 그 자리를 채울 테니 말이다.


김지은 선임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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