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손석희 “구치소 독방서 담장 너머 비행기 소리 들으며 결심한 건...”
[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70>저널리스트 손석희
손석희의 ‘장면들’에 없는 손석희의 장면들
‘땡전뉴스’ 과감히 쳐냈던 ‘초짜’ 아나운서,
‘신뢰받는 언론인’ 독보적 1위 되기까지
저널리즘 에세이집 ‘장면들’을 출간한 손석희 전 JTBC 총괄사장을 만났다. 그는 총괄사장직을 내려놓고 순회특파원이라는 새 직책을 맡아 일본으로 출국했다. 이한호 기자 |
카메라 앞의 그는 손을 가만두지 못했다. 촬영 때문에 벗은 남색 마스크를 만지고 또 만졌다. 감정을 가다듬고 다스려, 눈빛마저 잔잔했던 앵커석의 그와는 딴판이라 ‘피식’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쑥스러움의 표현인가, 아니면 앵커브리핑을 할 때 두 손으로 펜을 굴렸던 것처럼 버릇인가.’ “마스크는 잠시 옆에 두시죠.” 말을 건네고 나서야 그는 ‘아차’ 싶다는 듯, “아, 그럴까요” 했다.
손석희(65) 전 JTBC 총괄사장을 서울 종로구 자택에서 만났다. 그는 순회특파원이라는 새 보직을 받아 일본 출국을 앞두고 있었다. 지난달엔 저널리즘 에세이집 ‘장면들’(창비)을 출간하기도 했다. 4년째 요청한 인터뷰가 여러 시의적 의미와 맞물려 이뤄졌다.
‘장면들’은 손석희라는 저널리스트가 갈수록 어젠다의 수명이 단축되는 이 디지털 시대에 어떻게 어젠다를 지켜나갔는지를 담은 책이다. ‘어젠다 키핑(Agenda Keeping)’을 자신이 구현하고자 한 저널리즘의 고갱이로 압축했다. 2015년 5월 한국언론정보학회 정기학술대회 기조연설에서 처음 거론한 개념이다. ‘장면들’엔 ‘손석희의 뉴스룸’ 6년 4개월 동안 집중했던 사안 중 ‘세월호 참사’, 국정농단의 스모킹 건이 된 ‘최순실 태블릿PC 입수’, ‘미투’ 연속 보도가 그 사례로 담겼다. 2013년 5월, 우려와 기대 속에 이적한 JTBC에서 맺은 열매다.
이를 가능하게 한 토양은 이전의 30년간 다져졌을 테다. MBC 노동조합 간부로 1992년 ‘공정방송 쟁취’ 파업 투쟁을 이끌며 ‘저널리즘을 위해 운동할 수는 있어도 운동을 위해 저널리즘을 하지 않는다’는 자신만의 금언을 완성했고, 13년간 ‘손석희의 시선집중’, 8년간 ‘100분 토론’을 진행하며 ‘인터뷰ㆍ토론 저널리즘’을 보인 그다.
‘장면들’은 저널리즘을 말하는 책이라 학구적일 듯하지만, 문학적이다. 뉴스에 음악(엔딩곡)과 인문학(앵커브리핑)을 접목한 그의 ‘뉴스룸’을 닮았다. 레거시 미디어 시대의 말석에 앉은, 한 빛나는 저널리스트가 디지털 시대 상석의 후배들에게 보내는 희망 섞인 ‘페어웰(Farewell)’이기도 하다.
이 인터뷰로 ‘장면들’에 없는 손석희를 만나고자 했다. ‘돌병원’이라 불리는 병원에서 태어나 ‘돌을 닦아서 빛내라’는 뜻의 이름을 받아 마치 그걸 실현이라도 하듯 바쁘게 산 직업인이자, 가족만 생각하면 먼저 미안함이 밀려드는 남편이며 아버지, 하이든의 현악 4중주 ‘종달새’ 1악장을 들으면 이걸 시그널음악으로 썼던 교내방송 코너 ‘정오의 벤치’가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휘문고 방송반원, 뉴스가 전하는 ‘1분의 가치’를 몸소 깨닫게 된 새내기 아나운서 말이다.
그에 앞서 짚고 가고 싶은 장면 하나가 있다.
[장면 #0] 당신 대체 누구야?
그의 평소 옷차림은 단출하다. 옷도 편한 것, 익숙한 것을 좋아한다. 아나운서 초기부터 카메라 앞에서조차 화장하기를 꺼린 것도 이런 성향 때문일 테다. 이한호 기자 |
“이 친구, 이거 큰일 낼 친구네!”
입사 100일도 안 된 신입사원이 이런 말을 들었으니 불행인가, 다행인가. 낯빛이 누르락붉으락 변한 선배 기자의 그 말은, 물론 칭찬이 아니었다. “당신 누구야? 당신 대체 뭔데 맘대로 뉴스를 편집해?” 1984년, 서슬 퍼렇던 전두환 정권 시절 햇병아리 아나운서가 ‘땡전뉴스’를 죄다 쳐내고 뉴스를 했으니 난리가 난 거다.
그 말이 예언이 됐을까. ‘큰일 낼 친구’란 소리를 들은 그 신입 아나운서는 ‘손석희’가 됐으니. 이름 석 자로 정체성이 설명되는 그라면, 그 자체로 이미 큰일을 낸 것 아닌가. 십수 년째 미디어 여론조사에서 ‘가장 신뢰받고 영향력 있는 언론인’ 1위를 지키고 있다는 수치를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말이다.
이 인터뷰나 책 ‘장면들’은 “당신 누구야? 당신 대체 뭔데?”라는 37년 전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장면 #1] 돌을 닦아라, 빛이 날 때까지
-JTBC로 간 뒤 구성원들에게 “사장은 무슨 사장, 선배라고 부르라”고 했다면서요. 그 호칭이 제일 편한가요.
“그간 하도 여러 호칭으로 불리길래 한번 세어봤더니 일고여덟 가지는 되더군요. 선배, 사장, 앵커, 교수… 거기다 MBC 국장 시절 함께 일했던 후배들은 아직도 국장이라고 부르고요. 다들 자기가 편한 대로 부르는 거고, 상대가 편한 게 저도 편해요. 하지만, 저로선 여러 가지를 아우르는 선배라는 호칭이 제일 편하긴 해요. 전직, 현직을 따질 필요도 없고요. 정서적으로 장벽을 허물 수도 있죠. 갓 들어온 신입사원이 저한테 ‘손 선배’라고 부르면, ‘아, 나는 정말 권위주의가 없는 사람이야!’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웃음) 그러니까 일종의 자기만족이 되기도 하는 거죠.”
-정체성을 축약한 수식어는 역시 ‘저널리스트’가 맞겠지요?
“그렇죠.”
-어린 시절이 궁금해요. 음악을 꽤 좋아했다고 들었어요.
“음악 싫어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우리 세대는 특히 그렇죠. 레드 제플린, 비틀스, 김민기… 전설이란 전설의 전성기는 모두 실시간으로 함께했죠. 고등학교 때 방송반을 해서 아마도 그 즈음부터 음악을 꽤 열심히 들었던 것 같아요. 그때 방송반 동기가 ‘난타’로 유명하고 지금도 연극배우로 무대에 오르는 송승환입니다.”
-방송반에서는 무얼 맡았나요.
“PD, 아나운서, 엔지니어까지 다 했어요. LP 디스크를 튀지 않게 플레이하는 최고의 엔지니어였죠. (미소) 그게 아주 고난도 기술이거든요. 1학년 때 처음으로 맡은 교내 프로그램이 ‘정오의 벤치’라는 클래식 방송이었어요. 시그널 음악이 하이든의 현악 4중주 ‘종달새’ 1악장이었죠. 지금도 어디선가 그 곡이 나오면 저도 모르게 도입부에서 ‘정오의 벤치’라고 타이틀을 소리 내어 말하곤 해요. 50년이나 된 일인데 말이죠.”
그는 저널리즘의 본령을 “전방위 비판”이라고 말하는데, 음악 취향도 전방위적이다. ‘뉴스룸’ 시절 매일 직접 고른 엔딩곡에서 잘 드러난다. 그 870곡은 인디 음악부터 대중가요, 팝송, 클래식, 성가까지 장르가 다양하다.
-‘석희(石熙)’라는 이름은 누가, 어떤 의미로 지어주신 건가요.
“하하. 이런 질문하는 사람은 정말 처음이네요. 흔하지는 않은 이름이죠. 부모님이 어느 작명가에게 부탁해서 지은 겁니다. ‘돌 석’자에 ‘빛날 희’자를 썼으니, ‘돌을 닦아서 빛내라’란 뜻이라고 들었어요. 보통 이름에 돌 석자는 잘 안 쓰던데 저는 아무튼 쓰게 된 거죠. (빛날 정도로 돌을 닦아야 하니) 이름부터 좀 부지런해야 하는 팔자가 주어진 것 같긴 합니다. 아, 그리고 이름하고는 상관없는데 제가 태어난 병원도 돌로 지어졌다고 해서 ‘돌병원’이라고 불렀던 데예요. (웃음)”
-대학은 국문과를 진학했죠.
“국문과에 간 건 직업과는 아무 상관없어요. 그냥 그때는 시나 소설이 좋아 보였으니까요. 하지만 창작은 애저녁에 포기했습니다. 창의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다고 생각했거든요. 대신 세밀한 묘사는 잘했어요. 중학교 미술 시간에 아그리파나 알렉산더 석고상을 그리면, 제 그림이 대부분 선생님한테 ‘픽업’됐죠. 그건 똑같이 그리면 잘하는 거잖아요. 저는 그런 게 지금의 직업과 더 맞는 소양이었다고 생각해요.”
-언론인이 돼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있나요.
“아마 중학교 때일 거예요. 제 친구의 삼촌인가가 무슨 기사를 쓰고 나서 끌려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때 생각했지요. ‘기사를 잘못 쓰면 끌려가나.’ 그래서 관심을 갖게 됐어요.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유신이 일어났고요. 그러니까 알게 모르게 제 속에서 사회화가 그렇게 진행된 거지요. 그런데 그게 뭐 체계적인 건 아니에요. 그냥 막연하게 언론이란 것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라고나 할까요.”
-신문이 아니라 방송을 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신문은 아무래도 분위기가 좀 권위적이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방송이라고 해서 더 나을 게 없다는 건 나중에 안 일이지만요. 그래도 그때는 방송이 컬러로 바뀐 지 3년여밖에 되지 않았고, 분위기도 더 역동적이긴 했습니다. 정권에 얽매여 있기는 방송이나 신문이나 매한가지였지만. 솔직히 먹고사는 일이 급했어요.”
[장면 #2] 전두환, 소화불량
그는 작년 초 책을 구상해 10월 초까지 집필했다고 한다. 주로 주말에 몰아 글쓰기를 했다. 이한호 기자 |
-아나운서로 입사했는데, ‘저널리스트로서 아나운서’에 대한 생각이 확고했나요.
“저는 기본적으로 (언론사에서) 어느 직군이든 모두 저널리스트라고 생각해요. 드라마, 예능, 교양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들도 그 시대를 담아내는 저널리스트지요. 기자는 말할 것도 없고, 아나운서 역시 당연히 그렇습니다. 인터뷰하고, 취재하고, 원고 쓰고, 게다가 직접 진행까지 하는 직군이니까요. 제가 뉴스나 시사 프로그램이 아닌 음악 프로그램 DJ로 방향을 잡았더라도, 저는 여전히 저널리스트입니다. 그런 질문을 한 의도는 잘 알아요. 그에 맞춰서 대답을 하자면, 저는 그냥 제 성격상 뉴스나 시사가 편해서 그쪽으로 나아간 것이고, 제가 그걸 좋아하니까 성과도 나오고, 그래서 일이 더 많이 맡겨진 것이기도 하지요.”
-1984년 MBC 입사 3개월 차에 처음 라디오 뉴스를 진행하면서 ‘땡전뉴스’(뉴스 시보가 ‘땡’ 하고 울리면 “전두환 대통령은”이라고 시작하는 뉴스)를 과감히 쳐낸 일화가 책에 나와요. 이미 언론통폐합이라는 칼까지 빼든 전두환 군부독재 치하였는데, 어떻게 그랬죠.
“아, 그건 솔직히 무슨 의식이 있어서 그랬던 게 아니에요. 그냥 신입사원 입장에서 생각해볼 때도, 대체 대통령 관련 뉴스란 게 내용이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데 그 짧은 시간에 뉴스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게 말이 되나 싶었죠. 그래서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쳐낸 거예요. 비정상적인 뉴스편집이 정상처럼 돼 있는 상황을 그 세계 바깥에서 들어온 제가 이해하지 못했던 거지요. 당시의 언론 상황은 그랬고, 저는 본의 아니게 그 부조리를 처음부터 몸으로 겪은 셈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그때는 ‘보도지침’이란 게 있어서 뉴스 아이템 선택부터 편집, 보도까지 전부 간섭할 때잖아요. 그걸 초짜가 모르고 덤빈 것이지, 제가 용기가 있어서 그랬던 건 아니에요.”
그가 일본으로 출국한 지 이틀 만인 11월 23일, ‘전두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5ㆍ18 진실 규명’은 그가 ‘뉴스룸’ 시절 집중 보도했던 사안 중 하나.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관련해 전화 인터뷰를 추가로 한 이유다.
-여러 생각이 들었을 것 같아요. ‘뉴스룸’에서 5ㆍ18 당시 헬기 사격 등의 사안을 연속 보도하기도 했고요.
“그 사람을 20년 전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어요. 아주 건강해 보였죠. 지금보다 그때, 더 여러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사회는 이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명확하게 답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세상이 논리대로만 가진 않잖아요. 뭐랄까. 소화불량 상태인데, 이 사람은 어찌 이리 건강해 보이는가 싶었죠. 이제 그가 세상을 떴다고 다 해결된 것도 아니겠지요. ‘5ㆍ18 헬기 사격’은 ‘어젠다 키핑’의 하나로 ‘뉴스룸’이 파고든 사안이에요. 증언도 많이 나왔고요. 모두 어렵게 증언해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실체는 규명돼야 하고, 나아가서 발포명령자도 밝혀져야 해요. 전두환씨 사망 소식이 전해진 날 후배 기자가 문자를 보내왔어요. ‘선배가 만일 지금도 뉴스룸을 하고 있다면 앵커브리핑을 어떻게 썼을지 궁금하다’고. 저는 ‘아마도 역대급으로 긴 브리핑이 됐을 것 같다’고 답해줬어요.”
-JTBC는 뉴스에서 “전두환씨”로 호칭을 하죠.
“전두환ㆍ노태우씨 호칭을 그렇게 한 건 ‘뉴스룸’이 처음은 아니에요. ‘손석희의 시선집중’ 때 이미 그렇게 했죠. 언론으로선 처음이었을 거예요 ‘한국사회가 논리적으로 그를 어떻게 대할지는 명확하게 답을 알고 있다’는 것과 맥이 같아요. 반란수괴로 이미 전직 대통령 자격을 잃었으니, 뉴스에서 ‘씨’로 호칭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전두환씨는 끝까지 한마디도 사과하지 않았죠.”
-언론인이 되면서 가진 첫 마음은 뭐였나요.
“솔직히 큰 목표를 세우거나 문제의식을 갖지는 않았어요. 당시 제게 취업은 단지 호구지책이었으니까. 집안의 부침도 심했고요. 요즘 말로 ‘흙수저’여서 취업만 돼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문제의식이 없는 건 아니었는데 그런 것들이 구체화되고 명료해진 건 오히려 언론에 들어와 점차 겪어나가면서 얻게 된 것들이지요.”
그가 28년 전 낸 에세이집 ‘풀종다리의 노래’나 과거 인터뷰를 보면, 어려웠던 집안 형편 얘기가 나온다. 직업 군인이던 부친은 그가 여섯 살 때 전역한 뒤 사업을 했지만 실패를 거듭했다.
-1987년 MBC 노조 결성, 이듬해 파업, 그리고 ‘공정방송’ 리본을 달고 뉴스를 진행한 일, 1992년 구속까지 일련의 사건이 미친 영향은 뭐였나요.
“노조 초기부터 자의든, 타의든 나서다가 점점 더 앞으로 나가서 나중엔 집행부가 됐어요. 단단한 의식 때문이라기보다는 마음이 약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 남들이 나서주길 원하는데 뒤로 뺀다는 건, 마음이 약한 사람은 못 하거든요. 저한테 미친 영향이야 한마디로 방송장이로서의 저를 상당 부분 규정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30여 년 전에도 머리 모양이 지금과 비슷하다. 왼쪽 사진은 입사 2년 차인 1985년 프랑스로 첫 해외 출장을 떠났을 때 모습. 오른쪽은 1992년 MBC 노조 대외협력위원회 부간사 시절. 쟁의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연행돼 구속적부심을 받고 나오던 모습이다. 아직도 온라인에서 유명한 사진이다. 손석희 제공ㆍ온라인 캡처 |
-1992년 수갑을 차고 포승줄에 묶인 채 웃고 있는 사진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있고, 온라인에서 종종 화제가 돼요. 그때 지은 미소는 어떤 마음에서 나온 건가요. 30년이 지난 지금 그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 궁금해요.
“안경 알이 유난히 컸다는 생각부터 듭니다. (웃음) 동료들과 함께 구속적부심을 받고 나올 때였어요. 조합원들이 와서 응원을 하고 있는데 좀 쑥스럽잖아요. 며칠 전 까지 멀쩡하게 같이 있다가 갑자기 난생처음으로 수갑도 차고 포승줄에도 묶였으니까. 그래도 거기서 인상 쓰면 안 될 것 같더라고요. 제가 여유로워야 바깥에서 파업 중인 조합원들도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고요. 그런 복합적인 생각이 들었어요. 사진은 지금은 세상을 떠난 김용현 카메라 기자가 찍어준 겁니다. 살아있을 때 저한테 가끔 자기가 제일 잘 찍은 사진이라고 농담하기도 했죠.”
-수감생활은 어땠나요.
“아니, 그걸 수감생활이라고 하기엔 좀 뭐하지요. 겨우 20일 있었는데. 다만, 안에 있을 때는 언제 나갈지 모르니까 좀 힘들기도 하고, 오만 가지 생각들이 떠오르긴 했죠.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불구속 기소로 나왔으니까 그걸 수감생활이라고 하면 제가 굉장히 뻥튀기를 하는 셈이 돼요.”
그 20일을 그는 독방에 있었다. 영등포구치소였는데 근처가 김포공항이었다. “매일 비행기 소리가 들렸거든요. 그때 생각했어요. ‘내가 나가면 언젠가는 이 담장 밖보다 훨씬 더 멀리 떠나고 싶다’고.” 실제 그는 5년 뒤인 1997년 미국 미네소타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석사학위를 받았다.
김지은 인스플로러랩장 luna@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