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파랗게 젊은데" 말에 번쩍... "제주서 귀농 정착 도와요"
제주서 귀농 비결 전수하는 폴개조합 강명실씨
교사 은퇴후 제주살이 하러 왔다가 아예 정착
귀농 성공 비결 교육... 배우려는 은퇴자 발길
[편집자주] 은퇴 이후 하루하루 시간을 그냥 허비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삶에서 재미를 찾지 못하고, 사소한 일에 분노를 표출하기도 합니다. 은퇴 후 삶은 어때야 하는 걸까요. <한국일보>는 우아하고 품격 있게 인생 2막을 살고 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매주 수요일 연재합니다.
제주 한 감귤농장에서 만난 폴개협동조합 이사 강명실씨. 27년 간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 2016년 제주에 귀농했다. |
"지천명(知天命)을 넘어 이순(耳順)을 향해가는 나이. 어릴 적 하고 싶었던 꿈은 이미 다 이뤘어요. 그런데도 아직 남은 인생이 30년. 이제 와서 뭔가 다른 것을 새로 꿈꿀 수 있을까요? 아니, 새로운 꿈을 다시 꾸기라도 할 수 있을까요?"
제주의 한 감귤농장에서 만난 폴개협동조합 이사 강명실(58)씨의 몇년 전 고민도 이와 같았다. 21세에 교사가 되어 꿈을 이뤘다. 27년간 원없이 학생들을 가르치다 2010년 명예퇴직을 했다. 퇴직 후에도 2015년까지 기간제 교사로 학교를 오갔다. “다시 태어나도 선생님이 되겠다”고 말할 만큼 교사가 천직이던 강씨였지만, 우선은 다음 인생이 아닌 이번 생에서 해야 할 일을 찾아야 했다. 결국 마음을 비우고 떠난 제주에서 제2의 천직을 찾았다. 자신과 같은 은퇴자들의 제주 정착을 돕는 일이다.
“새파랗게 젊은데 놀기만 하네”
25일 한 감귤농장에서 폴개협동조합 직원이 감귤을 크기별로 분류하고 있다. |
은퇴하고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던 강씨에게 제주도는 그저 여행지일 뿐이었다. 오랜 일에 지치고, 두 딸도 외국에 나간 차에 ‘3년만 살아보자’는 생각으로 2015년 5월 남편과 함께 제주로 향했다. 뭔가 일을 시작할 구체적인 계획은 물론 없었다. “주변에서 은퇴자들이 제과점, 편의점, 세탁소를 시작하고 잘못된 경우들을 봤어요. 해본 일도 아니고, 괜히 보증금만 날릴까 봐 걱정이 많았죠.”
뭍에서 온 외지인으로 5개월을 보냈을 무렵, 우연히 ‘귀인’을 만났다. 은행에 앉아있는데 구순 가까이 되어 보이는 할머니가 말을 걸었다. 여기서 뭐 하느냐는 질문에 “일 그만두고 놀고 있어요”라고 대답하자 호통이 돌아왔다. “어디 새파랗게 젊은데 일도 안 하고 놀고 있느냐.” 뒤통수를 얻어 맞은 것 같은 충격을 경험한 강씨는 그 때부터 고민을 시작했단다. “30년을 일했지만 30년 더 산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어요. 정년 없는 일이 뭘까 생각하다 제주에 귀농을 하자고 마음 먹었죠.”
아는 사람도, 농사 지을 땅도 없던 강씨. 농사만 하기보다는 자기가 가장 잘 하는 특기(교육)를 살려 보기로 마음먹었다. 교실 안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경험 바탕으로 농장에서 귀농인에게 조언하는 사업을 구상했다. 결심이 서자 사회적 기업·농촌융복합산업·농촌 교육농장 인증은 물론 스타팜·사회적 농장 지정까지, 필요한 과정을 차근차근 준비할 수 있었다. 이것들을 준비하기 위해 1년간 교육을 받은 시간만 1,000여 시간에 달했다.
제주의 괸당 문화를 넘기까지
지난해 10월 강명실씨가 전국 화력발전소 은퇴 예정자들을 대상으로 강의하고 있다. 강씨 제공 |
은퇴자들이라면 누구나 귀농·귀촌의 장소로 떠올리게 되는 제주. 그러나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2010년대 초반부터 제주 살기 열풍이 불었지만, 제주 특유의 환경과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육지로 다시 돌아가는 사람도 많았다. 뿌리가 얕은 외부인이었던 강씨가 선택한 전략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었다. 사업에 필요한 교육을 들으면서 동시에 2016년 폴개협동조합을 만들어 조합원을 구하고 출자금을 모았다. 지금은 20대부터 80대까지, 총 12명의 조합원을 두고 있다.
제주에 적응하려는 외지인이 넘어야 할 가장 큰 벽은 제주 특유의 ‘괸당’ 문화다. 괸당은 좁게는 친척, 넓게는 이웃을 의미하는 제주 방언이다. 과장을 살짝 보태 67만 제주 사람들은 한두 다리만 건너면 다 아는 사이란다. 마을·지역 사람들이 끈끈할수록 외부인은 그 속에 녹아들기 어렵다.
강씨는 식지 않는 열의로 이 괸당 문화를 뚫어냈다. 일단 일을 시작하면 거침없이 해 나가는 부모님을 닮았기에, 근성만큼은 자신이 있었단다. 농장주만 받을 수 있는 팜파티 전문가 교육에 “수료증은 안 줘도 괜찮으니, 청강만 하겠다”는 근성으로 참여했다. 교육을 받으며 우연히 농장주들을 알게 됐고, 컴퓨터로 업무 처리를 도와주며 농업인 단체에 가입하는 등 서서히 제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한창 육지에서 사람들이 넘어오니, 주민들이 경계하더라구요. 주민 입장에선 자리를 빼앗길까 봐 위기의식이 생기는 거죠. 주민자치위원회에 4년째 참여하며 귀농인과 주민, 공무원 사이의 가교 역할을 맡고 있어요. 괸당을 텃세라고 받아들이면 힘들어지니, 서로 이해부터 하고 양보하면 길이 보이지 않을까요?”
5년의 노력 끝에 폴개협동조합은 제주에 완전히 자리잡았다. 감귤, 블루베리, 꿀, 벌 화분(꽃가루) 등을 직접 재배하고 농촌 체험활동을 주선한다. 7, 8월 블루베리 농장을 방문한 관광객만 1500여 명일 만큼 사업도 호황이었다. 귀농인과 주민들과의 접점을 만들기도 한다. 음악회를 개최하고 음식을 마련해 커뮤니티 공간을 만들었다. 하늘빛복지관, 제주자폐인사랑협회와 양해각서(MOU)를 맺고 송편 빚기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하여 지역 사회에도 꾸준히 기여하고 있다.
이제 강씨의 농장은 전국의 은퇴자들이 방문하는 '핫 플레이스'가 됐다. 전국의 발전소, 건강보험공단, 국립기상과학원, 도청 등에서 정년을 앞둔 공무원들이 방문해 강씨에게 귀농의 성공 비결을 묻고 있다. “할 일 없으면 더 빨리 늙어요. 은퇴하면 개학이 없는 방학 같아 더 답답하기도 하죠. 저도 2년은 벤치마킹 하느라 정신 없었지만, 제 방식으로 했기에 자리잡은 것 같아요.” 강씨의 성공비결이다.
“중년 함께 사는 커뮤니티 조성이 목표”
25일 제주의 한 감귤농장에서 폴개협동조합 강명실 이사가 조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눈코 뜰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강씨는 지금 이 순간이 즐겁다고 말한다. “일하는 게 아니라 놀고 있는 기분이에요. 하루하루 무언가 만들어지는 걸 보면 성취감도 느끼죠. 귀농인이 버티는 시간이 3년인데, 그 안에 뿌리 내리도록 돕자는 소명의식도 생겨요.”
중년의, 중년에 의한, 중년을 위한 커뮤니티를 만드는 게 강씨의 꿈이다. 지금은 5060이 모이는 ‘드림캠프’를 구상 중이다. “은퇴자들이 제주도에 오면 노는 것도 잠깐이고 금방 따분해 해요. 제주에 살면서 한달에서 1년간 마을 일을 돕고, 감귤도 따고 말도 타는 등 드림캠프 프로그램을 만들 거에요. 20~30가구 모여 살고, 할 일이 있어야 자식들도 걱정 안 하겠죠. 부모님들도 요양원이 아닌 커뮤니티에 데려와 살고 싶어요.”
강씨는 "아직 새파랗게 젊다"는 말을 은퇴자들에게 해주고 싶다고 했다. “정년하면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게인, 다시 시작해야 또 30~40년 더 살 수 있죠. 남은 인생 우리끼리 즐겁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제주=글·사진 김진웅 기자 woong@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