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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도] “왜 선거 때마다 나를 찾나? 정치인 홍정욱은 9년 전 실패”

[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61>홍정욱


‘그래도 괜찮아, 흘러가라’ 놔두는 연습”

딸 사건 후 함께 1년여 치유하며 보내

“미국 돌아간 딸, 일어서는 게 최고의 반성”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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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욱 올가니카 회장을 1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에서 만났다. ‘7막 7장’(2003년 개정 증보판)의 표지 포즈를 부탁하자 그는 “예전 모습과 비교될 텐데”라며 웃었다. 조기 유학 붐까지 일으킨 이 책으로 그는 수억 원의 인세와 함께 높은 인지도를 얻었다. 이한호 기자

올가니카 회장이자 전 국회의원 홍정욱(51)의 촉수는 늘 세상을 향했다. 나이 마흔아홉까지는.


부모를 6개월간 조른 끝에 미국으로 떠난 게 중학교 3학년.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이상을 좇아 간 유학이었다. 딸 수 있는 최고의 졸업장을 모두 얻었다. 하버드대와 스탠퍼드대 로스쿨을 거친 그의 운명 개척기는 ‘7막 7장’(1993)에 응집됐다.


사회에서 행로도 화려하다. 뉴욕주 변호사 시험 합격,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때 파산했지만) 세계적 투자은행 리먼 브러더스 입사, 벤처 회사 창업, 언론사주, 18대 국회의원, 식품 기업 창립까지. 그가 지닌 최대의 단점은 겉으로 보기에 흠잡을 데 없는 최고의 삶을 살아왔다는 점일 거다. 배우인 부친 남궁원(본명 홍경일)씨를 빼닮은 외모마저도. 하물며 20년 살았다는 자택도 서울 평창동 꼭대기였다.


남이 가지 않은 길을 질주해온 그가 내면에 눈을 돌리게 된 건 맏딸(20) 사건을 겪으면서다. 2년 전 미성년자이던 딸이 미국에서 입국하면서 마약을 몰래 들여오려다 적발됐고 지난해 6월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형을 확정 받았다.


홍 회장은 “살면서 실패로 힘들어도, 그마저도 아름답고 위대한 모험이자 선물이라고 여겼다”며 “그런데 처음 고비라고 느낄 정도로 자괴감과 죄책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마약 밀반입’이라는 결과보다 딸이 마약에 손을 대게 된 이유 때문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의 부모까지 건강이 악화했다. “개인적인 일들이 터지고 겹치면서 삶이 미궁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딸의 마음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가 내게서 온 건 아닌가. 그렇다면 이 기회에 정면으로 들여다 보자’. 딸의 치유에도 도움이 된다면 뭐든 시도해봐야 했다. 그렇게 시작한 명상. 처음엔 10분 남짓이었던 명상은 마음이 어지러울 땐 1시간까지 늘어났다. 그래서 뭐가 달라졌을까.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괴롭혔다는 불안과 우울, 불면이 사라졌을까. “때가 되면 안 좋은 감정은 또 찾아오죠. 이제는 무찌르려고 애쓰지 않아요. 나를 거쳐 흘러가게 놔두는 연습을 하는 거죠. ‘뭐, 불안하고 우울해도 괜찮아’ 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웠어요.”


글쓰기를 한 것도 자신의 마음과 마주한 결과인지도. 50일 만에 책 한 권 분량인 50개 이야기를 쏟아냈다. 지난달 초 펴낸 ’50 홍정욱 에세이’(위즈덤하우스)는 출간하자마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벌써 3쇄를 찍었는데도 그는 “정치인 책으로 분류돼 포털사이트에 광고도 싣지 못한다”며 투덜댔다.


그의 불만이 무색하게 여전히 세상은 그를 정치인으로 여긴다. 국민의힘은 지난해 총선 때도 그에게 서울 강남병 지역 출마를 제안했다. 그의 답은 ‘이후 연락 두절’이었다.


인터뷰에서도 ‘정치’ 얘기만 나오면 목소리가 높아졌다. ‘정치인 홍정욱’을 두고도 “실패했다”고 자평했다. 정치권을 바라보는 그의 실망과 회의는 여전했다. 하긴, 그가 책에 적은 국회 관전평을 보면 ‘이렇게 쓰고 국회로 돌아가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하지만 모를 일. 책에 쓴 것처럼, 앞으로 그의 인생 여정에 어떤 이야기들이 쌓여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으니까. 그는 여전히 ‘나는 왜 사는가’라는 소명을 찾고 있다고 했다.

삶을 공유하고 싶어 쓴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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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서울 노원병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활동할 때를 제외하고는 쭉 이 집에 살았다고 한다. 뒤로 보이는 건 그의 서가. 이한호 기자

-‘7막 7장’보다 확실히 문장이 담백해졌고 생기가 돌아요.


“27년이 흘렀으니까요. 힘을 빼고 솔직하게 썼죠. 주위에서 그만 쓰자고 하지 않았으면 50편이 아니라 100편을 넘겼을지도 몰라요. 원래 꽂히는 게 있으면 집중하긴 하는데 글 쓰는 게 좋더군요.”


-왜 삶에 관해 쓴 건가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무얼까. 어떤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 삶의 소명을 사람들은 어떻게 찾고 있는지 궁금했고 또 내 여정도 공유하고 싶었죠.”


-숫자만 나열된 목차는 처음 봐요.


“내 뜻대로 했다면 목차가 없었을 거예요. 하하. 필요 없는 건 다 빼고 싶은 게 내 성격이니까. 그런데 (출판사가) 목차는 있어야 한다고 해서 넣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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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을 결심했던 열다섯 살의 심정을 “못 가면 인생이 끝날 것 같은 절박함”이라고 표현했죠. 케네디를 향한 동경이 그렇게 강했나요.


“서울에서 공부 잘하면서 부모님 밑에서 편안히 살고 있었죠. 그런데 앞으로의 길이 보였어요. 그게 싫더라고요. 내 재능은 예체능도 아니고 공부인데, 그걸로 어떻게 남과 다른 길을 갈 수 있을지 생각했어요. 그러다 케네디 대통령의 전기를 읽고 그를 동경하기 시작했죠.”


-그렇다고 중학생을 미국에 보낸 부모님도 대단해요.


“6개월쯤 졸랐으니까요. 아버지가 유명 배우이긴 했지만, 유학비를 대주실 만한 수입은 없었어요. 철이 없었죠. 그럼에도 결국 보내기로 결정하셨으니, 내가 큰 복을 타고 났어요. 어머니, 아버지는 지금까지 제 판단에 반대를 하신 적이 없어요. 제가 잘나서라기 보다는 그게 자녀 교육의 소신 아니었나 싶어요.”


-어린 나이에 유학 생활이 힘들었을 텐데, 인생의 첫 고비였나요?


“고비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감성적인 면이나 우울함과 불안감 같은 타고난 성격적 결함 때문에 마음의 시달림이 있긴 했죠. 하지만 너무나 많은 희생 위에 만들어진 최고의 기회였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그런 상념을 이겨내고 최고의 성과를 낼 것인가’하는 목표 의식뿐이었어요.”


-대통령도 꿈꿨나요 .


“케네디의 전기를 읽었으니 세계의 흐름을 이해하는 훌륭한 리더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했죠. ‘미국 정계에 진출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도 했고요. (어릴 땐) 공직을 맡아서 리더십을 경험해보고 싶었죠.”


-유학의 시간은 인생에서 어떤 의미예요?


“이성의 목소리를 듣고 분석하고 판단해서 결정을 하면 실수는 없을지 몰라요. 반면에 가슴에서 울리는 소리를 듣고 꽂히는 대로 가면 실수와 실패가 많죠. 그러나 후회는 없어요. 그걸 알게 된 계기가 됐죠.”

초엘리트로... 그러나 뭘 원하는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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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하버드대 졸업식에서 찍은 기념사진. 홍정욱 제공

-청년 시절에 한 선택을 보면 학업은 한국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도 최고 학부에 진학했고, 최고의 로스쿨도 졸업했어요. 직업도 로펌을 다니다 로펌을 움직이는 게 투자금융은행이라서 리먼 브러더스로 갔고 거기서도 결국 기업 같은 고객의 지시 받더라 해서 창업을 했죠. 가슴의 소리를 따랐다고 하지만, 제3자가 보면 최고를 향한 질주로 느껴지기도 해요.


“스타트업을 할 때까지는 모든 경험을 최단기간에 한 세계 최고 엘리트가 돼야겠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그런데 달리 보면,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몰랐던 거지. 어린 나이에 소명을 찾은 행운아들도 있지만, 저는 뭘 원하는지는 몰랐어요. 그걸 찾기보다는 최고의 엘리트가 돼서 모든 걸 빨리 겪어보고 정하자는 생각이었죠. 그래서 앞도, 뒤도, 옆도 안 보고 전진했어요. 그리고 ‘내가 뭘 원하는지는 몰라도 남 밑에서 일하는 건 아니구나’ 해서 창업을 한 거고요. 그때부터는 엘리트의 삶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인생의 무대에서 검증의 시간이 시작된 거죠.”


-그 첫 실패가 벤처 회사 스트럭시콘이고요.


“경제적인 고비이자, 인생에서 처음 맛본 실패의 쓴맛이었죠. 대학 3학년부터 로스쿨까지는 부모님께 한 푼도 받지 않고 장학금과 학자금 대출로 학교를 다녔어요. 취직했을 때 갚아야 할 학자금이 3억원(25만 달러) 정도였죠. 그 부채를 안고 결혼도 했고, 뉴욕이라는 물가 비싼 도시에서 생활도 해야했어요. 그런데 창업에 꽂혀서 100억원이나 투자를 받아 만든 회사가 도산한 거죠. 그때 귀국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미국에서 살 수가 없으니까 온 거였어요. 현금 300달러 들고요. 미국에서도 다시 얼마든지 취직은 할 수 있었지만, 그건 싫었죠.”


-한국에 와서는 어떻게 지냈나요.


“아버지 댁 문간방에서 세 식구가 얹혀 살았죠. 과외 같은 여러 아르바이트도 했고요. (경제적으로) 인생에서 가장 저점이었죠.”


미국 영주권을 포기하고 군에 지원해 공익근무요원(사회복무요원)으로 복무도 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인수할 기업을 물색했다.


-기업 경영으로 마음을 굳힌 거군요.


“리어카를 끌고 다니면서 과일을 팔더라도 내 일을 하고 싶었어요. 미국에서 짧은 기간에 법조계, 금융계, 스타트업을 거쳐보고 가진 확신이었죠.”


-절망은 하지 않았나요.


“절망은 지금까지 해본 적이 없어요. 그때도 반드시 다시 일어서야겠다는 의지에 불타서 인수할 회사를 찾았죠.”


-그 회사가 헤럴드(헤럴드경제ㆍ코리아헤럴드)라는 언론사였군요.


“당시에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위기의 여파가 남아있을 때라 도산한 기업들이 많았어요. 부도난 기업이면 헐값에 인수할 수도 있으니까 예금보험공사나 한국자산관리공사 같은 곳을 통해서 끊임없이 정보를 찾고 분석하다가 헤럴드 소식을 듣게 됐죠. ‘아니, 헤럴드가?’ 싶었어요. 고등학교 때 코리아헤럴드에서 인턴을 했었거든요. 미국에서도 NBC에서 인턴을 하면서 언젠가는 언론사를 경영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고요. 무조건 돈만 버는 사업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도 실현할 수 있는 사업이니까요. 헤럴드 얘기를 들었을 때 그래서 꽂혔죠.”


-언론사 경영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수도 있는데.


“회사 재무상태를 들여다 보니 매출도, 손실도 일정했어요. 방만 경영이 원인이라는 거죠. 되살릴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었어요.”


-그런데 돈이 없었잖아요.


“20명에 가까운 일가친척이 저를 위해 보증을 서줘서 대출을 받았죠.”


2002년 헤럴드를 인수했지만 구조조정으로 진통도 상당했다. 인수 자금 출처의 적법성을 두고 노조가 그를 검찰에 고발까지 했지만 무혐의 처분됐다. 그는 “경영은 결국 숫자로 성공 여부가 판가름 나는 것”이라며 “언론사로서 본분을 할 수 있게 하려면 우선 기업의 건전성부터 키워야 했다”고 말했다. 헤럴드는 3년 만에 흑자로 돌아섰다. 17년간 키운 헤럴드를 그는 2019년 중흥그룹에 매각했다.

가족 반대 무릅쓰고 총선 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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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 없는 ‘퇴장’. 2011년 12월 11일, 그는 19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인생을 낭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버텨야 할 때 관두고 관둬야 할 때 버티기 때문”이라고 그는 이번 책에 썼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헤럴드를 인수한 지 6년 만인 2008년 돌연 18대 총선에 도전했죠.


“언젠가 자격과 자질을 갖춘다면 공직에 도전해봐야겠다는 꿈이 있었죠, 그때까지는.”


정치 얘기가 나오자 그는 선부터 그었다.


-가족의 반응은요.


“모두 결사 반대했죠.”


- 그 중에서도 배우자의 반대는 큰 고려 요소였을 텐데요.


“아내는 결혼 전에도 ‘나는 (당신이 정치하는 거) 싫다. 조용히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했어요. 그래서 결혼할 때 제가 ‘당신이 동의하지 않으면 정치는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것 같아요.”


“했던 것 같아요?”라고 되묻자, 그는 쑥스럽게 웃으며 “약속했어요”라고 고쳐 말했다. 얼굴이 발개졌다.


-그런데 어떻게 설득했어요?


“아내가 동의했다기보다 따라와준 거예요. 제 결정이 싫었지만 존중한 거죠. 대신 제가 어떤 일을 하든 가족의 삶에 많은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고, 가족은 보호하겠다고 약속을 했어요.”


-선거운동이란 걸 처음 해봤을 텐데 힘들지 않았어요?


“힘들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어요. 공부할 때나 헤럴드를 인수해서 3년간 휴일 없이 일할 때도 마찬가지였죠. 늘 목적을 달성하려면 일단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믿고 노력했어요. 이뤄지냐, 아니냐는 하늘의 몫이고요. 선거운동도 그랬어요. 외려 당선된 다음이 힘들었지. 하하.”


-선거운동이 힘든 이유는 나를 지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찍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을 설득해야 한다는 데 있잖아요. 그러다 보면 면전에서 명함을 찢거나 던지는 사람도 만날 수밖에 없고요.


“아! 그런 일은 너무 많았죠. 평생 처음 겪는 일이었어요. 저란 사람이 아니라 제가 속한 집단에 의해 평가 받고 극단의 혐오를 당하는 건 충격적이었죠. 그렇지만 젊었고 정치 지형도 잘 몰랐던 때라 ‘그런가 보다’ 했어요. ‘저기는 (상대 당 지지세가 강한 곳이라) 갈 필요 없다’고 해도 ‘그런 말 하지 마라. 어디든 난 무조건 간다’ 했죠. 진짜 최선을 다했어요.”


애초 그는 나고 자란 서울 동작갑에 공천을 신청했으나 떨어졌다. 당 거물 인사가 자신의 측근을 밀어붙였다는 말이 돌았다. 그는 중구로 우회했지만, 그곳엔 나경원 의원이 낙점됐다. 결국 돌고 돌아 출마한 곳이 노원병이다. 열린우리당(더불어민주당 전신) 당 의장을 지낸 임채정 국회의장의 오랜 지역구로 야성이 강했다. 고 노회찬 진보신당(정의당 전신) 의원이 진작 터를 닦아 그와 양강 구도를 이뤘다.


-왜 한나라당에 공천 신청을 했어요?


“진보적 가치에도 동의하는 부분이 많지만, 남북관계와 노동문제, 기업 관련 정책 때문에 그랬어요. 또 보수 정당에 들어가더라도 사안마다 유연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면 되지, 진보냐 보수냐(같은 진영 논리)는 중요하지 않다고도 생각했고요. 그런데 정작 영입 제안을 한 건 현 더불어민주당 쪽이었죠.”


-그래요?


“네, 그것도 두 번. 2004년 총선 때와 2008년에요. 진보 정당이 인재 영입에 정말 적극적이라고 느꼈어요. 그에 비해 보수 정당은 그때도, 지금도 (정치신인을) 발굴하고 키우려는 노력과 역량이 부족하지 않나 생각해요.”


- 만약 그때 영입 제안을 수락해 민주당 공천을 받았더라면?


“똑같이 노원병에 가게 됐겠죠. 하하.”


-하지만 한나라당을 택할 때 여당이라는 장점도 고려했겠죠.


“맞아요. 같은 지역이더라도 그때까지 내리 보수 정당이 낙선한 지역이라 분위기는 달랐겠지만, 또 당시 여당 바람도 있었으니까요.”

국회 가서 들은 “대체 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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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새 에세이집에 실린 50편의 글 중 열다섯 꼭지에 정치 얘기가 등장한다. “국회체육관은 운동하는 곳이 아니라 싸움을 쉬는 곳” “국회는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도 없는 곳” 같은 평이 재미있다. 이한호 기자

국회의원 시절에도 그는 빈 틈이 없어 튀는 인물이었다. 행커치프가 꽂힌 테일러드 재킷을 교복처럼 입고 다녔고, 머리 모양은 한 오라기의 이탈도 허용하지 않는 ‘7 대 3’ 가르마였다. 2009년 말 한나라당이 ‘4대강 예산안’ 등을 강행 처리하자 본회의장에 앉아서 펑펑 울던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에게 행커치프를 빼서 건네는 신사의 면모를 보였다가 중진들의 얄미움을 사기도 했다. 영남권 의원들은 그를 “미국 물이 채 빠지지 않은 스타일리스트”라고 비꼬았다. 여당 소속이면서도 청와대가 밀어붙이는 현안에도 일방 독주는 안 된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는 쇄신파였다, 외로운.


-책에서 국회 시절 느낀 소외감과 스트레스를 고백한 부분이 인상적이었어요. 겉으로 비쳤던 것과는 다른 면이어서 기억에 남아요. 특히 “나만 빼고 국회가 돌아가는 듯한 콤플렉스” “시험시간을 착각한 수험생처럼 아무도 없는 회의장에 나 혼자 나타나는 꿈” 같은 대목요.


“저는 (당의 주류와) 학연도, 지연도, 혈연도 없었어요. 계파도 없었고요. 그러니 공천 때 지역을 옮겨 다니며 그렇게 고생을 했죠. 그래도 돌이켜 보면 그래서 다행이기도 했어요. (특혜 받지 않고 진입했으니) 내 뜻대로 정치를 할 수 있었죠.”


-청와대로서는 눈엣가시였겠어요. 예를 들면, 소속 정당이 2011년 4월 한ㆍEU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을 상임위원회 소위에서 표결을 강행하니까 기권하고 퇴장했잖아요. 그래서 결국 부결됐죠.


“그날 사전에 표결한다는 얘기가 없었어요. 토론하려고 자료 준비 잔뜩 해서 외교통일위 법안심사소위에 들어갔더니 위원장이 바로 표결하겠다는 거예요. 야당 의원들은 당연히 ‘날치기’라고 반발했죠. 국익을 생각해서 비준안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야당의 반대를 묵살하면서까지 일방적으로 밀어붙여선 안 된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기권한다고 말하고 일어섰죠.”


일대 사건이었다. 그의 한 표로 부결됐기 때문이다. 여당 소속 소위 위원장은 “찬성하는 위원들은 기립해달라고 했는데 그때 홍정욱 의원이 일어서 있었다”며 “위원 6인 중 4인이 찬성했으니 가결”이라고 우겼다. 논란이 일자, 그는 따로 기자회견까지 열어 같은 뜻을 밝혔다. 비준안은 결국 부결된 채 전체회의에 넘겨졌다.


-파장은 없었나요.


“여러 군데에서 연락이 왔죠. 왜 그랬냐고. 그런 걸 신경 썼을 거면 애초에 그러지 않았겠죠. 그런데 그 즈음부터인 것 같아요.”


-불출마할 생각이 든 게요?


“네, 그 전 해(2010년 12월)에 이미 물리력에 의한 의사 진행을 포함해 국회의 모든 강행 처리에 동참을 거부한다고 선언했거든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는 차기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그런데 흘러가는 걸 보니 불출마하게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가 의원 시절 유일하게 했던 모임이 ‘국회 바로 세우기’ 였다. 새해 예산안을 강행 처리해 여야가 극한 대립으로 치닫자 모임 소속 의원 23명이 ‘불출마’로 배수진까지 치며 개혁과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 이미 18대 국회는 첫해인 2008년부터 한ㆍ미 FTA 비준안을 국회 외통위에 상정할 때부터 해머에 소화기까지 등장한 몸싸움으로 얼룩졌다. 최악의 ‘동물국회’라는 오명을 안은 이유다.


-‘동물국회’가 되면 초선은 당 지도부의 뜻대로 병사처럼 움직여야 하잖아요.


“하염없이 매일 밤 국회에서 대기하죠. 특히 예산안 처리할 때는 언제 본회의장에 모여야 할 지 모르니까. 본회의장에서도 대치가 격해지면 단상 앞으로 나가기라도 해야 하고요. 그런 과정이 이해가 되지 않았죠. 내 소신대로 살겠다고 마음 먹고 잘 다니던 투자금융회사 나와서 창업해 여기까지 왔는데. 국회의원 개개인이 헌법기관이라면서 실제는 지도부가 부르면 부르는 대로, 가라는 대로 움직여야 했어요.”


그는 그러면서 당시 한 의원에게 들었다는 얘기를 들려줬다. “국회의원이란 게 원래 초선 때는 지도부가 시키는 대로 배우면서 지나가는 거고, 재선하면 재미있어지기 시작해서, 3선이 되면 상임위원장도 하고 주요 당직도 맡으면서 국회의원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다.” 그렇잖아도 염증을 느낄 무렵 들은 그 말이 폐부를 찔렀다.


“아니, 그럼 국회의원을 제대로 해보는 데에 12년이 걸리는 거잖아요! 4년이면 학위도 학사 하나, 석사는 두 개를 받을 수 있어요. 제가 헤럴드라는 50년 적자 기업을 살리는 데에도 2년 반이 걸렸어요. 4년이면 아이를 낳아도 셋을 낳을 수 있는 시간이잖아요? 평범한 사람들은 대개 1년 단위로 인생 계획을 세우고 사는데 국회의 시계는 4년에 한 번씩 돈다니. 12년이면 내 인생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 실용주의자의 눈에 국회란 곳은 그야말로 비효율의 극치였던 거다.


-그래도 출마하면서, 또 당선 직후 인터뷰에서 “평생의 사명인 공직 참여의 길을 선택하겠다” “정치와 공직 참여가 인생의 종착역”이라고 해놓고 너무 빨리 포기한 거 아닌가요?


“(쑥스러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으며) 소명을 찾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깨달았죠. 그러면서 배우는 게 인생 아닐까요. 그 가슴의 울림이 4년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사라질 수 있다는 것에 저도 놀랐어요.”

왜 그렇게 선거 때마다 저를 찾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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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먹는 게 어떤지 물었다. 그는 단박에 답했다. “저는 좋아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거든요. 지금으로 충분해요.” 이한호 기자

-국회에 들어가기 전엔 정치를 뭐라고 생각했나요.


“가장 영예로운 봉사라고 여겼죠. 국민을 편안히 만들고, 소임을 다 마쳤을 때 진영에 상관없이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난 정치의 이상적인 측면만 본 것 같아요. 현실은 그렇지 않잖아요. 내가 기억하는 한 우리 정치는 늘 국민을 걱정시켜왔죠. 정치가 국민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정계를 떠난 지 8년이 넘었어요. 그런데도 왜 아직 선거 때만 되면 잠재적 후보로 거론될까요.


“정말 제가 되묻고 싶어요. 18대 국회에서 의원하고 그만둔 분들이 많잖아요. 그 중에서 아직도 후보로 거론되는 분이 있나요? 내가 잘났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그만큼 당혹스럽고 힘들어서 그래요. 국회를 떠난 이후에 하지 않던 인터뷰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하지 않는다’는 말할 필요가 없는 얘기를 하려고 해야 했어요. 젊은이들에게 나누고 싶은 가치가 많지만 강연도 안 했죠. ‘강연 정치한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그렇게 정치권과 거리를 두고 내 기업을 성장 시키는 데에만 최선을 다해도 선거 때마다 ‘출마할 것이다’ 심지어 ‘출마하려고 접촉 중이다’ ‘출마하려고 간을 보고 있다’는 소리가 나와요. 인스타그램을 중단해도, 다시 시작해도, 에세이를 써도 모두 출마로 이어져요.”


-이유가 뭘까요.


“기존 정치권에 실망해서 그렇겠죠. 새로운 피가 쭉쭉 수혈되면 좋은데 그것도 아니고요. 지금 정치권을 보면, 과연 우리나라 최고 엘리트나 사명감을 가진 인재들이 정치를 직업으로 선택하겠어요? 요즘 같은 세상엔 다양한 기회가 비처럼 그들에게 쏟아져요. 그 기회를 물리치고 정치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까요? 그러니 수혈이 안 되는 거죠. ‘그럼 새로운 사람이 누가 있을까’ 고민하다 보니 제 얼굴이 자꾸 떠오르시나 봐요. 정치권이 잘해주면 그런 일이 없겠죠. 저도 유권자 중 한 사람으로서 어려운 시기에 국민을 통합해서 앞으로 나가게 할 메시지를 지닌 메신저가 있기를 바라요.”


-정계를 떠난 뒤 유권자로서는 어떤 선택을 해왔나요?


“비밀투표란 대원칙을 저버리는 엄청난 질문을 하시다니! 하하.”


-일관성이 있었는지 궁금해서요.


“아뇨, 선택에 일관성은 없었어요.”


-투표할 때 뭘 중요하게 보나요?


“지역 정치 보다는 중앙 정치를 보려고 노력해요. 국회의원을 해보니 의원 한 명이 지역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바는 지극히 작더라고요. 대한민국이 이동했으면 좋겠다는 방향으로 제 힘을 실어요.”

정치 바꾸기엔 인내심도, 능력도 부족했다

한국일보

그는 “상대는 절대악으로 상정해두고 싸우는 정치가 그때도 싫고,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한호 기자

-국회의원이라는 공직자로 보낸 4년은 인생에서 어떤 의미였나요.


“한 초선 의원의 날갯짓으로 바꿀 수 있는 게 많지 않더군요. 내 역량과 위치가 너무나 초라했어요. 연륜과 경험을 쌓아서 그렇게 할 수 있게 되기까지 기다릴 만한 인내심도 내겐 없었고요. 스스로 부족함을 많이 느꼈죠.”


-그때 정치를 안 했더라면요?


“작년이나 요즘처럼 여러 (출마) 제안이나 얘기가 나올 때 쉽게 응했겠죠. 하하. 그러나 나는 이미 한번 보고 왔어요. 마음 속의 진입장벽이 높아졌죠. 이미 들어가서 좌절하고 깨달음을 얻고 돌아섰는데 다시 정치를 한다? ‘내 자격과 자질은 그때의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성장했는가, 내가 정말 이루고 싶은 이상과 변화가 있나, 내 모든 걸 희생하고 바칠 만큼 처절한가’ 같은 질문을 해봐야겠죠.”


-정치인 홍정욱은 성공했나요, 실패했나요.


“아… 열심히 했어요. 열심히 했지만, 음... 당연히 실패한 거죠. 4년 동안 최선을 다했지만 그걸 통해 정치 지형의 변화를 일으켰는지,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국회를 만들었는지 자문해보면 그렇지 못하니까요.”


-정치한 걸 후회하진 않나요.


“전혀. 내 가슴이 부르는 대로 갔고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는 없어요.”


-정치 자체에 대한 희망이 완전히 꺼졌다기 보다 정치판에 실망했다는 의미지요?


“언론과 이야기를 할 때는 확실하게 답을 하지 않으면 ‘여지를 남겨뒀다’ 이렇게 표현하니까 답하기 어려워요. 내가 내일 밥으로 뭘 먹을지도 모르는데, 이 자리에서 (정치를) 안 한다고 하는 건 위선이자 가식이고요.”


-정치를 할 거냐, 말 거냐는 걸 물은 게 아닌데. 정치가 이 사회를 긍정적으로 바꾸는 기제라는 믿음이 여전한지 궁금해서요.


“(웃으며) 미괄식으로 답하느라 돌아가던 중이었어요. 국회를 나올 때도 정치가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했거나, 정치 자체에 학을 뗀 게 아니에요. 일단 후퇴한 거죠. 자, 이건 여지를 둔 발언이 아닙니다. 부족한 역량으로 이 곳에서 버틸 게 아니라 더 빨리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고 나온 거죠.”


‘동물국회’를 떠난 그는 채식주의자가 됐다. 친환경 식물성 음식을 만드는 회사까지 차렸다. 먹을거리로 자연과 건강을 바꾼다는 모토로 2012년 만든 올가니카다. 그에 앞서선 비영리 사단법인 올재를 만들어 한 권 가격이 2,900원인 고전 시리즈 ‘올재클래식스’를 내놨다. 종당 5,000권씩만 발행하고 그 중 1,000권은 복지시설과 교정기관 등에 기부한다. 정치를 그만둔 뒤에도 그의 관심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있었다.


-기업을 하더라도 공동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싶다는 욕구가 느껴져요.


“살면서 부(富)가 목적이었던 적은 없어요. 마음의 울림과 가치를 좇았죠.”


-본인의 식습관도 육식을 하지 않는 페스코테리언으로 바꿨는데, 계기가 있나요.


“국회의원을 하면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 외통위원으로서 세계 각지를 돌면서 환경 문제에 기울이는 각국의 치열한 연구와 투자, 노력을 봤다는 거예요. 가와나 히데오의 ‘진짜 채소는 그렇게 푸르지 않다’를 읽으면서 음식 산업의 중요성도 깨달았죠. 음식만 제대로 먹어도 지구 환경을 바꿀 수 있어요. 심지어 축산업만 떼어놓고 봐도 전 세계 교통수단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해요. 음식 기업을 통해서 환경에 기여하고 싶었죠.”


첫해 매출이 8,000만원이었던 올가니카는 4년 만에 연 매출이 1,000억원을 넘어섰다. 주변 모든 것이 안정적으로 돌아가던 시기, 그에게 예상치 못한 시련이 닥쳤다.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큰 딸이 2019년 9월 액상 대마 카트리지 6개와 종이 형태의 마약인 LSD를 밀반입하다 적발된 거다. 귀국 전까지 마약류를 3차례 사들여 9차례 투약하거나 흡연한 혐의도 드러났다. 지난해 6월 항소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형이 확정됐다. 보호관찰과 17만8,500원의 추징금 명령도 1심대로 유지됐다. 초범이고 미성년자라는 점 등이 고려됐다.

딸 ‘마약’에 큰 자괴감

한국일보

딸이 우울하고 불안한 상태를 보이기 시작한 건 몇 년 전. 마약 사건이 터지며 그는 “사랑하는 딸이 겪어온 고민과 고통을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자신에게 문제가 생긴 것보다 더 힘들었을 것 같아요.


“살면서 처음으로 정말, 참 힘들다고 생각했어요. 문제 없이 예쁘게 컸다고 생각한 딸이 그런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걸 알았을 때 아버지로서 큰 자괴감을 느꼈죠. 여러 ‘가짜 뉴스’까지 돌아서 더 힘들기도 했지만, 그건 문제의 본질이 아니니까요. 침묵보다 나은 언어가 없었어요.”


-딸과 대화도 많이 나눴을 텐데요.


“그럼요. 중요한 건 우리를 돌아보고 왜 이런 잘못을 저지르게 됐는지 원인을 파악하는 거였어요. 그래야 치유도 할 수 있으니까. 내 교육의 방식, 우리 가정의 문제, 아이의 천성까지 두루 돌아봐야 했죠. 왜 마약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지 딸과 대화하면서 부모로서 굉장히 자책했고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어요.”


-딸 인생에서도 가장 힘든 시기였을 텐데 아버지로서, 인생 선배로서 어떤 조언을 했나요.


“조언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함께 이겨나간다는 동지 의식을 심어주려고 노력했죠. ‘나 역시 평생 마음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지 못했으니 이 기회에 우리 함께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어요. 나는 나대로, 딸은 딸대로 서로에게 미안함도 컸죠. 그렇게 치료든, 명상이든, 생활의 루틴(규칙적인 습관)이든 여러 가지를 함께 시도하면서 최선을 다해 1년여를 보냈어요. 아버지로서 딸이 그 시간을 버텨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죠.”


-지금 딸의 상태는 어떤가요.


“(법무부 신고 후) 얼마 전 미국으로 돌아갔어요. 가기 전 제게 예쁜 편지를 써줬죠. 저는 딸한테 그랬어요. ‘가서 공부 하기 싫으면 내일이라도 당장 돌아와라. 이 세상에 네 건강과 행복보다 중요한 건 없다. 힘들어도 반드시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 없다’고요.”


-안심하고 보낸 건가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딸은 큰 잘못을 저질렀어요. 그러나 나는 아빠로서 딸이 어떤 아이인지 알아요. 스스로 이겨낼 역량과 도덕성이 충분하다고 믿어요.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다시 설 것이고 그게 최고의 반성이라고 생각해요. 본인도 그렇고요.”


신간 ‘50 홍정욱 에세이’는 숨은 유머를 찾는 재미가 있다. 그러나 딸에 관한 글 두 꼭지만은 적막한 페이소스로 가득하다.

우울해도, 불안해도 괜찮아

한국일보

엘리트, 법조인, 금융인, 정치인, 기업인 그리고 작가. 종횡무진의 삶이다. 그는 “앞으로 내 여정에 어떤 이야기들이 쌓여갈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을 거다. 이한호 기자

-명상은 그 일로 시작했나요.


“딸 사건에 이어서 부모님도 건강이 악화되셨어요. 그렇게 개인적인 일이 연달아 터졌죠. 헤럴드를 무사히 매각했고 올가니카도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있었기에 사회ㆍ경제적으로 어떤 큰 도전을 할 것인지 고민하는 시간이었어요. 그런데 여러 사건이 융합되면서 삶이 미궁으로 빠져들었죠. 이 참에 나를 진지하게 돌아보자 싶었어요. 그런데 사색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더군요. 그래서 작년 여름에 처음 명상을 시도해봤죠.”


-명상을 하니 뭐가 달라지던가요.


“그간에는 어릴 때부터 괴롭힌 상념, 우울감, 불안을 무찌르려고 애를 썼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집착하고 확대하면 내 안에서 엄청난 괴물이 되더라고요. 명상은 결국 그런 감정을 흘러가게 놔두는 연습이에요. 그런 감정이 느껴져도 ‘괜찮아’ 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거죠.”


-아직도 우울, 불안, 불면이 괴롭히나요.


“늘 그랬어요. 소셜미디어를 해보면 하루하루가 즐겁고 행복하고 긍정의 기운이 넘치는 분들도 있던데. 아마 어린 나이에 외국에서 혼자 공부한 것, 또 천성적으로 감성적인 면이 강한 것이 영향이 있지 않나 싶어요.”


-책 첫머리에 ‘내 친구들에게’라고 썼어요.


“40년간 함께 해온 친구들이에요. 세상 모두가 나를 손가락질해도 내 곁을 지켜줄 거라는 흔들림 없는 믿음을 주는 이들이죠. 딸 사건으로 힘들 때도 (가족이 여기 없으니까) 혼자 있는 나를 내버려 두지 않고 곁을 지키고 얘기를 들어준 고마운 친구들에게 책을 바치고 싶었어요.”


-지금까지 살면서 지키려고 해온 삶의 도가 뭔가요.


“남들이 덜 간 길을 찾아 작더라도 내 발자취를 남기는 것이죠. 남들이 다 닦아놓은 길을 편하게 구경하면서 가는 인생은 재미없어요.”


-이 인터뷰를 읽고 독자들이 어떤 걸 얻길 바라나요.


“아무런 목적도, 강요하고 싶은 것도 없어요. 평소 젊은이들에게도 제발 조언 좀 듣지 말라고 얘기하거든요. 하하.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하는 주위의 말이 아니라 자기 마음의 소리에 치열하게 귀 기울여서 실패해도 후회하지 않을 고유의 삶을 살면 좋겠어요. 제가 살아온 얘기를 읽으시고 취할 건 취하고, 버릴 건 버리세요. (미소)”


그는 ‘7막 7장’에도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의 한 구절을 인용했었다. “갈라진 두 길이 있었지. 그리고 나는 ─ 나는 사람들이 덜 다닌 길을 택했고 그것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네.”


올해 만으로 쉰한 살, 그 시간 동안 그가 ‘정치인’으로 산 건 단 4년. 그런데도 세상은 그의 정체성을 ‘정치인’으로 축약한다. 그는 “자신을 무엇으로 규정하고 싶지도 않고, 세상의 규정에도 관심이 없다”고 했다. 그저 “끊임없이 도전하는 사람”일 뿐.


그에 비추어, 이건 가늠할 수 있을 듯하다. 그는 앞으로도 가보지 않은 길을 골라 발걸음을 내디디리라는 것, 지금은 숨을 고르고 있을 뿐이라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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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인스플로러랩장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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