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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과 불의 한식(寒食)... 개자추는 모든 걸 버렸거늘

[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기행] 

<10>역사문화 명산 ④면산

살과 불의 한식(寒食)... 개자추는

산시성 제슈시 면산 절벽을 따라 만든 도로. 버스가 커브를 돌 때마다 오금이 저린다.

내가 황주에 온 이후(自我 黃州)


이미 세 번째 한식이 지났구나(已過三寒食)


해마다 지나쳐 가는 봄날이 안타까워라(年年欲惜春)


봄날은 가도 이제 아쉬움조차 필요 없나니(春去不容惜)

소동파가 지은 ‘한식첩(寒食帖)’의 제1수 첫 4행이다. 문자옥(文字獄, 중국 왕조에서 황제나 체제 비판 글을 쓴 자를 벌하는 것)을 겪고 황주로 좌천된 40대 중반의 소동파는 우울한 심정으로 불평했다. 제2수에서도 임금의 ‘구중’과 조상의 ‘만리’를 한탄하더니, 싸늘하게 식은 재로 변한 자신의 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129자 한 폭 시첩은 처량한 마음을 절제된 행서로 담은 소동파의 대표작이다. 왕희지의 ‘난정서(蘭亭序)’, 안진경의 ‘제질고(祭侄稿)’에 이은 ‘천하제삼행서(天下第三行書)’로 타이완 고궁박물원이 소장하고 있다.

살과 불의 한식(寒食)... 개자추는

중국 역사문화 명산 중 하나인 면산의 대략 위치. 구글맵 캡처.

살과 불의 한식(寒食)... 개자추는

소동파 ‘한식첩’, 타이완고궁박물원 웹사이트.

소동파 시의 소재가 된 한식(寒食)은 언제 왜 생겼는가? 춘추시대 진나라 대부 개자추(介子推)의 무덤이 있는 면산(綿山)으로 간다. 베이징에서 고속열차로 3시간이면 산시성 타이위엔(太原)에 도착한다. 다시 버스로 2시간을 서남쪽으로 달리면 제슈(介休)다. ‘청명한식의 근원’이라 적힌 정문으로 들어가 다시 관광버스로 산길을 7km 오른다. ‘천하의 명산’ 면산의 첫 인상은 가파른 절벽이다. 카르스트 지형이 낳은 협곡과 동굴이 면산의 절경을 연출한다. 협곡 쪽으로 회전하면 소름이 끼칠 정도다.


서현곡(栖贤谷) 엘리베이터를 타고 개신묘(介神庙)를 찾는다. 본체는 동굴 안에 있고 지붕은 바깥으로 삐져나온 3층 높이의 웅장한 사당이다. 정면에 앉은 개자추나 인생 이야기를 새긴 벽면도 거대하다. 높이 22m, 너비 40m, 깊이 25m의 사당을 지탱하려고 반경 4.5m와 3m짜리 타원형 기둥도 세웠다. 개자추와 노모, 해장(解張)의 조각상은 모두 11m 높이다. 중국 최대의 동굴 사당이 실감 난다.

살과 불의 한식(寒食)... 개자추는

면산 입구에 ‘청명한식의 근원’이라는 현판과 개자추 동상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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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산 개신묘, 동굴 속 사당

살과 불의 한식(寒食)... 개자추는

면산 개신묘의 개자추 조각상.

살과 불의 한식(寒食)... 개자추는

개자추의 무덤, 개공묘.

한식은 춘추오패 중 두 번째인 진문공이 제정했다고 알려진다. 개자추의 대명사는 할육(割肉)과 소사(燒死)다. 진문공이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기아에 허덕일 때 자신의 넓적다리를 잘라 고깃국을 진상했다. 그러나 개자추는 공신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노모와 함께 여생을 위해 면산에 은거했다. 동고동락한 해장이 성문에 써 붙인 편지에 놀란 진문공이 개자추를 찾았다. 면산에서 내려올 줄 알고 불을 놓았는데, 개자추는 하산하지 않고 불에 타 죽었다. 반성한 진문공의 지시로 동지 후 105일째 되는 날을 한식으로 정했다. 불을 피우지 말고 찬 음식 먹으라는 반성이다.


개자추는 기원전 636년에 사망했다. 지금부터 2,655년 전 사건이다. 과연 사실일까? 믿어 의심치 않는 사마천의 ‘사기’조차 이 드라마 같은 두 사건을 취재하지 못했다. ‘면산을 이야기하며 개자추에게 포상했다’는 기록만 남겼다. 춘추시대를 기록한 편년체 사서인 ‘좌전(左傳)’도 그저 ‘은거하다가 사망했다’고만 적었다. 그런데 350여년이 흐른 후 전국시대 시인 굴원은 ‘구장ㆍ·석왕일(九章ㆍ惜往日)’에서 ‘개자충이입고혜(介子忠而立枯兮)’라 쓴다. 개자추가 충성을 하고도 불에 타서 비참하게 죽었다는 말이다. 강남으로 추방당한 후 시름에 겨운 충정을 개자추에 빗댄 시다. 좌구명과 사마천도 언급하지 않은 일을 굴원은 어떻게 상상했단 말인가?


사당 뒤로 산길을 따라 10분 정도 오르면 개공묘(介公墓)다. 벽돌 27개 높이의 아담한 무덤이다. 19년만에 진나라로 귀국한 진문공의 논공행상 앞에서 사심을 버린 개자추는 ‘부언록(不言祿)’을 설파했다. 사마천은 그의 생각을 사려 깊게 기록하고 있다. 이 후 노모와의 인상적인 대화도 언급한다. 대화체로 적으면 이렇다.

노모 : 어찌 다시 찾아가 공록을 요구하지 않는가? 죽고 나면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개자추 : 그들을 비난하려고 다시 찾아가 그들처럼 행동하면 죄는 더 커집니다. 이미 그들을 원망했는데 어찌 상훈을 요구하겠습니까?


노모 : 그래도 문공을 찾아가 처지를 다시 알려보는 건 어떠냐?


개자추 : 말이란 사람들 몸의 장식과 같습니다. 몸을 숨기려는데 어찌 다시 장식을 쓰겠습니까? 장식으로 치장하는 건 자신의 욕심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노모 : 네가 말한 대로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그러면 너와 함께 숨어 살겠노라.

‘언어는 사람의 됨됨이를 드러내는 치장’이라는 개자추의 언급은 참신하다. 매일 새 옷으로 갈아 입듯, 시도 때도 없이 장식을 바꾸고, 앞뒤 서로 다른 말로 구설에 오르는 인간은 무수히 많다. 한번 내뱉을 때 신중하고 처신이 일관적인 정치인을 언제나 만날 수 있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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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곡 협곡 등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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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내리는 등산객이 어기지 않게 양쪽으로 길을 만들었다.

역사를 거슬러 개공묘를 찾았다가 갑자기 현실을 꺼내니 뜬금없긴 하다. 엘리베이터로 올랐던 서현곡을 내려간다. 협곡 끝 철계단을 밟고 쇠줄을 잡은 채 조심스레 걷는다. 계단을 양쪽으로 따로 두니 서로 겹치지 않고 내려가는 사람이나 올라오는 사람이나 편안하다.


면산은 개자추 흔적 외에도 사찰과 도관이 경쟁하듯 자리를 잡았다. 개공묘와 가까운 쪽에는 운봉사(雲峰寺), 먼 쪽에는 대라궁(大羅宮)이 있다.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운봉사 뒷산의 정과사(正果寺)를 찾는다. 높이 69m의 7층 탑인 영응탑(靈應塔)이 멀리서도 보인다. 황제 칙령에 의해 건립된 듯 용이 활개를 치고 있다. 아담하지만 신비로운 사찰이면서 도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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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과사의 7층 영응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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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과사 바위 절벽의 용 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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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과사의 진신 등신불, 왼쪽이 승려이고 오른쪽이 도사다.

진신 등신불이 유례없이 많다. 승려 여덟, 도사 넷이 공생하며 종교의 경계도 없다. 중국에서 가장 큰 등신불 전각이다. 수련을 오래 하고 공덕이 높으면 앉은 채 열반에 든다. 신체가 무너지지 않고 원래 상태가 유지되면 '정과'를 얻었다고 한다. 진흙으로 열반 전 상태 그대로 복원한다. 당나라 이후 보존됐다고 하는데 상태가 대체로 양호하지만 진흙이 무너져 실제 뼈가 드러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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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위 정자에서 본 면산 관광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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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과사에서 운봉사 가는 갈지자(之)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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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산 포복암 운봉사.

정과사를 나와 절벽 길을 걸으며 면산의 절경을 만끽한다. 오금이 저리고 살짝 공포를 느낄 정도로 가파르다. 정자에 서면 관광버스가 다니는 길이 내려다보인다. 다시 산길을 따라 10분 정도 내려가니 수직 절벽이 나타난다. 지그재그로 절벽 옆 계단을 천천히 내려갈 때는 몰랐는데 다 내려가서 돌아보니 아찔하다. 갈지자(之)처럼 이어진 절벽을 올라가야 했다면 고민했을 법하다. 계단이 없을 때는 굵은 밧줄을 잡고 올랐다는 철색령이 보인다. 두보의 ‘음중팔선가’에 등장하는 당나라 풍류 시인 하지장이 밧줄을 타고 올랐다고 한다.


절벽을 돌아서면 면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운봉사 전경과 만난다. 높이 60m, 길이 180m에 이르며 안으로 깊이가 50m나 되는 거대 동굴 포복암(抱腹岩)이다. 동굴은 2층이며 안쪽과 주변 전각이 모두 운봉사다. 협곡과 능선을 따라 조성된 건축물이 동굴과 만나니 더욱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1,700여년 전 삼국시대에 한 고승이 처음 세웠다. 명청시대를 거치며 중건했다지만 명산의 고찰이 주는 감동은 넘치도록 풍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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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복암 가운데에서 본 운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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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사 공왕전에 봉공된 공왕고불

운봉사는 한족 최초로 성불을 이룬 승려를 배출한 사찰이다. 주인공은 당나라 초기의 전지초(田志超)다. 우여곡절 끝에 도교가 융성하던 면산에 들어와 승려로 명성을 잡았다. 당 태종 이세민은 수도 장안에 가뭄이 오래 지속되자 어전회의를 소집했다. 부하 장수의 의견을 받아들여 활불(活佛)로 명성이 높은 전지초에게 기우를 부탁했다. 전지초는 밥을 짓고 있는 제자에게 쌀뜨물을 장안이 있는 서남쪽으로 뿌리도록 했다. 그러자 장안에 단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큰 비가 쏟아져 많은 백성을 구제하게 됐다. 이세민은 감사를 표시하려고 직접 면산을 찾는다.


기분 좋게 면산에 도착한 이세민은 전지초의 제자로부터 이미 원적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낙심한 채 하늘을 우러러 이번 행차는 ‘공망(空望)이었구나’라며 탄식했다. 헛된 방문이라는 뜻이다. 그러자 갑자기 하늘에서 금빛 ‘공왕고불(空王古佛)’ 글자가 출현했다. 이세민은 ‘공왕불’ 칙령을 내려 성불을 경하했다. ‘망’은 ‘왕’과 발음이 같기도 하거니와 ‘공’은 불교의 근본인 비움과 일맥상통한다. 참으로 잘 짜여진 전설이다. 100여년이 흐른 후 하지장도 공왕불을 참배했다니 이세민의 칙령이 공염불은 아니었던 셈이다. 사람들은 진신 공왕불에게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하면 뭐든지 다 이뤄진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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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복암 왼쪽에서 본 운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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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복암 건너편에서 본 운봉사

동굴 안에서 봐도 운봉사는 멋진 풍광이다. 위치에 따라서 하늘이나 산을 넓게 볼 수도, 좁게 볼 수도 있다. 동굴 속을 걸어서 나올 때까지 변화무쌍한 장면이 이어진다. 운봉사 정면에 10층 높이의 엘리베이터가 있다. 다시 봐도 어마어마한 동굴이다. 운봉사 풍광을 헤치는 장치는 방문객을 순식간에 땅바닥까지 내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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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사 케이블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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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라궁 케이블카를 타면 7층까지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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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라궁 본전 8층 제선전 입구 모습

공짜 없는 중국에서 또 비용을 내고 세 번째 엘리베이터를 이용한다. 이번에는 도교 도관인 대라궁이다. 13층 110m 높이로 ‘천하도가제일궁관’이라 부른다. 밑바닥부터 계단을 따라 오르면서 신앙 속으로 빠지기는 다소 힘들다. 대라궁은 아래층인 7층까지는 5칸 규모의 보통의 도관이며 윗층인 8층부터 13층까지는 9칸 규모의 황궁 도관으로 건축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에 내려 계단을 올라 본전인 윗층을 본 다음 7층부터 아래로 내려오며 관람한다. ‘포탈라궁에 비견할만한 아름다움’이라거나 ‘산시의 둔황'이라고도 부른다.


‘대라’는 도교에서 최고의 선경이자 별천지라는 말이다. 대라궁의 최초 건축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당나라를 건국한 이연의 노모가 병약했는데 도사의 충언대로 신선인 조공명(趙公明)을 봉공하니 건강을 되찾았고, 이어 대라궁을 중건했다. 면산은 당나라를 건국할 때 이세민의 전승지이기도 하다. 당 현종도 면산을 찾아 참배하고 대라궁의 신에게 감읍해 대규모 보수를 했다. 대라궁이건 운봉사건 이래저래 당나라와 면산은 인연이 깊다. 1942년 일본군 침공으로 상당 부분 훼손됐는데 1995년 600여 존에 이르는 대형 도관으로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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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라궁 제선전의 태상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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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라궁에서 본 정자와 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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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라궁 삼청전

대라궁의 윗층 제선전은 도교 시조인 노자 태상노군(太上老君)을 비롯해 7존이 봉공한다. 도교의 최상위 천존을 봉공하는 삼청전을 시작으로 아래로 내려가면 도교의 서열을 자연스레 알게 된다. 재물신인 조공명과 비간, 범려도 만나고 삼관인 천관, 지관, 수관도 만난다. 자신의 태어난 해를 관장하는 신을 만나려면 태세성진(太歲星辰), 옥황상제가 궁금하면 영소전(靈霄殿)이다. 수직 도관이니 전각 지붕 아래로 면산의 참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중국인은 재물신만큼 ‘복록수(福祿壽)’를 주무르는 도교의 삼성신을 끔찍하게 좋아한다. 그러나 면산에 은거한 개자추는 녹봉이나 바라며 오래도록 복되게 살고자 하는 욕심을 모두 버림으로써 역사에 남았다. 패방을 지나 면산과 헤어진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내려가는 동안 굴원과 소동파가 읊조린 글을 다시 읽는다. 두 시인은 인생의 나락에서 개자추와 한식을 찾아내고 비통한 처지가 회복되길 갈구한다. 둘의 시는 명예를 초개처럼 여긴 개자추의 교훈을 다시 떠오르게 한다.


‘언어는 사람의 됨됨이를 드러내는 치장’일지니.

살과 불의 한식(寒食)... 개자추는

면산 패방.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pine@youy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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