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아버린 재킷, 뒤축 떨어진 구두… 기부 맞습니까
실종된 기부 에티켓… 기부 물품 3분의 2는 폐기
소외된 이웃에게 온정의 손길이 더욱 절실한 연말이 다가올수록 기부 예절의 실종이 아쉽다. 아름다운가게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전체 기부 물품 중 67.6%가 재사용이 불가능해 폐기 처리됐다. 사진은 지난달 30일 서울 성동구 아름다운가게 서울그물코센터에서 폐기로 분류한 기부 물품. |
겉면이 찢어진 전기방석 등 사용 또는 판매가 불가능한 가전제품도 기부 물품 중 흔하다. |
코팅이 벗겨지다 못해 흠집이 심하게 난 캠핑용 프라이팬. |
누군가 기부한 코트 곳곳에 곰팡이 수준의 묵은 때가 잔뜩 끼어 있다. |
재킷의 겉감이 삭아 가루로 부서질 정도로 낡은 재킷도 누군가 기부한 물품 중 하나다. |
분홍 재킷을 들어 올리자 삭은 겉감이 가루로 부서져 흩날렸다.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선 직원이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푸우, 누가 이런 옷을…” 그는 대형 철재 상자 속으로 재킷을 던져 넣었다.
지난달 30일 서울 경기 지역 기부 물품이 모이는 성동구 아름다운가게 서울그물코센터. 10여명의 직원들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물품을 ‘판매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분류하고 있었다. 철재 상자 안엔 옷인지 헝겊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낡은 옷가지들이 이미 수북했다. 곰팡이 수준의 묵은 때가 찌든 코트와 짝 잃은 양말, 쳐다보기 민망한 입던 팬티도 눈에 띄었다. 누군가는 선의로 전달했을 기부 물품의 상당수는 이렇게 상자에 채워지는 대로 폐기 트럭에 실려 나갔다.
이날 입고된 기부 물품은 총 1톤 트럭 17대 분량. 의류뿐 아니라 가방, 신발 등 잡화와 주방용품, 전자제품 등 종류도 다양했다. 이 중 매장으로 운반돼 새 주인을 맞게 된 경우는 트럭 5대 분량이 전부. 3분의 2에 해당하는 나머지 12대 분량은 폐기 처분됐다. ‘기부를 가장한 쓰레기 투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높은 폐기율이다. 비록 헐값이라도 폐기 처분으로 나온 수익금 또한 나눔에 보태지지만 운반이나 분류 과정에 드는 노력과 비용, 시간을 따져볼 때 불필요한 낭비임은 분명하다.
매장 출고량보다 월등히 많은 폐기량은 쓰지 않는 물건을 기부하고 그 판매 수익으로 소외된 이웃을 돕는다는 물품 나눔의 취지마저 위협한다. 옷 한 벌의 기부가 아쉬운 사회적기업이 ‘도와줬더니 더 좋은 것만 원한다’는 오해를 무릅쓰면서까지 폐기 실태를 공개하고 나선 이유다. 국내에서 물품 기부 규모가 가장 큰 아름다운가게에 따르면 2017년 기부 물품 총량은 약 2천155만점으로 1천143만여점이던 2013년에 비해 2배가량 늘었다. 그러나 폐기 수량은 약 496만점에서 1천460만여점으로 3배나 늘었다. 폐기율 역시 같은 기간 43.3%에서 67.6%까지 올랐고 올해 70%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기부물품 폐기 현황(자료제공=아름다운가게). 강준구 기자 |
지난달 30일 서울 성동구 아름다운가게 서울그물코센터에서 폐기될 기부 물품이 트럭 적재함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
아름다운가게 직원들이 지난달 30일 서울그물코센터에 입고된 기부 물품의 상태를 일일이 살펴가며 분류작업을 하고 있다. |
도저히 신을 수 없는 상태의 짝퉁 명품 신발. |
기부된 24색 색연필의 케이스를 열자 내용물이 하나도 없었다. |
이처럼 나눔의 취지를 외면한 폐기 물품 기부가 늘어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사회복지 단체 관계자들은 기부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 부족을 그 원인으로 꼽는다. 올바른 기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보니 ‘남이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인지 살피기보다 처치 곤란한 물건을 처리하는 차원에서 기부를 활용한다는 것이다. ‘버리느니 남 준다’거나 판매할 수 없는 수준의 물건을 ‘이게 얼마짜린데’라며 선심 쓰듯 내놓기도 한다. 천경욱 아름다운가게 서울 되살림팀장은 “방문 수거할 때 직원이 ‘어떤 물품은 되고 어떤 물품은 안 된다’고 설명해도 ‘준다는데 왜 안 가져가나’라고 역정을 내면 어쩔 수 없이 센터로 가져와서 폐기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중고 거래 사이트가 활성화하면서 쓸 만한 물건은 팔고, 팔지 못하는 물품은 기부하거나 연말정산 시 기부금 환급 혜택이나 기업 법인세 감면을 노린 얌체 기부도 적지 않다. 정연갑 아름다운가게 정책실장은 “친구 또는 이웃에게 내가 직접 전달할 수 있을 만한 물건인지 살펴보는 것이 기부 예절의 시작”이라며 “더 많은 나눔이 가능하기 위해선 기부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참여 노력이 절실하다”라고 말했다.
◇물품 기부 상식
구입 가격과 상관없이 본인이 지금 쓸 수 없는 물건은 남들 역시 쓰고 싶지 않다. 물품 기부에 앞서 고려해야 할 점을 정리했다.
#의류
육안으로 봤을 때 얼룩이 심하거나 때가 찌든 옷은 기부하지 않는 게 옳다. 속옷이나 양말은 새 상품이 아닌 이상 대부분 폐기다. 소재가 얇은 여름 옷의 경우 몇 번 입지 않아도 사용감이 강해서 잘 팔리지 않는다. 아무리 비싼 명품 의류라도 구입 당시의 가치는 의미가 없다. 옷은 유행이 짧아 현재의 트렌드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주방 용품
물품 기부의 기본은 ‘남이 사용할 수 있는가’다. 코팅이 다 벗겨진 프라이팬이나 기름때가 잔뜩 낀 튀김기, 각종 이물질이 남아있는 밥솥, 손잡이가 떨어져 나간 국자를 과연 누가 구입하고 싶을까.
#가전제품
고장 난 제품 또는 작동이 되더라도 부품이 없거나 표면에 상처와 낙서가 심한 가전제품은 대부분 판매가 안 된다. 찢어진 전기방석이나 먼지통에 이물질이 꽉 찬 진공청소기 등도 기부하지 않는 게 좋다.
#기부영수증
물품 기부를 하면 연말정산 시 소득공제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구입 당시 가격이 아닌 평균 판매 단가에 따라 기부영수증이 발급된다. 아무리 많은 수량의 물품을 기부했더라도 폐기 처리되는 등 판매가 불가능한 경우는 기부영수증 책정 대상에서 제외된다. 구체적인 기부영수증 액수는 국세청 연말정산간소화 서비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주영 기자 will@hankookilbo.com
박서강 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김혜윤 인턴기자
기기 내부에 각종 이물질과 녹이 가득한 토스터기. |
믹서기의 내부에 이물질이 끼어 있고 용기의 색깔마저 변색돼 있다. |
손잡이가 떨어져나간 스테인리스 국자. |
뷰엔(View&)의 기사와 사진을 감각적인 레이아웃으로 편집한 ‘스페셜 에디션’을 신문 지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12월 6일자 한국일보 15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