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물이 솟구치길 5일” 천년의 섬 비양도
탄생 스토리는 기록과 해석 따라 미묘한 차이
제주시 한림읍 비양도 전경 |
탐라에 상서로운 산이 솟아났다. 고려 목종 5년(1002년) 5월 "탐라의 산이 네 곳에 구멍이 열리어 붉은 색 물이 솟아 나오기를 5일만에 그쳤는데 그 물이 모두 와석이 되었다(耽羅山 開四孔 赤水湧出 五日而止 其水皆成瓦石)." 제주도의 화산분출을 기록한 최초의 문헌인 고려사절요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어 목종 10년인 1007년에도 화산분출 기록이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나오는데, “탐라에서 상서로운 산(瑞山)이 솟아났다 하므로 태학박사 전공지(田拱之)를 보내어 가서 보게 했다”고 적고 있다. 이어 탐라사람들이 말하기를 “산이 처음 솟아나올 때는 구름과 안개로 어두컴컴하고 땅이 진동하는데 우레 소리 같았고, 무릇 7주야를 하더니 비로소 구름과 안개가 걷히었습니다. 산의 높이는 백여길이나 되고 주위는 40여리나 되었으며, 초목은 없고 연기가 산 위에 덮여 있어 이를 바라보니 석류황(石 黃)과 같으므로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라 하였다. 전공지가 몸소 산 밑에까지 이르러 그 모양새를 그려서 바쳤다고도 기록돼 있다. 이를 ‘서산도’ 또는 ‘탐라화산도’라고 부른다.
제주도의 화산활동을 기록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내용은 거의 비슷한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1002년 기록에는 탐라산(耽羅山)이 빠지고 대신 "바다에서 산이 솟아났다(山有湧海中)"고 적었고, 1007년 기록에는 뒷부분에 서산의 위치가 나오는데 "지금의 대정현에 속한다(今屬大靜)"라고 썼다.
바다에서 본 비양도 모습. |
비양도 천년기념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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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양도의 민가. |
1000년 전 화산활동으로 생겨난 섬이 어디냐를 말할 때 학자마다 약간의 차이가 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기록에는 장소에 자세한 설명이 없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따르면 두 번의 화산활동 모두 바다에서의 용암분출로 섬이 생겨난 것이라 유추된다.
1601년 어사로 제주를 찾은 김상헌은 남사록에서 "고려 목종 16년 탐라의 해중에서 섬이 용출하였다고 했는데 곧 비양도라고 한다"라고 기록했는데 연대표기가 잘못돼 있다. 1679년 대정현감 김성구는 남천록에서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에 1007년의 화산분출은 지금의 대정현에 속한다"고 기록돼 있다는 점을 들어 화산분출로 형성된 섬을 가파도(蓋波島)라 여겼다. 그 근거까지 제시하고 있는데 둘레가 40여리라는 섬의 면적을 감안하면 우도와 가파도 밖에 없고, 대정현에 속한다면 당연히 가파도라는 것이다.
이어 1918년 김석익은 탐라기년에서 고려사절요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고, 일본인 지질학자 나까무라는 ‘제주화산도 잡기(1925년)’에서 1002년의 화산분출은 비양도, 1007년은 안덕면 군산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사절요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두 문헌 중 어느 것을 인용하느냐에 따라 ‘상서로운 산’의 위치가 달라지는 것이다.
이 화산 활동은 제주의 설화에도 등장한다. 한림읍 협재리의 임산부가 어느 날 바다를 보니 없던 섬이 떠내려 오고 있어, "섬이 떠내려 온다"라고 소리치자 섬이 그 자리에 멈춰 굳어졌다는 얘기가 전한다. 화산 폭발에 의한 해일이 발생했다는 설도 있다. 비양도가 지척인 한림읍 한림리와 금릉리, 애월읍 곽지리 등에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비양도가 생겨날 때 해일이 일어 마을을 뒤덮었다고 한다. 이미 1000년 전에 쓰나미에 의한 피해가 발생했다는 이야기다.
화산활동과 관련해 지난 2002년 비양도에서는 ‘섬 탄생 천년’ 행사가 논란 속에 열리기도 했다. 비양도에서 신석기시대와 탐라시대의 토기, 즉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했던 흔적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2003년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 조사에 의하면 섬의 북서쪽 전경 초소 인근에서 길이 1~2cm, 두께 0.8cm의 작은 신석기시대 토기 파편 2점이 확인됐다. ‘압날점렬토기’로 4,000~5,000년 전 시대에 해당한다.
탐라시대 전기(1~500년) 토기는 포구와 보건진료소 인근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는데, 곽지리식 토기와 함께 석기 1점도 확인됐다. 하지만 유적의 분포 범위가 좁고 수량도 소수인 점을 감안하면 일시적인 거주 공간으로 이용됐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질학자들이 추정하는 비양도의 나이는 3만년 전 내외로 보고 있다.
비양도 펄랑 |
비양도의 화산 쇄설물. |
비양도의 ‘애기업은 돌’. |
비양도와 관련한 기록으로는 화산활동 외에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내용도 보인다. 고려사 1454년 기록에는 김방경의 좌군이 전함 30척을 동원해 비양도에서 적(삼별초)들을 보루로 직접 공격했다는 내용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비양도에 양을 기르는 목장이 있다고 적었다. ‘비양도 안에는 전죽(全竹)이 잘 자라 매년 수천 다발을 잘라내는데 고죽(孤竹)이라 한다’는 기록도 지영록(이익태, 1600년대)과 남사록(김상헌, 1653년), 탐라지(이원진) 등에 언급되고 있다. 탐라순력도(1702년)에는 사슴을 생포하여 비양도에 방사했다는 기록이 그림과 함께 전해진다.
강정효 ㈔제주민예총 이사장 hallasan195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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