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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친절하고 불결한 노포 ... 맛집은 그렇게 권력이 됐다

이충걸의 필동멘션

<8>노포의 품위

한국일보

[저작권 한국일보] 더운 여름날 서울 중구의 한 유명 냉면집 앞에 사람들이 긴 줄을 서 있다. 류효진 기자

사람들은 세상에 돈보다 강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 돈은 귀신도 움직인다고. 그런데 돈보다 힘이 센 것은 역시 젊음 같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젊음을 살 순 없으니까. 그러나 내 생각에 돈이나 젊음보다 힘이 센 것은 따로 있다. ‘맛집’.


4년 전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오면서 이 부근에 몇 십 년 된 식당이 많다는 걸 알았다. 사람들은 그런 집을 ‘노포’(老舖)라고 불렀다. 사전적 의미는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 있는 점포. 친구들은 하나같이 근처 냉면집에 가고 싶어 했다. 나는 평양냉면의 진실한 맛도 모르면서 몇 번 가보긴 했지만 또 먹고 싶어 몸부림 친 적은 없다. 솔직히 한 여름 뙤약볕 아래 반들대는 이마로 그 집 앞에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이 신기하긴 했다. 그러나 거기 두 번 다시 안 가는 이유는 미각의 기호 때문이 아니었다.


주문할 때 급류에 떠내려가는 사람처럼 다급해지는 마음, 냉면이 식탁에 부려질 때의 거친 손길은 문젯거리도 안 됐다. 올림픽처럼 힘들게 먹고 카운터에 가니 주인은 다른 데를 보며 왼손으로 카드를 받고는 전표를 쓰레기통에 버리라고 했다. 나는 손님의 매너를 지켰다. 스태프들을 하대하지 않았고 미소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식탁에서 이를 쑤시지 않았고 휴지를 산더미처럼 쌓지도 않았다. 냉면 그릇에 담뱃재를 털지 않았고 목덜미를 물수건으로 훔치지도 않았다. 처음엔 어떤 덴지 모르고 간 욕쟁이 할머니 집에서 덮어놓고 욕을 열두 가마니 먹은 그 기분이 나의 과민함 탓인 줄 알았다. 그러나 노골적이지 않으면서 교묘하게 불쾌한 주인의 무례가 반복되자 나는 그 집에 영어 이름을 지어주었다. 네버 어게인. (Nerver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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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한국일보] 서울 을지로의 한 호프집에서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내가 갔던 노포에는 얼추 일관된 통계가 있었다. 노후된 건물, 주인의 위력적인 교만, 거기에 합세하는 스태프들의 불량한 박력, 보다 인상적인 비위생. 나는 전과 다른 방식의 괴로움을 느꼈다. 대뜸 반말을 하는 순댓국 집 주인, 그렇게 굽는 게 아니라면서 처음 간 친구의 등짝을 철썩, 파도 소리 나게 갈기는 꼼장어 집 주인, 테이블에 앉자마자 “양념갈비 두 개요?” 하고 묻고는 메뉴를 살피기도 전에 “양념 갈비 먹으러 온 거 아니에요?” 채근하던 갈비 집 종업원, 소주 한 병도 채 안 비웠는데 우리 발치에 물걸레질을 하던 그 집 주인, 머리카락이 세 개나 나왔는데도 호호 웃으며 다시 퍼다 주겠다고 눙치는 꼬리곰탕 집 주인….


노포에서 겪는 일은 이따금의 일상 속에서 나와 협상했다. 나는 북적대는 노포의 수수께끼를 결코 풀 수 없었다. 노포가 단순한 식당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는 믿음은 누가 줬을까? 맛보지 않으면 안 되는 특정한 중독의 비밀은 무엇일까? 혹시 나는 음식 문화가 아니라 신경 정신 약리학에 대해 떠드는 걸까? 아니면 혼자 고상한 척?


나는 노포가 질서정연한 삶 속에서 궁극의 쾌락을 연구하는 철학의 절대 분류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괄시 받으면서 돈을 내는 손님, 인간성을 팽개치면서 돈을 버는 가게 주인 모두가 가학적 피학성 시체 애호증 환자로 보였다. 그러나 ‘이모’도 못지 않게 이상했다. 여태껏 발명된 것 중 가장 기발한 만능 호칭이랄까. 함께 간 이가 주문하려고 “이모!”하고 부르면 나는 꼭 물었다. “네 이모님이 여기서 일하시니?” 계산하고 나선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이모님이 돈을 받니?” 그들도 그 친구더러 “삼촌”이라고 맞받아쳤지만 그에겐 그런 조카가 없었다.


외로운 세상에 없던 친척을 만들어내는 시대의 굶주림, 타인과 어떡해서든 관계를 맺어야만 마음이 놓이는 애정 결핍은 상호적으로 너무 강화된 사회 경향이 되었다. 다른 얘기지만, 어떤 자리든 처음 본 사람 거개는 삼 분도 안 돼 “형님. 말씀 놓으세요”라고 했다. 그때마다 나는 물었다. “말을 놓는다는 건 관계가 생긴다는 거고 관계엔 책임이 따르는데 그걸 감당할 자신이 있어요?” 평생을 모르던 타인끼리 순식간에 형 동생이 됨으로써 세상에 내 편을 늘린 기쁨은 다시 만날 일도 서로 존재한 적도 없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당장 수그러들었지.


드디어 노포의 가장 강력한 특징을 말할 때가 되었다. 쾌적한 바람이, 서울이 리스본과 동일한 위도 선상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여름 밤, 음식에 해박한 탐식자를 따라 나섰다. 문화 경험을 타인에게 소개하는 길에는 필시 위험이 따를 것이다. 우리는 독일 맥주 축제를 방불하는 을지로의 한 호프집에 갔다. 거기 주인은 우리가 주문한 노가리가 다 떨어졌다면서 반말로 먹태를 권했다.


주 메뉴가 떨어졌다는 게 저렇게 당당할 일이야? 나는 상한 김밥 같은 마음으로 친구에게 물었다. “저 분 알아?” “아뇨, 가끔 오긴 했어요” “그런데 왜 저렇게 막 대해?” 더워서인지 열 받았는지 맥주를 네 잔 거푸 마시자 방광이 터질 것 같았다. 화장실을 찾으니 친구가 주저했다. “여기 화장실 가지 마세요.” “왜?“ “너무 더러워요.” 교만이 지구 꼭대기면서 화장실은 우주 최악인 이율배반은 다른 데도 여지없었다.


어느 육회집 화장실은 변기가 없었다. 오직 바닥 중앙에 배수구 하나. 아무리 미니멀을 떠들어도 그 집을 이길 순 없을 것이다. 나는 주인에게 물었다. “남자는 그렇다 치고 여자는 어떡하나요?” 돌아온 대답은 어떤 고뇌도 없이 “다 알아서 하던데요?”였다. 그 주인에겐 손님들이 사육장의 암퇘지쯤으로 보인 게 틀림 없었다. 은밀한 개인적 행위를 멸시하고 본성을 거스르는 화장실의 폭력에도 불구하고 그 식당은 확장일로를 걸었다.


나는 식초를 너무 좋아해서 과장하면 식초로 목욕도 할 수 있다. 을지로의 그 골뱅이 집에는 식초 병이 없었다. 주인에게 가져다 달라고 했더니 팔짱을 끼며 권태롭게 대답했다. “우리 집은 식초 같은 거 안 써요.” 어쩌면 호기심이 생겼다. 무슨 굉장한 맛이길래?


그러나 식초 없는 골뱅이는 아무나 때리고 싶도록 밍숭맹숭했다. 섭섭한 마음에 맥주를 들이붓고는 주인이 일러준 대로 문밖 오른쪽 길로 들어섰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좁은 골목에 혓바닥 같은 도랑물이 유속도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 새 비가 왔나?” 노인처럼 읊조리며 뒷꿈치를 들고 화장실을 찾았다.


그때 내가 본 참상은 나훈아 노래처럼 ‘내가 사는 날까지 아니 내가 죽어도 영영 못 잊을’ 것이다. 오줌에 흠뻑 젖은 화장지 더미가 예루살렘 장벽을 넘는 좀비 떼처럼 화장실 네 귀퉁이를 타고 허리께까지 비스듬히 올라가고 있었다. 그 화장실은 천장이 너무 낮아서 그 안에 서서 일을 볼 수 없는 남자들이 밖에서 오줌을 갈겼다. 모든 남자가 그랬다. 그리고 문턱 밖으로 흐르던 오줌 홍수의 향연. 식초 ‘따위’를 쓰지 않는 자존심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화장실 한 번 청소할 줄 모르다니. 먹는 건 그렇게나 중하면서 싸는 데는 그렇게도 개차반인 건 차라리 유머 같았다.


손님에게 수프를 쏟았을 때 어떻게 할지 정확한 매뉴얼이 있는 영국 레스토랑을 한국 노포에 적용시킨다면 지나가던 사마귀도 웃겠지. 너무 조형적인 꽃꽂이와 동그랗게 말려선 한 번 닦고 바구니에 넣게 한 수건, 일회용 칫솔과 가그린이 마련된 일본 노포의 극단적으로 청결한 화장실을 얘기하면 누군가는 “그럼 그 나라에 가서 살던가” 이러겠지.


그러나 식당에서의 응대는 거기가 어디든 평등한 이들 사이의 대화일 것이다. 상대를 존중하고 서로 만족하는. 유럽식 위계의 요소가 눈에 띄는 프랑스 식당은 테이블 담당자가 서비스 받는 사람보다 우월한 형태를 보이되 요리의 세계로 이끄는 안내자의 역할이 더 크다. 미국의 서비스에는 평등, 소탈함, 사회적 유동성, 무엇보다 재미가 섞였다. 그러나 한국 노포의 최강 모델은 이것. 식당은 손님을 통제하고 손님은 식당에 굴종한다. 그렇다면 서빙하는 역할의 명예로움이란 서양식 잡소리일 것이다(예수는 왜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다”고 했을까.)


이런 풍경에는 조지 오웰의 맛이 났다. “너는 도살당할 줄 알면서 우리 농장에 왔어. 너는 특별한 개인이 아니라 버무려진 공동체야. 여긴 원래 이런 데고, 이건 다 네가 선택한 거야.” 어떤 때는 컬트 집단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정글의 왕처럼 명령하는 주인과 신경을 곤두세우고 나 좀 봐달라며 외치는 손님들. 그 위에 스피커보다 요란한 목소리들이 치고 받 듯 실내를 휘저으면 나는 면역력을 잃고 완전히 그로기 상태가 된다. 극도로 과민해진 불행한 아이처럼.


나는 반대되는 원리 사이의 균형을 생각해 보았다. 노골적인 무례와 사회적 자비심, 허용 가능한 친절과 제한선, 호기심과 모욕, 공감과 반발, 나의 시간과 타인의 시간, 지연된 만족감과 당장 필요한 것 사이의 균형을. 결국 나의 미숙함을 인정해야 했다. 오래된 가게가 이랬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순진한 판타지였다. 초탈한 현자의 삶을 카탈로그 삼아 바르게 살고 싶어도 일상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품위를 버리자고 서로가 조르는 이런 세상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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