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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렘브란트도 가난한 반 고흐도… 거울 속 자신을 쉼 없이 그린 이유

자화상과 모델비용


많은 화가들이 자화상을 그렸지만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자화상을 꼽으라면 반 고흐나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드는 데 주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화상이란 그 화가의 그림이면서도 화가 자신의 모습을 담고 있어서 그림의 가치가 곱절이 되는 효과가 있다. 특히 유명 작가의 경우는 소장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사실적이고도 인간적인

한국일보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된 렘브란트의 1633년 작 ‘황금 고리줄을 두른 자화상’(왼쪽 그림, 70.4×54㎝)과 1660년 작 ‘이젤 앞에서의 자화상’(111×85㎝). 렘브란트의 패기에 찬 젊은 시절과 우울한 노년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위키피디아

렘브란트(H. van Rempandt, 1606-1669)는 많은 자화상을 남겼다. 캔버스에 그린 것만도 50~60점이나 되며 종이, 판화, 데생까지 모두 합치면 100여 점에 이른다. 렘브란트는 화가로서 명성을 얻고 생활이 윤택해진 다음에도 계속 자화상을 그렸다. 왜 그렸을까? 그의 외모는 자화상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그리 잘생긴 외모는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도취로 그린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화가들은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주문을 받아서 초상화를 그렸다. 이 시절 초상화는 자신의 명예와 권위를 세상에 남기기 위한 도구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명예롭고 권위 있고 근엄하게 그려져야만 했다.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은 주로 돈 많은 귀족들이나 상인 계층의 신흥 부자들이 냈다. 지금 남아 있는 당대 초상화들이 왕족이나 귀족, 명망 있는 재력가의 집안 사람들을 수려하게 그린 작품 일색인 것은 이런 이유다.


이런 환경에서 초상화를 주문 받은 화가는 대상 인물을 자신이 보고 느낀 그대로 그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주문자 요구를 최대한 수용해 그림을 그려야 하기 때문이다. 직업상 왕이나 귀족을 수시로 그려야만 했던 궁정화가라면 고충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것이다.


렘브란트가 자화상을 계속 그린 이유는 역설적으로 아무도 주문하지 않은 그림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초상화를 통해서 어느 누구의 요구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상상력과 표현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그는 자화상을 그리면서 얼굴은 빛을 받는 것처럼 밝게 그리되 주변 배경은 어둡게 함으로써 명암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독특한 화풍을 완성하게 된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지극히 사실적인 동시에 지극히 인간적이다. 그림 속 얼굴 주름과 고뇌에 찬 듯한 눈빛 등에서 그는 자신의 내면까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추상화의 경지에 이른 자화상

좋은 자화상이란 그 자신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자화상이 진솔하게 표현되지 않았다는 것은 화가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렘브란트가 20대에 그린 ‘황금 고리줄을 두른 자화상’을 보면 젊은 시절의 패기와 자신감이 넘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말년에 그린 1660년 작 ‘이젤 앞에서의 자화상’은 초라한 노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모든 것을 다 잃고 희망마저도 포기한 듯한 그림 속 노인에게서 노년의 정신적 풍요나 여유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어떤 평론가는 이 작품을 두고 “무자비할 정도로 너무나 무정한 기록”이라고 평했다. 이런 냉정한 정직성 때문에 렘브란트가 ‘인간의 영혼을 그린 위대한 화가’로 평가 받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의 경우엔 초상화를 그려주고 돈을 벌고 싶었지만 그의 그림이 워낙 개성이 강하고 거칠어서 고객의 주문이 없었다. 돈이 없었으므로 모델을 불러서 초상화를 그릴 수 없었다. 자화상은 거울만 있으면 그릴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자신을 모델로 초상화 연습을 하였다. 그는 모두 35점이나 되는 자화상을 그렸다. 그 중에서 ‘귀를 자른 자화상’은 그의 기이한 운명의 이력을 한번에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이 작품은 반 고흐가 아를에서 같이 살았던 폴 고갱과 심한 다툼 끝에 헤어지고 나서 격정에 휩싸인 마음을 귀를 자르고서야 겨우 추스른 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 고흐는 “거칠더라도 영혼이 있는 인간의 삶을 그리겠다”고 말했다. 그가 그린 초상화들을 보면 닮은 것 같지 않은 데도 그 인물의 특징이 명징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그의 천재성이 표출된다. 대상과 닮게 그리는 것보다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생각이나 느낌을 드러내놓는 그림, 이것은 구상화가 아니라 추상화에 가깝다. 자화상 역시 마찬가지다. 거울을 들여다보고 자신을 그대로 그려낸 것이 사실화라면, 그리고 있던 당시의 슬픔이나 기쁨과 같은 감정을 선과 색으로 담아내고 보이지 않는 성품까지 그려낸다면 그것은 추상화로 변용된 초상화이다.

자화상을 그리는 결정적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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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귀를 자른 자화상’(1889), 개인 소장, 51×45㎝

거의 모든 화가들이 이처럼 자화상을 그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고객 만족을 위해서 그리는 초상화와는 달리 자화상은 모델의 주문이나 요구에 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화가에게 상당한 표현의 자유를 준다. 이 점이 화가들이 자화상을 즐겨 그린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즉, 초상화를 주문 받을 때 느끼는 여러 제약 조건으로부터 화가를 해방시켜준다. 둘째로, 인간의 다양한 표정 변화에 대한 그림 연습을 위한 모델로 자신보다 더 구하기 쉬운 모델은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유는 화가 자신이 모델이 되면 모델을 고용하는 비용이 전혀 들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즉, 모델료가 영(0)이다. 반 고흐처럼 경제적으로 가난하게 지내는 화가들이라면 모델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는 점이 더더욱 매력적일 터이고, 이것이 자화상에 몰입하도록 만드는 유인이 되었을 것이다. 자화상 습작은 비용을 들이지 않으면서도 예술적 화법을 발전시키는 일석이조의 방법인 셈이다.


“이 모델은 항상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정확하게 시간을 지키고 말을 잘 듣지요. 게다가 화가는 그림을 그리기 전부터 이미 이 모델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말은 19세기 파리 화단에서 활동한 앙리 팡탱 라투르(Henri Fantin Latour)가 한 말이다. 과연 이렇게 이상적인 모델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가 말한 그 모델은 바로 ‘그 자신’이다. 과연 자화상을 그리는 화가는 모델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팡탱 라투르의 말처럼 ‘원하는 포즈를 잘 잡아줄까’ 라든지 ‘비용을 많이 요구하지나 않을까’ 같은 걱정거리가 단번에 사라지게 된다.

수완 좋은 르누아르의 모델 고용법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1841-1919)는 모델 비용을 줄이는데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한 적이 있다. 그의 그림 가운데 당시 무도회의 흥겨움이 그대로 묻어나는 듯한 ‘갈레트의 무도회’(Le Moulin de la Galette)라는 작품이 있다. 당시의 몽마르트르는 밀밭이 남아있는 한적한 교외였는데 이곳 두 개의 오래된 풍차 사이에 지어진 야외 댄스장에서는 휴일이면 무도회가 열렸다. 그는 화면을 가득 채운 선남선녀들이 환하고 경쾌하게 춤추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이 갈레트 무도회장을 그리는 데에는 많은 등장인물들이 필요했다. 중요 인물의 모델은 친구나 잘 아는 지인이 맡아주어서 해결했지만, 정작 어려운 문제는 춤추는 젊은 아가씨들을 모델로 구하는 일이었다. 전문 모델을 쓰려면 많은 비용이 수반될 수밖에 없을뿐더러 르누아르는 모델보다도 실제로 춤추러 온 평범한 사람들을 그리고 싶어했다.


르누아르는 여성 심리를 아는 화가였다. 그는 패션에 민감한 젊은 여성들의 심리를 이용했다. 그는 모델이 되어주면 당시 한창 유행 중인 원뿔 모자를 공짜로 주겠다고 제안했고, 덕분에 모델을 하겠다는 여성들이 줄을 섰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해서 젊은 여자 모델에게 지불해야 될 비용을 절약할 수 있었다. 르누아르는 요즘 기업의 생존전략인 비용 극소화(cost minimization) 원리를 경험적으로 터득하고 있었던 셈이다.


르누아르가 ‘진짜’ 파리 노동자들이 흥겹게 여가를 즐기는 순간을 그리고 싶어했던 건 예술이란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그림 속 오른쪽 테이블에 앉아있는 신사의 모델이 된 평론가 조르주 리비에르(George Riviere)는 나중에 이 그림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파리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기록이다. 이런 작품은 르누아르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최병서 동덕여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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