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시 받던 ‘빠순이’, 이제 문학ㆍ드라마 주인공으로
방탄소년단 팬클럽 '아미' 회원들이 서울광장에서 열린 데뷔 2080일 축하행사에서 공연 영상을 보며 환호하고 있다. 뉴스1 |
“나는 연애 대신 달달한 팬질을 다시 시작했다. 거리감에 무력감에 울게 될 걸 알면서도 또다시 사랑에 빠졌다. 나는 영혼을 팔아서라도 그들을 보고 싶었고 더 가까이로 가고 싶었다. 그들은 별이고 꿈이었다. 꿈 없이 일상에만 갇혀 살아가는 내게 그들은 우주를 건네주었다.”
최근 출간된 박사랑 작가의 장편소설 ‘우주를 담아줘’는 30대 여성 세 명의 ‘덕질 라이프’를 다룬다. 세 주인공은 선생님과 중소기업 직원, 일본어 번역가로 일하는 번듯한 사회인이다. 이들은 사랑하는 아이돌의 영상을 끊임없이 돌려 보고, 콘서트에는 빠짐없이 ‘출첵’하고, 온갖 굿즈를 사 모으는 데 혈안이 돼 있는 ‘빠순이’다. ‘2n년(20 몇 년)간 빠순이로 살아가는 중’이라고 밝힌 작가는 “나를 이루는 것 중 어느 조각은 분명 오빠들의 손길이 닿아 있다”고 말한다.
아이돌이나 대중 스타의 열렬한 팬을 일컫는 빠순이를 소재로 한 문학 작품이 잇따라 선보이고 있다. 1990년대 아이돌 산업의 부흥과 함께 탄생한 빠순이는 ‘오빠 순이’의 줄임말로 나이 어린 팬과 여성 팬을 싸잡아 일컫는 멸칭이었다. K팝이 경제와 문화산업의 한 축이 되면서, 빠순이가 주류 문화 속 등장인물 자리까지 꿰차게 됐다.
최근 팬덤문화를 소재로 한 문학작품이 쏟아지고 있다. 박사랑 장편소설 '우주를 담아줘', 이희주 장편소설 '환상통', 차윤미 청소년소설 '반짝반짝', 김세희 장편소설 '항구의 사랑' (왼쪽부터) |
이희주 작가의 장편 ‘환상통’(2016)은 빠순이를 소재로 한 소설로는 처음으로 주류 문학출판사에서 주는 상(제5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을 받았다. 아이돌 그룹 멤버를 사랑하는 20대 여성 화자를 등장시켜 빠순이 당사자의 시선과 목소리를 담아냈다. 소설은 빠순이를 “지금도 길 위에서 사랑하는 이를 한없이 기다리는” “열렬히 사랑하는 존재”로 그리며 순문학에 팬덤 문화를 녹여낸다.
빠순이는 청소년소설 소재로도 안성맞춤이다. 차윤미 작가의 청소년소설 ‘반짝반짝’(2018)은 ‘고딩 빠순이’들의 성장기를 담았다. 입시와 공부에 매몰된 10대에게, 스타는 답답한 현실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게 해 주는 수단이다.
팬덤이 소설 소재가 되면서, 자연스레 열성 팬들끼리만 공유하던 문화가 소설에 등장하기도 한다. 문학동네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김세희 작가의 신작 장편 ‘항구의 사랑’은 ‘팬픽’이 10대 청소년에게 유행한 2000년대 초반이 배경이다. 남성 그룹 멤버들의 연애 관계가 주요 소재였던 팬픽, 이에 영향을 받아 여성 동성끼리 사랑을 나누던 ‘팬픽 이반’ 문화를 다룬다.
열성적 팬인 '빠순이'가 드라마의 주인공으로도 급부상했다. '그녀의 사생활'은 인기 아이돌의 팬인 30대 여성을, '응답하라 1997'은 90년대를 풍미한 아이돌그룹 HOT의 열혈 팬을, '맨투맨'은 팬클럽 빠순이 출신 매니저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tvNㆍJTBC 제공 |
문학뿐만 아니라 드라마에서도 빠순이는 주요 소재가 됐다. tvN 드라마 ‘그녀의 사생활’(2019)에선 아이돌에 푹 빠진 미술관 수석 큐레이터가, JTBC 드라마 ‘맨투맨’(2017)에선 열성 팬 출신 매니저가 주인공이었다. 아이돌 전문 웹진 아이돌로지의 미묘 편집장은 “과거에는 단지 어린 여성들의 취향이라는 이유로 부당하게 폄하됐다면, 최근 방탄소년단 등 아이돌 그룹이 남긴 가시적 성과를 통해 이를 뒷받침하는 팬덤 문화가 재조명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한 분야에 열성적으로 몰입하는 ‘덕후’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