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이 젊어졌다, '펜트하우스'에 열광하는 1030세대
드라마 '펜트하우스' 시즌2 속 배우 이지아는 시즌1과 시즌2에서 심수련과 나애교 역을 번갈아 연기한다. 이지아는 시즌1에서 장례까지 치러 죽은 줄 알았지만, 배역을 달리해 지난달부터 시작된 시즌2에도 계속 출연하고 있다. SBS 제공 |
서울 소재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김종민(가명)씨는 학교에서 '아싸(아웃사이더)'가 되지 않기 위해 SBS 드라마 '펜트하우스'를 챙겨 보기 시작했다. 김씨는 25일 "원래 드라마를 잘 안 본다"면서도 "하지만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워낙 아이들이 '펜트하우스' 얘기를 많이 해 소외감도 느끼고, '도대체 어떤 드라마기에' 하는 생각에 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입시 준비로 바쁜 고교 교실까지 '펜트하우스'가 파고든 것이다.
'오늘 우리 학교 음악쌤이 '펜하'에서 천서진이 부른 오페라 'Una voce poco fa(방금 들린 그대 음성)'를 불러주셨어요'.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라온 이런 글처럼 '펜트하우스'는 '막장'의 끝판왕이라 손가락질 받으면서도 교실에서 공공연한 '놀이'가 됐다.
'펜트하우스'는 19세 이상 시청가로, 넷플릭스에선 볼 수 없다. 요즘 10~30대 누가 TV로 '본방 사수'를 하냐는 것도 편견이다. '펜트하우스' 10~30대 평균 시청률은 10.6%로, KBS 주말극 '오케이 광자매' 4.7%보다 2배 이상 높았다. 본보가 시청률 조사회사 TNMS에 의뢰해 요즘 시청률이 가장 높은 두 드라마인 '펜트하우스' 시즌2(1~8회)와 '오케이 광자매'(1~2회·13일 방송 시작) 성·연령별 시청률을 조사해본 결과다. 시청률이 '오케이 광자매'(22.7%·둘째 주 기준)가 더 높은 것을 고려하면, MZ세대(1980~2000년대 초반)가 '펜트하우스'(21.0%) 본방 사수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다는 얘기다.
'펜트하우스'는 13년 전, '아내의 유혹'(2008)으로 '막장' 전성시대를 연 김순옥 작가의 작품이다. 김 작가는 불륜과 출생의 비밀 등 낡은 소재를 자극적으로 요리해 중년 시청자에 친숙하다. 어떤 세대보다 유행에 앞선 MZ세대는 어떻게 김 작가의 '펜트하우스'에 빠져들게 된 걸까.
'펜트하우스'를 본방 사수한다는 본보 대학생 인턴기자 세 명에 물었더니, 이들이 꼽은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①다른 드라마와 달리 쉴 틈 없는 전개 ②학교를 배경으로 공감을 키운 입시 비리 ③세련된 영상이다. '펜트하우스'를 학원물 트렌디 드라마처럼 즐기고 있는 것이다.
'막장 트로이카'라 불리는 김순옥 임성한 문영남 작가가 10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입시 경쟁 등을 다루기는 이번이 처음. 김유민(25)씨는 "방송 초기 '부부의 세계'와 비교가 많이 됐는데 '부부의 세계'는 솔직히 공감이 덜 돼 띄엄띄엄 봤다"며 "아무래도 진학 문제를 겪어봤던 터라 입시 경쟁 등 소재가 익숙했고 예술고를 다룬 건 새로워 막장이라도 '펜트하우스'에 더 공감할 여지가 많았다"고 말했다. 이규리(24)씨는 "어머니가 챙겨보시길래 우연히 한 회를 봤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몰아본 뒤 지금은 본방사수 중"이라며 "드라마의 편집이나 분위기가 '아내의 유혹' 등 기존의 막장보다 훨씬 트렌디하고 매회 사건이 터지고 전개가 빠르게 휘몰아쳐 쉬 질리지 않는다"며 웃었다.
MZ세대는 '펜트하우스'를 '막장' 대신 '마라맛'이라 표현한다. 극 중 주단태(엄기준)가 거슬리면 다 죽이려 들고 개연성이 '실종'된 걸 잘 알고 딱히 감동도 없지만, 그 자극적인 맛에 보고 또 본다는 게 공통적인 의견이었다.
MZ세대가 '펜트하우스' 주 소비층으로 떠오른 데는 막장의 진화(?)를 배경으로 한다.
"'펜트하우스'가 '아내의 유혹'이나 '왔다! 장보리', '언니는 살아있다' 등 김 작가의 전작들처럼 자극적인 것은 같다. 하지만 전작들의 전반적인 캐릭터 설정이나 소재가 전형적인 아침·주말드라마였다면 '펜트하우스'는 총 3개 시즌으로 구성된 일종의 서스펜스극이자, 저택 스릴러로 변모"(성상민 문화평론가)했다.
"'스카이캐슬' 같은 이야기의 고급미는 쫙 빠졌지만, 중세를 배경으로 한 (영국판 '펜트하우스'라 불리는) 넷플릭스 '브리저튼'처럼 제작 스케일이 커지고 화려한 영상으로 '미드' 느낌"(박진규 작가)을 주는 것도 달라진 변화다.
기승전결 내러티브 없이도 짧은 동영상을 즐기는 MZ세대는 기성세대보다 맥락 없는 콘텐츠 소비에 대한 저항이 덜하다. "TV뿐 아니라 OTT 등을 통해서 여러 막장을 접하다 보니 개연성 없는 건 이제 익숙해져 MZ세대가 이제 막장을 봐도 주단태의 '둘리' 노래처럼 '밈'(meme·온라인에서 화제가 되는 패러디물)으로 소비"(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한다. 이런 문화적 특성을 지닌 MZ세대가 스릴러와 화려함을 입은 소위 '젊어진' 막장에 빠져들고 있는 셈이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신현주 인턴기자 apple2609@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