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 한가운데에 서는 버스들... 정류장은 폼인가요
뷰엔
지난달 17일 오후 6시쯤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인근 정류장에서 퇴근길을 재촉하는 직장인들이 주행차선 한가운데 정차한 시내버스를 타기 위해 도로를 가로지르고 있다. |
지난달 27일 오후 7시쯤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인근 정류장에서 한 시민이 버스정류장 인근을 한참 벗어나 정차한 시내버스를 타기 위해 도로 위를 걸어가고 있다. |
지난달 13일 서울 서대문구 모처의 정류장에서 한 남성이 정류장을 벗어나 정차한 버스를 따라잡기 위해 보도 바깥 차도 위를 걸어가고 있다. |
퇴근길 서울 도심의 버스정류장은 버스와 승객, 오토바이와 택시가 뒤섞여 ‘아수라장’이 된다. 주행차로 한가운데 정차한 버스에 올라타기 위해 승객들은 도로 위로 달려 나오고, 그 사이를 오토바이와 택시들이 가로지르며 위험천만한 상황이 연출된다. 퇴근길 정체가 심한 중구 염천교 인근 정류장을 자주 이용하는 시민 조모(69)씨는 “버스를 탈 때마다 차도 한가운데를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일보 뷰엔(view&)팀이 지난 2주간 출퇴근 시간대 정체가 심한 서울 시내 버스정류장 20여 곳을 모니터해 보니, 시내 및 광역버스, 마을버스 등 종류를 불문하고 버스가 정류장 앞 ‘버스베이’에 완전하게 진입해 정차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반면, △주행 차선 한가운데에 정차하거나 △정류장에 한참 못 미친 곳에서 미리 문을 연 뒤, 정류장 정차하지 않고 지나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노인 등 거동이 불편한 보행 약자들은 미처 어찌해볼 도리도 없이 여러 대의 버스를 눈앞에서 놓치기도 했다.
지난달 17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인근 정류장에서 한 택시가 버스베이에 불법 주정차를 하고 있다. 차도에 나와 버스를 기다리던 한 시민이 그 앞을 지나며 위험한 상황이 연출됐다. |
숭례문 정류장에서 만난 20대 직장인 전모씨는 “차도 앞까지 안 나가고 정류장에만 서 있으면 버스가 그냥 지나쳐버리는 경우가 많다”며 “버스가 버스베이 내부로 충분히 들어오지 않다 보니, 승객들조차 차도에 쏟아져 나가 버스를 기다린다”고 말했다. 2016년 서울연구원에서 낸 ‘택시 버스 불편 민원 통계’에 따르면 서울 시내 버스 불편 신고 내용 중 ‘무정차 통과 및 승하차 전 출발’(56.9%)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했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시민 문모(33)씨는 "장애인들이 저상버스를 이용하려면, 버스들이 보도에 바짝 정차에 경사면을 펴주어야 하는데, 대부분 차도 한가운데에서 정차하니 버스를 기다리는 장애인들을 발견조차 못 하고 지나칠 때가 많다"고 말했다.
지난달 13일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 인근의 정류장에서 한 노인이 버스정류장을 한참 벗어나 정차한 마을버스를 타기 위해 힘겹게 걸음을 옮기고 있다. |
‘버스베이(Bus-bay)'는 차량 통행에 영향을 주지 않고 승객을 보도 가까이 안전하게 승하차시킬 수 있도록 설계된 교통시설로, 주행 차로와 정류장 사이에 버스를 정차할 수 있는 공간을 지칭한다. 승객의 안전을 지킬 목적으로 선진국 사례를 벤치마킹했지만, 국내에선 오히려 승객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경기연구원에 따르면, 지난 2015년 기준 경기도 내 시내버스가 버스베이에 제대로 진입해 정차한 비율은 30%에 불과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주행차로에 있던 차량이 버스베이를 이용해 추월하려다 발생한 안전사고도 적지 않았다.
지난달 27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인근 버스정류장 인근에 정차한 택시. 버스 기사들은 정류장 인근에 정차하는 택시들 때문에 정류장에 제대로 진입하기 힘들다고 하소연한다. |
1일 저녁 서대문구 경찰청 인근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60대 유모씨는 "버스 기사들이 자기 편의만 생각해서 차선을 벗어나지 않고 정차하려고 한다"며 "승객의 안전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버스 기사들에게도 이유는 있다. 배차 간격을 엄격히 지켜야 하다 보니, 충분한 여유를 두고 버스베이에 정차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출퇴근 시간 교통량이 많은 수도권이나 지방 대도시의 경우, 주행 차선에서 한번 벗어나면 다시 복귀하기가 어렵다. 다른 차들이 양보해주지 않기 때문인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장기화로 자가용 이용자가 급증하면서 이 같은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더구나 외국과 달리 국내 버스베이는 가속 및 감속 차로가 매우 짧아 차량 정체가 심한 시간대 버스의 진출입 자체가 쉽지 않다.
지난달 27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인근 버스정류장에서 한 시민이 버스에 올라타기 위해 도로 위로 내려와 있는 사이, 버스베이 사이를 질주하던 오토바이가 행인의 바로 옆을 아슬아슬하게 지나치고 있다. |
버스의 안전한 정차를 위해 만들어진 공간을 불법 주정차한 택시나 자가용이 차지하거나 오토바이가 곡예 운전을 하면서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시민 유모(26)씨는 “주행 차선에 걸친 채로 버스가 정차하면 혹시라도 지나가는 오토바이에 받힐까 봐 좌우를 유심히 살피게 내린다”고 말했다. 유씨는 또, “최근에 다리에 깁스를 한 채 버스를 타기 위해 차도를 가로지른 적도 있다"며, "버스 탈 때마다 노심초사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퇴근 시간대 직장인들은 버스 내 자리 사수를 위해 버스가 정차하기도 전에 먼저 도로로 내려와 줄을 선다. |
정류장에 제대로 정차하지 않는 버스가 대다수다 보니, 승객들이 차도로 내려가 버스를 기다리는 것이 습관처럼 굳어진 측면도 있다. 1일 종로구 광화문 인근 정류장에서 만난 시민 김모(33)씨는 “퇴근 시간대만 되면, 너도나도 차도 위를 뛰어다닌다”며 “넋 놓고 있다가 눈앞에서 버스를 놓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보니, 선제적 차원에서 버스로 돌진하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퇴근 시간대가 되면, 시민들은 주행차선 위에 버스가 도착하는 족족 이리저리 뛰어다니기도 한다. |
20대 시민 양모씨는 “오직 ’편의’만을 쫓아 노인이나 장애인과 같은 보행 약자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나쁜 관행이 자리를 잡았다”며 “버스 기사나, 승객 모두 ‘속도보다 안전’을 챙겨야 할 것 같다”고 지적했다. 울산광역시는 대중교통 이용자의 안전과 권리를 충분히 보장하기 위해 지난 7월부터 ‘버스 승하차 지침’을 마련했다. 버스의 승하차 가능 범위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이 없어 시민들 사이에서 논쟁이 인다는 지적이 일자 내놓은 해결책이다. 지침에 따르면 버스는 정류장 표지판과 승차대 기준 1m 이내 지점에 정차해야 하며, 정류소 내부와 인근에 사람이 전혀 없다는 점이 명백해야만 ‘무정차’ 통과할 수 있다.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서현희 인턴기자 sapiens0110@gmail.com
전윤재 인턴기자 younj070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