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곤 김우정 “혼인증서 박박 찢는 21세기 춘향을 만나자구요”
“소리가 객석 깊숙한 곳에 닿는다 생각하고 소리를 던져야지.” 국립창극단 신작 ‘춘향’의 김명곤(왼쪽) 연출의 설명에 춘향 역 소리꾼 김우정이 웃음을 터뜨렸다. 고영권 기자 |
사랑에 올인은 해도 목숨까지 걸진 않는다. 한낱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혼인증서로 마음을 살 순 없다며 그 자리에서 박박 찢어 버린다. 이별을 고하는 연인에겐 그 이유를 따져 묻고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맹세를 받아 내고야 만다. 우리가 알던, 고분고분한 춘향이 맞나 싶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정절이라니요. 봉건 사회 남자들의 욕망이 투영된 여성상을 답습해선 안 되죠.”(김명곤) “주체적인 춘향은 사랑 표현에도 적극적이에요. 춘향의 색다른 매력에 저도 반했답니다.”(김우정)
21세기 감성으로 다시 태어난 춘향이 14일부터 24일까지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무대에 오른다. 국립극장 70세 생일을 맞아 국립창극단이 선보이는 신작 ‘춘향’이다. 과거 국립극장장을 지냈던 배우 김명곤(68)이 극을 쓰고 연출했다. 춘향 역은 오디션을 통해 발탁된 신예 소리꾼 김우정(25)과 국립창극단 간판 소리꾼 이소연이 번갈아 연기한다. 지난 11일 김명곤과 김우정을 함께 만났다.
13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열린 국립창극단 신작 ‘춘향’ 프레스콜에서 춘향(김우정)과 몽룡(김준수)이 연기를 펼쳐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
김명곤은 알려진 대로 본인이 소리꾼이다. 명창 박초월(1917∼1983)을 사사하고 1993년 영화 ‘서편제’ 각본과 주연을 맡았다. 그렇기에 춘향과도 인연이 깊다. 1998년 국립창극단 최초 6시간짜리 완판장막창극 ‘춘향’을, 2000년 영화 ‘춘향뎐’ 각본을 썼다.
그래서 이번 작품을 쓸 땐 ‘현대화’에 방점을 찍었다. ‘지금 춘향이 남원에 산다면 어떤 사랑을 할까’라고 상상해 보는 일이었다. “‘춘향전’은 ‘햄릿’에 비견할 만한 고전이지만, 현대 관객들이 공감하지 못하는 설정이 많아요. 시대가 바뀌었다면 고전이 시대에 맞춰 변해야죠.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과감하게 손을 댔습니다.”
원작에서 춘향은 엄마 월매를 통해 건넨 몽룡의 혼인증서를 보자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하지만 새 춘향은 “이따위 문서에 목매지 않는다”며 거절한다. 과거 보러 가는 몽룡과 헤어질 때 구슬피 울지도 않는다. 그런 춘향이 편지 한 통 없는 몽룡을 하염없이 기다릴 리 없다. 김명곤은 시간을 과감히 압축했다. 5월 단오에 만난 춘향과 몽룡은 그해 가을 몽룡이 초고속으로 과거급제하면서 재회하도록 설정했다.
“춘향은 성 차별과 신분 차별에 굴하지 않는 도전적 여성, 몽룡은 가문의 압박에 고뇌하지만 출세지향적이지는 않은 자유분방한 청년으로 그렸어요. 그러니 둘의 사랑에 고난이 따를 수밖에요. 어떻게 보면 요즘 시대라 해도 찾기 힘든 순수한 사랑이죠.”
국립창극단 신작 ‘춘향’에서 춘향을 연기하는 신예 소리꾼 김우정. 국립극장 제공 |
김우정은 그래서 발탁됐다. 다소곳하고 얌전하다기보다 풋풋하면서도 쾌활하고 당찬 면모가 나와야 했다. 인터뷰 내내 내뿜는 밝은 에너지가 부족함이 없었다.
무대 위 김우정에게서 눈에 들어오는 건 감성 연기. 아니나 다를까, 사연이 있었다. “연기하면서 첫사랑을 많이 떠올렸어요. 남자친구가 사귄 지 얼마 안 돼서 군에 입대했거든요. 과거 보러 가는 몽룡처럼요(웃음). 춘향에게 저절로 감정 이입이 돼요.” 정작 본인은 ‘21세기 춘향’보다 ‘19세기 춘향’에 가까웠나 보다. “그래서인지 연습하면서 많이 울었다”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
소리에도 신경 썼다. 유수정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은 여러 춘향가 가운데 음악적으로 가장 섬세하다는 ‘만정제 춘향가’를 바탕으로 삼아 가사 전달이 정확한 ‘동초제’와 애절한 감성이 돋보이는 ‘보성소리’를 섞어 소리를 만들었다. ‘사랑가’ ‘이별가’ ‘옥중가’ ‘어사출두가’처럼, 춘향이라면 일반 관객들도 바로 떠올릴 법한 눈대목(주요 레퍼토리)을 중심으로 삼았다. 김명곤은 “눈대목은 따로 떼어 놓고 들어도 좋은 위대한 명곡”이라며 “베르디나 푸치니의 오페라 못지않게 아름답다”고 자부했다.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사설에 쓰인 옛 표현도 쉬운 우리말로 바꿨다.
김명곤 연출이 “김우정은 빼어난 소리와 연기력, 춘향에 어울리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하자, 김우정은 “김명곤 연출님처럼 모든 분야를 빨아들이는 소리꾼이 되고 싶다”고 되받았다. 고영권 기자 |
돌이켜 보면 김명곤의 예술 인생도 ‘파격’ 그 자체였다. 연극 영화 드라마를 아우른 명배우이면서 연극 극작에다 연출, 영화 각본, 후학 양성까지 경계 없이 누볐다. 국립극장장을 마친 뒤 노무현 정부에서 문화관광부 장관도 했으니 행정가 노릇도 제법 해 봤다.
지금도 무대는 쉬지 않는다. 얼마 전에도 연극 ‘흑백다방’ 무대에 올랐다. “오랜만에 땀을 쏟으니 시원하더라”며 좋아했다. 지난 2월엔 몇 년간 배워 온 이탈리아 성악 창법 벨칸토와 판소리의 만남을 주제로 한 공연도 했다. 스스로를 “장르 파괴자”라 부르는 김명곤은 “예술인은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장르에서 경험을 쌓고 도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덟 살에 판소리를 시작한 김우정도 김명곤의 그 길을 밟아 나가고 있다. 소리뿐 아니라 퓨전국악밴드 ‘조선블루스’의 보컬로 활동하면서 작사ㆍ작곡도 겸하고 있다. 지난해엔 케이블채널 엠넷의 예능프로그램 ‘너의 목소리가 보여’에서 자작곡 ‘작야(昨夜)’를 선보여 화제를 모았다.
“슬프고 힘들 때 곡을 쓰고 소리를 한다”는 김우정은 소리 그 자체가 마냥 좋단다. “소리에 한번 빠지면 서너 시간이 훌쩍 지나가요.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죠. 내 소리에 내가 미칠 때가 가장 행복해요.”
듣고 있던 김명곤이 흐뭇하게 말을 받았다. “그 맛에 예술 하는 거지요. 영화 ‘서편제’에다 제가 그런 대사를 썼어요. ‘지 소리에 지가 미쳐서 득음을 하면은 부귀공명보다도 좋고 황금보다도 좋은 것이 이 소리속판이여.’ 예인들은 평생 그 순간을 기다리며 사는 거예요.”
김명곤에게 ‘지 소리에 지가 미친’ 건 어떤 일이었을까. “괴테는 ‘파우스트’를 20대 때 구상해 80대에 완성했대요. 저도 그런 ‘불후의 명작’을 남겨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으니 아직 죽을 수도 없네요. 하하하.”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