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데뷔 ‘아몬드’ 작가 손원평 “절박해서 소설과 시나리오 썼다”
손원평 감독은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소설을 쓰고 싶지는 않다”며 “‘아몬드’의 영화 판권 문의가 들어오지만 아예 거부하고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그는 “청소년 소설 ‘아몬드’는 오랫동안 글의 형태로 머물며 아이들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
2016년 삼십 대 후반에 등단했다. 장편소설 ‘아몬드’로 창비청소년문학상을 받으면서다. 선천적으로 감정을 못 느끼는 소년을 다룬 ‘아몬드’는 25만부가 팔리며 베스트셀러가 되더니 해외 12개국까지 진출했다. 4월엔 일본 서점 직원들이 뽑은 서점 대상 번역소설부문상을 받았다. 이게 끝이 아니다. 장편영화 ‘침입자’로 감독 데뷔까지 한다. 소설가 겸 감독 손원평이 최근 이룬 눈부신 성과들이다. ‘침입자’의 개봉(6월 4일)을 앞두고 28일 오후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손 감독은 “힘들고 절박한 상황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말했다.
‘침입자’는 아내를 뺑소니 사고로 잃은 지 얼마 안 된 건축가 서진(김무열)의 가족에게 25년 전 실종된 동생 유진(송지효)이 돌아오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스릴러다. 싹싹하고 배려심 많고 요리까지 잘하는 유진은 서진의 부모와 딸에게는 예기치 못한 축복과도 같다. 하지만 서진은 지나치게 완벽한 유진이 꺼림직하고 불편하다. 자신 때문에 유진이 미아가 된 것에 대한 죄책감까지 작용하며 유진을 경계한다. 서진은 유진을 둘러싼 미심쩍은 일들을 좇다가 거대한 음모를 만나게 된다.
반전을 거듭하며 이야기를 전진시키는 ‘침입자’는 ‘아몬드’와 비슷한 시기에 잉태됐다. 2013년 손 감독은 출산 후 한해 동안 20편 가량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소설과 시나리오, 동화, 영화 시놉시스를 닥치는 대로 썼다. 산후조리원에서도 글을 붙들고 있었을 정도다. 그 글들 속에 ‘침입자’와 ‘아몬드’가 있었다. 손 감독은 “결혼과 출산을 거치며 제가 창작자로 일을 이어갈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고, 절박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20대만 해도 자신감이 넘쳤다. 손 감독은 서강대에서 사회학과 철학을 전공한 후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영화아카데미 졸업작품으로 단편영화제에서 상을 받았고, 시나리오 공모전에 시놉시스가 당선됐다. 영화아카데미 졸업 직후 연출 제의를 받기도 했다. 연출부 활동을 거쳐 감독 데뷔를 준비했으나 그 뒤부터 뭔가 꼬이기 시작했다. 틈틈이 단편영화를 찍으며 장편 시나리오 3,4편을 썼지만 영화화 되지 않았다. “10년 동안 뭘 해도 안 되는 시기”를 보내야 했다. “3년 가량은 극장에 가지 않을 정도”로 힘들었다. “이 세상이 날 필요로 하지 않는데, 어디선가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게 너무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동향 파악용 아니면 한국 영화는 거의 안 보고 소설은 외국 것만 읽었는데 그러면서도 계속 (소설과 시나리오를) 쓰는” 시절을 거쳤다. “입사시험에 계속 떨어지는 꼴이었어요. 취준생 신분으로 취업한 친구들 질투하고 그러면서도 취업 준비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던 거죠. 저는 소설가와 감독이 특별하다 생각하지 않아요. 일의 모양이 다를 뿐 여느 직업인들과 마음이 똑 같으니까요.”
손원평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 '침입자'는 25년 전 실종됐던 동생이 집으로 돌아오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스릴러다.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
원래 시네 키드는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 꿈은 막연하게 작가였다. 스무 살 때부터 매년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글쓰기에 대한 교육을 딱히 받은 적은 없다. 대학 4학년 2학기 때 과제를 위해 읽은 ‘미술관 옆 동물원’ 시나리오가 진로를 바꾸었다. “너무 매력을 느껴서” 시나리오 작가가 되기로 마음 먹었다. 영화 매커니즘을 알고 싶어 영화 제작 워크숍에 참여했고, 영화주간지 씨네21 영화평론 공모에 응모해 당선됐다. “영화 초보들끼리 밤새서 이야기하고 영화를 만드는 것에 반해” 감독 지망생이 됐다. 영화를 하면서도 신춘문예에 응모했고, 최종심에 든 적도 있다. 손 감독은 “영화와는 별개로 혼자 글을 써서 완성하자는 열망이 제 안에 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영화와 소설, 두 서사영역에서 재능을 꽃피우고 있는 손 감독은 “둘 다 안 하면 살 수 없는 삶”이라면서도 “글쓰기가 너무 괴롭고 싫다, 영화는 징글맞게 힘들다”고 했다. “대부분의 순간이 고통이지만 잠깐 반짝이는 희열 때문에 일한다”고도 했다. “봉준호 감독님이 그런 말씀하셨잖아요. 영화인들은 영화를 안 찍으면 살 수 없는 병에 걸려 있다고요. 예전에는 아무도 소설이나 시나리오 써달라고 하지 않는데도 괴로워하며 썼어요. 제가 그럴 수 밖에 없으니까 그랬던 듯해요.”
손 감독은 손학규 전 민생당 선거대책위원장의 둘째 딸이다. 유력 정치인 아버지에게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묻자 그는 “이렇게 밖에 답을 못 드린다”고 말했다. “영화는 여러 사람이 함께 해 만드는 것인데, 저 개인의 이야기보다 영화 자체가 관객에게 좋게 다가갔으면 하는 바람뿐입니다.”
손 감독의 다음 행보는 연애소설이다. “네 남녀의 잔잔한” 이야기다. 7,8월 중 출간된다. 곧 동화도 쓸 생각이다. “동화를 쓸 때만큼은 재미있는 것 같아요. 순수하게 책 좋아했던 시기로 돌아가는 기분이기도 하고요.”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