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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m 지하 막장’ 쥐떼 덤빌까…천장에 도시락 매달아둔 광부들

[2020 노동자의 밥상] ⑮태백 광업노동자들의 ‘도시락’

발파 때마다 찾아오는 죽음의 공포

탄가루 날리는 새카만 어둠 속

화약 터지고 발밑이 흔들릴 때면

베테랑 광부 마음도 ‘두두두’ 요동

5평 남짓 휴게실에서 마시듯 한 끼

아침 먹고 남겨놓은 도시락 식사

부족한 점심은 컵라면으로 때워

“땀 많이 나서…싱거우면 잘 안넘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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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은 살아 있다. 빛 대신 시커먼 어둠이, 공기 대신 잿빛 먼지가 가득한 지하 600m 깊이의 구덩이는 금방이라도 광부들을 집어삼킬 듯했다. 광업소 노동자들이 ‘약’(화약)을 찔러 넣고 터뜨릴 때마다, 땅은 끊임없이 요동친다. 지난달 25일 ‘선산부’ 김종수(59)가 그 지옥 같은 땅끝에서 발파 작업을 준비하는 동안 150m 후방의 ‘후산부’ 김대광(58)은 근심스러운 듯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발파는 늘 죽음과 이웃한다. 15년 막장 생활에도 익숙해지지 않는 공포다. 두두두, 발밑이 울릴 때 김대광의 심장도 두두두, 뛰었다.

하루 2m씩, 더디 전진하는 막장의 삶

강원도 태백의 광업노동자 김대광은 매일 아침 7시면 일터인 장성광업소에 도착한다. 8시30분 갱도에 들어갔다가 오후 3시께 나와서 씻고, 4시에 퇴근한다. 그가 속한 ‘수3 크로스’ 막장에서 채탄을 준비하는 채준조엔 김종수를 비롯한 선산부 둘, 김대광을 비롯한 후산부 둘, 보조공 하나가 속해 있다. 선산부는 선두에서 작업하는 이, 후산부는 후방에서 작업하는 이를 일컫는다. ‘갑방’인 김대광과 동료들이 나오면 ‘을방’인 오후반 광부들이 4시부터 밤 11시까지 석탄을 캔다.


역설적이지만 수3 크로스 막장은 해발 0m다. 장성광업소의 고도가 해발 600m인 탓이다. 입구에서 600m 깊이의 수직갱도(수갱)를 1분30여초 승강기를 타고 내려가 겨우 해발 0m에 도착한다. 수갱에서 막장까진 다시 10분 넘게 걸어야 한다. 눈과 코를 빼곤 모두 잿빛 작업복과 랜턴, 안전모, 분진 마스크, 복면, 장갑, 장화로 가린 채 수3 채준조는 막장으로 향했다. 손에는 도시락이 든 검은 봉지 하나, 갈아입을 옷 한벌이 든 가방 하나가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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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은 매일 2m씩 전진한다. 갑방이 1m, 을방이 1m를 파낸다. 막장 앞을 단단하게 막아선 석탄을 뚫는 일이 우선이다. 선산부들이 석탄에 구멍 30개를 뚫어 나무젓가락만한 약들을 찔러 넣고 발파하면 산산조각 난 석탄이 막장 바닥 가득 깔린다. 후산부들이 함께 나설 차례다.


겨우 1m를 전진하지만, 반나절 만에 30톤 넘는 석탄을 채굴하려면 손발이 척척 맞아야 한다. 석탄을 퍼내는 삽(스크레이퍼)만 해도 사람 몸통만하다. 김대광이 몸무게를 실어 스크레이퍼를 누르면 동료가 ‘마끼’(도르래와 밧줄로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는 기계)를 작동시킨다. 이렇게 해서 막장을 전진시키면, 다음 순서는 ‘동발’을 설치하는 일이다. 머리 위 갱이 무너지는 걸 막으려 세우는 아치 형태의 동발은 막장의 척추다. 동발이 무너지면 막장도 무너진다. 무게 150㎏의 동발을 50㎝ 간격으로 두개 세우면 김대광이 속한 채준조의 일과가 끝난다.


막장에서 방심은 곧 사고다. 1천명당 산업재해자 수를 따지는 천인율에서 탄광노동자는 2017년 기준 169.39‰이다. 임업(13.58‰), 건설업(8.42‰), 제조업(6.10‰) 등을 압도한다. 선산부 김종수도 갱도를 파다 아이 머리통만한 돌덩이에 다리를 찍혔다. 4년을 쉬었다. “이건 소리도 없이 위에서 바로 때리니까 방법이 없지.”


사고가 없어도 생명이 갈려나간다. 대부분의 광부는 폐기종 같은 폐질환을 앓고 있다. 찜통 같은 더위도 광부들의 노동에 어려움을 보탠다. 한겨울인 이날 갱내 온도는 28도였다. 갱도 중간에 트럭만한 선풍기를 두대 두고 바람통을 통해 공기를 순환시켜도, 지열은 인간의 접근을 막으려는 듯 펄펄 끓는다. 채탄 작업 뒤 작업복이 흠뻑 젖은 김대광은 “그나마 여긴 시원한 막장”이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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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를 피해 탄가루 묻은 밥을 떠 넣는 점심

탄가루 날리는 이 시커먼 어둠 속에도 한줌의 휴식은 있다. 갱 천장에 방수막을 둘러 만든 5평(16.5㎡) 남짓한 공간을 광부들은 ‘휴게실’이라고 부른다. 막장에서 걸어서 5분가량 떨어진 곳이다. 4인용 식탁 넷, 기다란 의자 여덟개가 마련된 휴게실에서 이들은 도시락을 먹는다. 천장의 방수막이 돌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걸 막아준다.


광업소 구내식당에서 준비해준 도시락은 고리에 걸어 천장에 매달아둔다. 식탁에 놓으면 광차에 끼여 여기까지 내려온 쥐들이 죽자 사자 먹어치우는 탓이다. 가끔은 공중에 매단 비닐봉지 안에서도 쥐가 바스락댄다. “쥐가 어마어마하게 따라오거든.” 검댕 묻은 얼굴에서 벗어낸 마스크를 툭 내려놓으며 김대광이 말했다.


의자에 앉은 김대광이 검은 봉지에 든 스티로폼 도시락 뚜껑을 열자 반쯤 남은 흰밥이 드러났다. 온통 시커먼 탄광에서 홀로 새하얀 쌀밥 옆에는 무생채와 김치, 오이, 진미채 따위의 먹다 만 밑반찬들이 조금씩 놓여 있었다. 출근이 이른 탓에 아침밥 역시 입갱 직후 이 휴게실에서 먹기 때문이다. 절반의 도시락으로 부족한 점심은 컵라면으로 때운다. “특히 간이 세면 좋아요. 땀으로 많이 배출되니까 싱거우면 잘 안 넘어가거든.”


밥과 무생채, 라면과 국물을 도시락에 붓고 섞어 건더기를 건져 먹던 김대광은 성에 차지 않는지 남은 국물과 찬을 그대로 후루룩 마셨다. “오후 3시까지 일해야 하는데, 이래 먹으면 살 거 같지.” 석탄이 묻어 거뭇해진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며 그가 말했다. 그렇게 하루 두끼를, 김대광과 동료들은 지하 600m의 갱 속에서 탄가루와 함께 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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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가는 탄광촌 지키는 광부의 아들들

이 땅밑 세계를 피하려 김대광은 지독히 노력했다. 그러나 운명은 쥐보다 끈덕지게 김대광을 따라왔다. 고향 태백에서 광부의 아들들은 대개 광부가 됐다. 김대광의 아버지는 광부였다. 밤이면 검어진 얼굴의 아버지가 곡괭이를 들고 들어서는 걸 보며 김대광은 광부만은 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결심대로 광부의 아들은 경영학을 공부하고 건설회사에 들어가 지상 높은 자리에 올랐다. 태백에 있는 웬만한 건물은 대개 김대광의 손이 닿았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로 회사가 고꾸라지면서 돌고 돌아 탄광으로 돌아왔다. “난 진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니까요. 그런데 때가 되니까 크게 고민할 게 없었어. 길은 딱 정해져 있으니까….”


막다른 길에 몰린 43살의 김대광은 막장에서 인생을 다시 시작했다. 15년 동안 석탄을 캐며 막장에서 번 돈으로 세 아이를 대학에 보냈다. 빚도 모두 갚았다. 김대광이 막장에서 희망을 캐는 사이, 석탄산업은 쪼그라들었다. 석탄산업 합리화정책으로 탄광 300여곳이 문을 닫았고, 이제는 장성광업소를 비롯한 4곳의 탄광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개광 이래 9300만톤의 석탄을 채굴해 온 나라를 밝혔던 장성광업소의 시대도 저물고 있다. 전성기였던 1980년대 5천명이 넘었던 이곳의 ‘산업전사’들은 420명 정도로 줄었다. 신규 인력 채용이 중단돼서다. 일손이 부족해 안전마저 위협받는 형편인데도 말이다. 지난해 장성광업소에서도 가스 연소 사고로 노동자 한명이 숨졌다. 잊을 만하면 ‘폐광설’이 나돌고, 지역은 흉흉해진다. 광부의 아들들은, 자신들이 막장을 캐는 마지막 세대임을 직감하고 있다. 그럼에도 괘념치 않고 오늘도 묵묵히 막장을 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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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부로 저물어가는 자신과 함께 저물어갈 탄광촌의 운명을 지켜보는 김대광의 마음은 그저 헛헛하다.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칠흑 같은 막장에서 그는 어떤 것이든 언젠가는 저물고 만다는 진리를 받아들인 듯 담담히 말했다. “겁낼 일은 아니에요. 다부지게 넘어가야지요.” 아버지처럼 검은 얼굴을 한 광부의 아들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태백/글 전광준 기자 light@hani.co.kr, 사진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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