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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동안 부역자들 씨 말리겠다며 젖먹이까지 끌고 갔다

[6·25전쟁 70년] 학살, 잠들지 않는 기억


1951년 ‘아산 부역혐의 학살사건’

일제 폐탄광서 쏟아진 비녀·구슬…

발굴 유해 대다수가 여성·어린이

아산·천안 곳곳에 ‘보복살해’ 흔적

한겨레

2018년 봄 충청남도 아산 배방읍 설화산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지에서 어린이 장난감으로 보이는 구슬이 발견됐다. 이곳에서는 6·25전쟁 당시 사망한 208명의 여성과 아이 등의 유해가 발굴됐다. 주용성 사진작가 제공

70년 전 한반도는 적의로 가득 찬 생지옥이었다. 적의 가족이기에 또는 적을 이롭게하거나 동조할 수 있다는 우려만으로 학살이 이뤄졌다. 전세가 역전되자 반대편에서 보복에 나섰다. 피해는 남녀노소 구분이 없었고, 친척끼리도 총부리를 겨눴다. 그런 야만의 세월 동안 이뤄진 민간인 학살로 최소 1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념 차이에서 시작한 한국전쟁은 사실 거대한 보복전쟁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아 <한겨레>는 수많은 민간인 학살 가운데 덜 알려진 여성과 아이들이 희생된 사건에 주목했다. 참혹했던 사건과 함께 유해발굴사업 현주소, 2기 진실·화해위원회의 역할과 올바른 과거청산 해법 등을 2회에 걸쳐 싣는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

구슬과 비녀.

아이들이 죽던 겨울은 많은 눈이 내렸다. 1951년 1월이었다. 동네 친구들과 구슬치기를 하던 아이들이 엄마 손에 이끌려 폐탄광 부지까지 왔다. 겁을 먹은 아이들은 차마 울지 못했다. 온양경찰서 소속 경찰과 치안대의 엠(M)1·카빈이 200여명의 주민들을 향해 불을 뿜을 때, 엄마들이 아이들을 치마폭에 감쌌다. 아이들은 구슬을 손에 꼭 쥔 채 엄마와 함께 죽었다. 아이들은 사회주의가 뭔지 알지 못했다. 엄마와 아이들이 죽은 자리에서 비녀와 구슬이 발굴됐다. 이들은 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충남 아산시 배방읍 중3리 마을회관에서 20분 넘게 풀숲을 헤치고 도착한 야산 중턱. ‘부역혐의 사건’이라는 철제 표시판 하나가 이곳이 민간인 학살 현장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른바 아산지역 부역혐의 학살사건이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조사단’은 2018년 2월 말부터 4월 초까지 이곳에서 한국전쟁 당시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유해 208구를 수습했다. 조사 결과 어른 150명의 유해 중 131구(85%)가 여성이었고, 58구가 어린이 유해였다. 부녀자들이 착용한 (은)비녀 89점과 어린이 장난감, 학살에 사용된 M1·카빈총 탄피도 다수 발견됐다.


발굴 작업에 참여한 홍수정 4·9통일평화재단 조사실장이 주변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제 때 폐탄광 구덩이에서 수십구의 유골이 뒤엉켜 발견됐고, 예쁜 은비녀와 꽃단추, 아이 신발 등도 함께 나왔어요. 다른 유해발굴 현장에서는 건장한 남성 유골이 대다수인데 이곳에선 여자와 아이들의 유골이 주로 발견돼 현장 관계자들도 많이 놀라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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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 배방읍 설화산 폐탄광터에서 발견된 은비녀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제공

지난 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아산지역 부역혐의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실규명 결정을 했다. “1950년 9월 말부터 1951년 1월 초까지 김석남(金石男, 사건번호 다-117) 등 최소 77명 이상이 인민군 점령시기 부역했다는 혐의와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온양경찰서 소속 경찰과 치안대(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및 향토방위대, 태극동맹)에 의해 배방면 남리 배방산(성재산) 방공호, 배방면 수철리(세일) 폐금광, 염치면 대동리(황골) 새지기, 염치면 산양1구(남산말) 방공호, 선장면 군덕리 쇠판이골, 탕정면 용두리1구 뒷산, 그리고 신창면 일대 등에서 집단살해되었다.” 발굴된 유해는 진실화해위의 조사 결과보다 실제 피해가 더 컸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아산과 천안 일대의 민간인들이 설화산으로 끌려와 집단학살됐다. 주변 마을과 거리가 떨어져 있어 학살 행위가 잘 드러나지 않고, 폐탄광 부지에 많은 구덩이가 파여 있어 주검을 묻기 쉬운 장소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홍남화 전 민족문제연구소 아산지회장은 “진짜 부역 활동을 한 남성들은 다 도망간 뒤 남은 부인과 가족들만 억울하게 희생된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학살 현장”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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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재씨가 설화산 민간인 학살 사건의 피해자 유해가 발굴된 터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옥기원 기자

이 마을에 평생 살았다는 임현재(84)씨는 “어머니와 살던 예전 집이 폐탄광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서 줄줄이 고개를 숙이고 걸어가는 여자와 아이들의 모습을 봤다”며 “한참 뒤 총소리가 빗발쳤고 군인들이 줄줄이 내려오는 소리가 들릴 때 어머니와 나는 겁에 질려 불을 끄고 이불 속에 숨어 있었다”고 말했다. “수년이 지난 뒤 소 먹일 풀을 베러 뒷산에 갔을 때 흙더미에서 쏟아지는 사람 유골을 보고 놀랐던 기억도 있고, 동네 개가 뒷산에서 사람 뼈를 물고 온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아산지역 부역혐의 학살사건의 시작은 1950년 9월27일이었다. 인민군이 퇴각하자 충남 아산 염치면(현 염치읍)에는 대한청년단, 태극동맹 등 우익단체를 중심으로 마을 치안대가 급조됐다. “부역자들의 씨를 말리겠다”며 동네 주민들을 불러 모은 치안대는 낫과 삽 등을 이용해 부역 혐의자와 가족 등 80여명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학살은 3일 동안 계속됐다. 시신들은 마을 공동묘지에 묻혔다. ‘새지기 부역혐의자 학살사건’이었다. 군경이 아산 지역에 배치된 시점은 10월1일이었다. 치안 부재의 상황에서 주민들에 의한 사적인 집단살해가 벌어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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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당시 학살당한 피해자 후손과 이들의 좌익 혐의를 밀고하고 살해하는 데 앞장선 가해자 후손이 집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살고 있다. 전쟁 이전에는 두 집터와 주변 땅 모두가 피해자 가족 소유였지만, 가족이 몰살당한 뒤 대부분의 땅을 가해자 가족이 빼앗았다. 옥기원 기자

당시 사건을 목격한 마을 주민 이아무개씨는 2008년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희생자들은 젖먹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줄 세워져 마을 공동묘지 새지기로 끌려갔다. 죽이려고 가는 사람보다 죽으러 가는 사람들이 더 많았는데도 아무도 반항하지 못했다. 끌려가던 중 젖먹이를 업은 여자아이가 무성했던 콩밭으로 몸을 굴려 숨어 있다가 살아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끔찍한 상황에서 살려고 하니까 젖먹이조차도 울지 않아 들키지 않고 용케 살았다. 끌려간 사람들은 애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죽을 만큼 몽둥이에 맞은 다음 구덩이에 던져져 흙으로 덮어졌다. 미처 숨이 끊어지지 않은 사람들은 꿈틀거리며 생매장되었다.” 처형과 상관없는 주민들은 희생 장소로 몰려가 구경했다고 한다.


새지기 사건은 부역자 처벌이 표면적 이유였지만, 내막에는 집성촌 내 친척 사이의 구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치안대는 홍사학씨가 부역을 했다는 이유를 들어 3대에 걸친 대가족 14명을 살해했다. 학살 주도자는 홍사학씨와 같은 홍씨 집안의 홍○○ 홍○○ 형제로, 동생은 인민군 점령기에 좌익 쪽에서 활동하다가 9·28 수복 직전 우익으로 전향해 좌익 혐의자를 체포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이들 홍씨 형제는 당시 마을 유지였던 홍사학씨 집안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홍사학과 그의 가족을 집단살해한 홍씨 형제는 홍사학의 남은 집과 땅, 세간살이를 모두 차지했다. 이때 마을의 채씨와 이씨 가족 수십명도 마을 공동묘지에서 몰살당했다.


“세상이 언제 또 바뀔지 알고 그런 걸 말해.” 목격자인 이아무개(87) 할아버지는 70년 전 사건에 대해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사소한 감정으로 수십명의 일가족이 죽임을 당했던 그 미친 세월에 대해 말하는 것은 또다른 원한의 씨앗을 키우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학살을 자행한 가해자들은 모두 숨졌지만, 가해자 후손과 일부 살아남은 피해자 후손들이 지금도 한마을에서 마주 보고 살고 있다. 홍사학씨와 같은 문중인 홍남화 전 민족문제연구소 아산지회장은 “전쟁이 만든 좌우익의 갈등이 하루아침에 일가족을 몰살하고 친인척을 원수로 만들었다”며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지만 다시는 이런 아픔이 재발하지 않게 진실이 규명되고 기록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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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홍수정 4·9통일평화재단 조사실장이 한국전쟁 당시 마을 주민 간 학살이 자행된 충남 아산시 염치읍 새지기의 유해 매장지 일대를 설명하고 있다. 옥기원 기자

새지기 사건은 홍사학씨 양자 홍민선(74)씨가 2006년 진실화해위에 진상규명을 신청하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지난해 5월엔 유해발굴공동조사단이 발굴 작업도 진행했다. 당시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박꽃님씨는 “마을 주민들 간의 갈등이 남아 있어 주민 중 누구도 유해가 매장된 장소나 당시 상황을 말해주지 않아 발굴팀이 매우 고생했다”며 “유해 발굴 추정지가 마을 공동묘지와 밭으로 사용되면서 유해들이 많이 훼손돼 예상보다 적은 수의 유해가 발견됐다”고 설명했다. 발굴팀은 한달 남짓의 작업 끝에 훼손 상태가 심한 팔, 허벅지뼈 일부를 찾았고 조사 결과 한국전쟁 당시 사망한 7명의 유해인 것으로 판정됐다.


아산 지역의 유해 매장지는 8곳으로 추정된다. 이 중 배방읍 설화산과 탕정면 용두1리, 염치읍 새지기 등 3곳만 발굴이 진행됐다. 염치읍 새지기에선 7명의 유해가 발굴됐지만, 탕정면 용두1리에서는 도로 공사 등으로 일대가 훼손돼 유해가 발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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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 배방읍 설화산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지에서 한국전쟁 당시 사망한 수십구의 유해가 발견됐다. 주용성 사진작가 제공

하지만 배방읍 성재산같이 유해가 나올 가능성이 있는 현장도 남아 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김희열(85) 할아버지는 “북한군이 시켜서 (성재산에서) 방공호를 팠고, 국군이 아산을 수복한 뒤 그곳에 많은 사람이 묻혔다. 부역혐의자들이 줄줄이 잡혀가는 모습을 보고 총소리도 들었다”고 증언했다.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누리집에 게시된 ‘아산 부역혐의 사건’ 보고서에도 “성재산 방공호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고, 이를 목격했다”는 다수의 증언이 담겼다.


잔인했던 학살의 흔적은 70년이란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끌려온 사람들이 학살된 공동묘지는 수풀이 무성했고, 부역혐의자들을 파묻었다는 폐탄광 구덩이들은 모두 유실돼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을 입구 팔각정에서 만난 주민들은 “동네 뒷산에서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항상 마음이 불편했는데, 유해를 발굴하고 위령제를 지내서 이제야 마음의 짐을 조금 덜었다”고 말했다.


홍남화 전 지회장은 “당시를 증언할 수 있는 어른들이 몇명 살아 계시지 않아 진실을 규명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며 “더 늦기 전에 이념 학살의 아픈 역사를 규명하고, 억울하게 죽어간 유해들을 발굴하는 것이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한 토대”라고 강조했다.


아산(충남)/옥기원 기자 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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