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의 역사가 아닌 고통과 죄책감까지 이야기한 드라마”
[토요판] 남지은의 토요명작 리플레이
③ 모래시계
1995년 39일간 24부작 파격 편성
5·18 등 금기시되던 현대사 조명
최고 64.5% 찍으며 시청률 폭발
민영방송 SBS 성공적 개국 이끌어
강우석 검사 역 박상원 인터뷰
“오늘 내 인생 방향 제시해준 드라마
모든 감정 쏟은 태수 사형 신 못잊어
우석 같은 검사 어느 직업이나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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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박태수(최민수)를 사형시킬 수가 있어요!”
지난 4일 서울 남산예술센터.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강우석 검사를 연기한 배우 박상원을 만나자마자 울분부터 토해냈다. 정치깡패 짓을 한 죗값은 달게 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사형을 당하기에는 너무 억울하지 않나. 카지노 사업에 뛰어든 박승철(김진해) 회장을 죽인 건 이종도(정성모)의 단독 소행이지 태수와는 상관이 없잖아. 태수가 세력을 키운 건 맞지만 윤재용(박근형) 회장의 재산이 욕심나서가 아니다. 그는 그저 “그렇게 하면 널(윤혜린·고현정)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다시는 힘이 없어서 내 여자를 뺏기고 싶지 않았으니까!” 살인 지시에 온갖 비리를 저지른 국가안전기획부 강동환(김병기) 실장도 겨우 4년형인데, 태수가 사형이라니. 그것도 태수의 천성을 잘 아는 친구 우석이 어떻게!
“하하하하하. 당시에도 설왕설래했어요. 시청자들이 싸우고 그랬죠. 중고등학교에선 우석파, 태수파로 나뉘었어요. 우석을 지지하는 이들은 수긍했지만, 태수파들은 ‘왜 사형이야 나쁜 놈’ 했죠. 팬레터를 받으면 그런 이야기들이 많았어요. 그때 받은 편지들은 아직도 다 갖고 있어요.” 그는 “드라마에서 한 인물의 죽음만큼 극적인 건 없다”고 말했다.
어떻게 태수를 사형시킬 수가
1995년 1월9일부터 2월16일까지 24부작으로 방영한 <에스비에스>(SBS) 드라마 <모래시계>는 바로 이 ‘태수의 사형’이 예나 지금이나 시청자의 가슴을 후벼 팠다. 누구는 슬퍼서 잠 못 잤고, 누구는 법망을 피해 가는 권력자들을 보며 치를 떨었다. 24부가 진행되는 동안 애써 눌러왔던 분노는 사형당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일제히 터져 나왔다. “금방 끝날 거야”(우석) “나 떨고 있냐”(태수) “아니”(우석) “그게 겁나… 내가 겁날까 봐”(태수) “너… 괜찮아”(우석). 담담한 척하지만 두려움이 새어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며 시청자들도 함께 비장해졌다.
박상원은 25년 전 그날도 그랬다고 회상했다. “세트가 아니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했어요. 진짜 사형장에서 찍었죠. 장소가 장소인 만큼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요동쳤어요. 오래 준비한 <모래시계>는 재촬영을 반복하며 장면의 완성도를 높여왔는데, 이 장면만큼은 도저히 그런 방식으로 찍을 수 없겠더라고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 감정이 닳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한 번에 충분히 쏟아냈죠. 지금도 그날이 잊히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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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년 짧은 생을 불꽃처럼 살다 간 태수의 삶처럼 <모래시계>도 짧고 굵게 머물렀다. 이 드라마는 단 6주간 방영했다. 한달 반. 보통 드라마가 월화 혹은 수목처럼 일주일에 두번, 3~4개월 정도 선보였다면 <모래시계>는 월화수목 나흘간 집중 편성됐다. 한국 드라마 사상 최초였다. 경쟁작이었던 <문화방송>(MBC) 수목드라마 <아들의 여자>의 독주를 막고, 서울·수도권에서만 전파를 탔던 채널의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던진 승부수였다. 각자가 옳다고 믿는 길을 질주했던 인물들처럼 드라마도 거침없이 나아갔다. 1회 시청률 30.7%로 시작해 5회 만에 40%(40.3%)를 넘어서더니, 14회 56.6%, 16회 60%를 기록했다. 마지막 회에서는 최고인 64.5%를 찍었다. 평균은 50.8%. 박상원은 “드라마의 폭발력이 상당했다. 전국 방송이 아니었는데도 경험해보지 못한 반응이 쏟아졌다”고 말했다. 이 드라마의 영향으로 <에스비에스> 7개 지역 민방 개국이 앞당겨졌고, 1998년 전국적으로 재방송될 당시 평균 시청률도 50%를 기록하는 등 <모래시계> 열풍은 휘몰아쳤다. 박상원은 “혜린이 잡혀가는 장면의 배경인 정동진은 당시 폐쇄를 앞둔 역이었는데 드라마 인기로 명소가 됐다”고 말했다.
특히 내용 자체가 ‘태수의 사형’만큼이나 파격적이었다. 이 드라마는 카지노 대부의 딸 혜린, 조직폭력배 태수, 검사 우석의 삶을 통해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격동의 현대사를 그린다. 드라마에서는 처음으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담았고, 삼청교육대, 와이에이치(YH) 사건,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 등 실제 사건들을 녹여냈다. 송지나 작가는 질곡의 역사를 바로잡으려고 애쓴 이들에게 진 빚을 갚으려고 이 드라마를 썼다는데, 지금 봐도 그대로 전파를 탄 게 신기할 정도로 예민한 현대사가 군더더기 없이 이어지며 빠르게 진행된다. 문민정부가 출범했다고는 해도 주범들이 시퍼렇게 살아남아 있는 상황에서 쉽지 않은 선택이다. 당시 언론 보도만 들춰봐도 ‘5·6공화국 세력들과 군 관계자들로부터 불만이 터져 나왔다’는 대목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박상원은 “실제 사건이 등장하다 보니 연상되는 관련 인물들이 실명으로 거론되기도 됐다”고 말했다. 압력은 없었을까? “있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건 없었어요. 배우로서도 마음껏 연기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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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 오래가고 온도 오래 남는”
소셜미디어에서 짧은 영상으로 뜨는 ‘태수의 사형’ 장면이나 ‘혜린과 태수의 오토바이 질주’ 장면을 보고 오티티(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로 재생한 요즘 세대들은 얼핏 세 남녀의 얽히고설킨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했다가 꾹꾹 눌러 담은 현대사에 놀라기도 했단다. 특히 7~8부 집중적으로 등장하는 5·18 장면과 11~12부 삼청교육대 장면에서 먹먹해졌다는 반응이 많다. 영화 <1987> <택시운전사> 등 시대가 바뀌면서 대중매체에서 5·18을 다각도로 접했지만, <모래시계>에 담긴 5·18은 또 달랐기 때문이다. 여느 드라마 속 주인공과 달리 방관자였던 태수가 사람들이 짓밟히는 걸 본 뒤 시민군이 되는 변화에서 ‘외지인’이었던 대다수 우리를 투영하게 된다.
박상원은 “5·18 때 계엄군이 된 학생들의 고뇌를 함께 담은 것도 의미 있는 지점이었다”고 짚었다. “우리는 역사에 대해 흔히 흑백만 얘기하는데, 그 당시 공수부대 중에는 국방의 의무를 준수하러 갔다가 그곳에 배치되면서 어쩔 수 없이 휘말리게 된 우리의 아들들이 있었어요. 그들의 고통을 보여준 것이 달랐다고 생각합니다.” 우석은 군에서 차출돼 광주를 경험한 뒤 오랫동안 죄책감에 시달린다. 사법시험을 포기할 생각까지 했고 검사가 된 뒤에도 “나는 자격이 없다”는 말을 끊임없이 되뇐다.
5.18 광주에서 시민군으로 참여한 박태수. 프로그램 갈무리 |
그런 점에서 지금 시선에서 다시 보면 우석이 가장 마음 쓰인다. <모래시계>는 조폭 미화 논란이 일었을 정도로 태수라는 인물의 존재감이 강렬했다. 아버지가 빨치산이어서 육사 면접에서 떨어진(1부) 이후 그의 인생은 180도 달라진다. 태수 자체가 역사의 피해자인 셈이다. 후배를 도우려다가 광주를 경험하고, 삼청교육대에 끌려가고, 혜린을 구하려고 이종도를 죽이면서 결국 사형에까지 처해지는 인생 자체가 파란만장했다. 민주주의를 위해 목소리를 냈지만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동료들을 배신한 자신에게 실망하고, 태수를 살리려고 그토록 혐오하던 카지노에서 일을 하는 혜린 역시 당시 드라마에서는 잘 볼 수 없던 여자 주인공이었다.
두 인물이 워낙 강렬하다 보니 우석은 심심해 보이기도 했다. 이제는 온 에너지를 내뿜었던 태수와 혜린에 견줘 혼자 속으로 삭이는 게 많았던 우석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태수에게 사형을 구형하는 자신이 얼마나 미웠을까, 그의 인생이 슬프다는 반응들이 눈에 띈다. “여운이 오래가고 온도가 오래 남는 인물이라 생각했어요 우석은. 대중들에게 천천히 들어가 오랫동안 빠져나가지 않을 거라고.” 1988년 <인간시장> 장총찬부터 1991년 <여명의 눈동자> 장하림에 이어 <모래시계> 우석까지 강직하고 정의로운 인물을 연이어 맡으면서 박상원은 “세 드라마의 흐름이 오늘날 내 인생에 강한 방향성을 제시해줬다”고 말했다.
검사의 자질을 고민하고 정보국에서 아무리 털어도 먼지 하나 안 나오는 우석은 지금 시대의 방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민주국가고, 민주국가는 백성이 주인 된다”는 아버지의 말을 새긴 우석은 떳떳하기에 당당하며 어떤 압력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검찰 개혁이 화두에 오른 지금 저런 검사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박상원은 “우석 때문에 검사의 위상이 높아졌었다. 드라마를 보며 검사를 꿈꾼 이들도 있었다. 당시 판사가 되려던 지인이 우석을 보며 목표를 검사로 바꾸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저런 검사’는 결국 모든 직업군에 적용할 수 있다”며 “모든 부분에서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양질의 것들을 구현해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금 보면 사회부 기자로 나온 신영진(이승연)이 굉장히 멋있다. 혜린에게 본질과 관련 없는 사생활 질문을 던지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선배 기자답게 좀 굴어라!”
연인으로 발전하는 단계의 태수와 혜린. 프로그램 갈무리 |
이정재가 혜린을 지키는 재희로 나와 인기를 얻었다. 프로그램 갈무리 |
드라마 저널리스트의 흔적
어쩌면 <모래시계>는 당대를 보여주지만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제발 잘 살아가라고 당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드라마를 연출한 고 김종학 피디는 ‘드라마 저널리스트’라고 불렸다. 대본을 넘어 연출, 영상, 심지어 배경음악에서도 사회적 의미를 담아내려고 고심한 흔적이 지금 시선에서 읽힌다. 카메라가 돌면서 혜린이 고문에 점점 피폐해져 가는 변화를 담은(9부) 기술적인 부분을 넘어, 실제 자료를 삽입했다. 5·18 광주에서 폭행당하는 시민들의 모습(7~8부), 1980년 9월1일 전두환 전 대통령 취임 장면(10부) 등이다. 드라마 내용 사이 그의 취임사가 한편의 코미디 같다.
이야기를 운반하는 음악의 힘도 컸는데 “우우우우~우~♬”로 시작하는 러시아 가수 이오시프 코브존의 ‘백학’(1969년 발표)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직접 참전한 라술 감자토프가 쓴 시에 곡을 붙였다.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주검이 된 군인들을 추모하는 내용인데 문장마다 피에 물든 아픔이 짙게 배어 있다. 22부에서 혜린을 구하러 온 백재희(이정재)가 이종도 패거리와 싸우고, 맞고, 다치고, 병원에 실려 가고 눈을 감기까지 10분 남짓 대사 없이 배경음악만 흐르기도 한다.
그가 만든 <여명의 눈동자>와 <모래시계>는 똑같이 지리산을 담은 마지막 장면에서 비슷한 질문을 던지며 끝난다. “이 사람 이렇게 보내는 거로 뭐가 해결됐어?”(혜린) “아직은, 아무것도.”(우석) “그런데 꼭 보내야 했어?”(혜린) “아직이라고 말했잖아. 아직은 몰라.”(우석) “그럼 언제쯤이냐고 친구는 묻는다.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어쩌면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다고 먼저 간 친구는 말했다. 그다음이 문제야. 그러고 난 다음에 어떻게 사는지 그걸 잊지 말라고.”(우석)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 <한겨레> 문화부 기자. 언제든 옛날 콘텐츠를 다시 볼 수 있는 시대. 세대불문 되감기하면 좋을 대중문화 작품을 소개하려 한다. 연출, 연기, 이야기 기본 3박자에 충실하면서도 마음을 움직이는 옛 작품들이 콘텐츠의 본질을 일깨운다. 지금 시선에서 새 해석이 등장할지도. 제작진과 배우들의 비하인드 코멘터리도 담아보겠다. 3주에 한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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