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인왕후’ 혐한·역사왜곡 논란 속 돌아봐야 할 것은…
황진미의 TV 새로고침
티브이엔 제공 |
타임슬립 코믹퓨전사극 <철인왕후>(티브이엔)를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2회가 방송됐을 뿐이지만, 방송통신위원회에 접수된 민원이 700개가 넘고, 청와대 국민청원까지 올라왔다. 혐한 원작자, 역사 왜곡, 명예훼손, ‘옥타곤’ 희화화까지. 논란이 이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 다만 지나치게 격앙되고 경직된 반응이 우려스럽다.
첫째, 혐한 논란을 보자. <철인왕후>는 중국 웹드라마 <태자비승직기>의 리메이크작이다. <태자비승직기> 원작소설을 쓴 선등 작가의 다른 소설 <화친공주>에 고려에 대한 멸시가 들어 있다는 지적이다. 제작진은 소설이 아닌 웹드라마를 원작으로 했으며, 원작 소설가의 혐한은 몰랐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웹드라마에도 중국 복식에 한복이 섞이거나 “한국에 가서 성형할 뻔했어” 같은 대사가 나온다며 논란이 가시지 않는다.
과거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논란이다. 현대 남성의 영혼이 왕후의 몸에 들어간다는 설정을 따왔을 뿐 조선왕실 이야기로 바뀌기 때문에, 저작권 개념이 희미하던 시절이라면 리메이크 판권을 사지도 않았을 터다. 또한 한·중·일 콘텐츠가 국경을 넘어 대중에게 공유되고 인터넷으로 논란이 생중계되다 보니 격앙된 면이 있다. 한·중·일 내셔널리즘이 강화되고 가뜩이나 한복과 김치 논란으로 예민해진 때라 자국 문화에 대한 대결로 치닫는 중이다. 물론 ‘혐한’은 나쁘다. 즉 타국 타문화에 대한 멸시는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콘텐츠가 서로 넘나드는 ‘트랜스 아시아’ 시대에 걸맞은 행동은 ‘혐한에 대한 발끈’이나 ‘국뽕 올림픽’이 아니다. 우리부터 한류 콘텐츠 안에 타국에 대한 폄하나 무신경한 문화 전유가 없었는지 돌아볼 일이다. 문화콘텐츠 수출국이라면 글로벌 감수성을 갖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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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역사 왜곡 논란은 지나치게 경직돼 있다. “조선왕조실록이 찌라시네”라는 대사가 실록의 가치를 폄하했다는 비판에 제작진이 사과했다. 그런데 과연 그 대사로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의 가치가 실추됐는지는 의문이다. 그저 타임슬립한 현대인이 겪는 혼돈을 그의 말투로 표현한 대사가 아닌가. 물론 한국 시청자들이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이나 종묘제례악이 뭔지 모르는 외국 시청자들에게 오해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우려는 이해된다. 하지만 양식 있는 외국 시청자라면 장르와 행간을 감안해서 볼 것이다. 가령 <킹덤>을 보고 조선왕실이 좀비 소굴이었다고 믿을 외국 시청자가 많진 않을 것이다.
사실 그 대사는 실록으로 대표되는 정사가 아닌, 기록되지 않은 역사의 이면을 상상하겠다는 뜻을 담는다. 역사의 이면을 상상하는 것이 곧 역사 왜곡은 아니다. ‘어떻게’와 ‘왜’가 중요하다. 가령 영화 <나랏말싸미>도 역사 왜곡 논란을 겪었지만, 훈민정음 해례본에 언급되지 않는 신미 대사와 소헌왕후가 나온다고 해서 한글의 독창성이나 세종의 위대함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글 창제가 산스크리트어, 음성학 등 당대에 접할 수 있었던 모든 학문적 유산을 집대성하고 불교, 여성 등 비주류세력을 포용한 결정체로 보이게 한다. <철인왕후>는 정사에 기록된 철종이 아닌 다른 철종을 상상한다. 세도정치의 틈에 낀 ‘허수아비 왕’으로 기록된 철종이 이중생활을 통해 조선을 개혁하려 암약했다는 상상이다. 이런 발상은 낯설지 않다. 정조가, 소현세자가, 광해군이 개혁에 성공했더라면 민족의 명운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며 끊임없이 개혁군주 후보를 찾아오지 않았던가. 그런 상상의 일환으로, 망해가는 조선의 마지막 희망을 철종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특히 ‘강화도령’인 그에게는 조선의 어떤 왕도 갖지 못한 민중성을 부여할 수 있으니 흥미롭지 않은가.
셋째, 퓨전사극을 표방하면서 ‘철종’ ‘철인왕후’ 등 실존 인물을 특정해 논란을 키웠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비중이 적은 조연이나 부정적으로 묘사된 대비(신정왕후)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풍양조씨 종친회가 강력 대응을 경고했다. 제작진은 누리집 소개란에 ‘풍안조씨’와 ‘안송김씨’로 가문 이름을 바꿨다. 영화 <명량>의 배설 장군 논란만큼이나 갸우뚱하다. 역사 창작물을 보고 조상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분노하는 후손에게 공감되지 않기 때문이다. 근대국가의 시민이라면 망한 구체제의 역사를 객관화해서 봐야 한다. 조선시대 사람처럼 역사를 내 가문의 일로 사유화해선 곤란하다. 안동김씨든 풍양조씨든 망국에 이바지한 것은 사실이다. 굳이 자신을 근대국가의 시민이 아닌 가문의 일원으로 정체화한다면, 조상의 행위에 대한 반성이 우선해야 할 것이다.
넷째, 집단성폭행 미수 사건이 발생했던 ‘옥타곤’ 클럽 이름을 패러디한 것에 대한 비판도 거세다. 특히 공동제작사인 ‘스튜디오 플렉스’가 버닝썬 사건에 연루됐던 와이지엔터테인먼트의 자회사임이 밝혀져 더욱 논란이 커지고 있다. ‘옥타정’ 기생집 장면은 여러모로 논쟁적이다. 룸살롱 문화의 역겨운 재현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남장여자임을 알아보고도 접객이 이루어진 것에서 퀴어적 요소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성애자 남자의 영혼을 지닌 여자의 남장을 레즈비언적 수행으로 볼 것인지, 여성으로 위장한 성전환물 판타지로 볼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사실 현대 남성의 영혼이 중전의 몸에 깃든다는 설정 자체가 독한 젠더 교란의 의미를 품는다. 극이 어디로 튈지 예단하긴 아직 이르다. 다만 그 와중에 극의 90%를 끌고 가는 신혜선의 연기는 발군이다. 당분간 신혜선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드라마를 더 지켜보고 싶다.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