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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녀 막달라 마리아’, 베드로의 질투가 만든 오명

[토요판] 이유리의 그림 속 권력


(1) 쥘 르페브르 ‘동굴 속의 막달라 마리아’


예수 부활 처음 목격한 ‘성녀’


남성 제자 공동체서 외면당해


‘초대 교황’ 베드로 이후엔


아무렇게나 후려치는 존재로


‘여성 영웅’ 부정하는 교회


막달라 마리아 성적대상화 용인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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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성이 동굴 안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비스듬히 누워 있다. 긴 머리를 풀어 헤치고 마치 자신의 온몸을 보여주려고 작정한 것처럼 두 팔까지 머리 쪽으로 들어 올렸다. 그녀는 누구일까? 그림 제목을 보면 깜짝 놀랄 것이다. <동굴 속의 막달라 마리아>.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같이 있었고, 특히 무덤에서 부활한 예수를 처음으로 만난 중요한 인물, 성녀 막달라 마리아를 그린 작품인 셈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화가 쥘 르페브르(1834~1912)는 막달라 마리아를 전혀 신성하게 그리지 않았다. 북유럽 신화의 요정 이름이나 비너스, 아니면 이브를 그림 제목에 대신 박아 넣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즉 제목에 ‘막달라 마리아’를 넣어 위장을 하고 있지만, 사실 이 그림의 효용이 뭐였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림 속 적나라하고 선정적인 연출은 남성들이 여체를 거리낌없이 엿볼 수 있는 즐거움을 가져다주었으리라. 실제 <동굴 속의 막달라 마리아>는 러시아 혁명 전,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의 겨울궁전 속 사적인 방에 은밀하게 걸려 있었다고 하니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쥘 르페브르는 ‘불경하게도’ 어떻게 성녀인 막달라 마리아를 일반 누드화 속 여인처럼 관능적으로 묘사할 수 있었을까. 이유는 한마디로 얘기할 수 있다. 그래도 됐기 때문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성경에 등장하는 여성 중 성모 마리아 다음으로 자주 등장하는 성인이다. 성경에서 막달라 마리아라고 명시된 구절은 3번 등장한다. 예수 덕분에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의 죽음을 지켜본 막달라 마리아, 부활한 예수를 처음으로 본 막달라 마리아 등 세 구절이다. 이 세 장면으로 막달라 마리아의 삶을 재구성해본다면 자신의 정신질환을 고쳐준 예수를 열렬히 따른 제자였으며, 수제자 베드로도 예수를 외면하고 도망가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십자가 아래에 있었던 용기 있는 여성이었으며, 부활한 예수가 자신의 모습을 제일 먼저 보여주고 다른 사도들에게 부활 사실을 전하라고 할 정도로 가장 믿었던 사람이었다. 이렇게 성경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는데도 이후 막달라 마리아는 성경 속에서 자취를 감춘다. 그녀는 어디로 간 것일까?


신학자 하희정의 책 <역사에서 사라진 그녀들>에 따르면 1945년 12월 이집트 나그함마디 사막에서 문서 뭉치가 하나 발견된다. 바로 ‘성서 밖의 성서들’이라 불리는 13권의 <나그함마디 문서>였다. 내용을 보면 정통파 교회 입장에서는 불온하기 짝이 없다. 막달라 마리아가 왜 예수 부활 이후 기독교 역사에서 사라지게 됐는지 단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나그함마디 문서는 예수가 가장 총애한 제자가 막달라 마리아였음을 말해준다. <나그함마디 문서> 중 빌립복음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구세주의 동료는 막달라 마리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녀를 나머지 제자들보다 더 사랑하셨으며, 그녀에게 자주 입맞추곤 했다(친밀함을 표현하는 그 지역 특유의 인사법). 나머지 제자들은 이에 마음이 상하였다. (…) 그들은 예수께 여쭈었다. 왜 우리들보다 저 여인을 더 사랑하십니까? 구세주께서는 그들에게 왜 내가 저 여인을 사랑하는 만큼 너희를 사랑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막달라 마리아는 남성 제자 공동체 안에서 ‘왕따’ 신세였다. 특히 베드로는 막달라 마리아를 드러내놓고 적대했다. <나그함마디 문서> 중 토마스의 복음서 114장은 이렇게 전한다. “시몬 베드로가 여자는 구원에 맞지 않으니 마리아를 내보내자고 하자, 예수가 답하길 나는 그녀를 인도해 온전한 사람(안드로포스 Anthropos)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녀는 너와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숨결이 될 것이로되 온전한 사람이 된 여자는 주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리라.”


이렇게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었으니, 예수의 죽음 이후 막달라 마리아가 철저히 배제된 건 당연한 수순 아니었을까. 베드로가 초대 교황이 되어 교회 제도를 이루고, 부활에 의심을 품었던 사도들마저도 교회 주류 전통 속에서 왕좌에 올랐을 때, 예수의 가장 신실한 사도였던 막달라 마리아는 열두 제자에도 포함되지 못한 채 제도권 밖으로 밀려났다. 이때부터 막달라 마리아는 교회 안에서 얼마든지 후려쳐도 되는 대상이 되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 부활의 첫 증인이었고 다른 남성 제자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알린 메신저였다는 것도 못마땅한 사실이었다. ‘왜 예수는 자신이 부활한 모습을 여인에게 처음으로 보여야만 했는가’ 하는 문제는 항상 신학자들을 괴롭히는 골칫거리였다고 한다. 이에 대한 가장 기발한 설명은 아마 중세시대에 진지하게 제기된 다음과 같은 주장 아니었을까. “소식을 퍼뜨리는 가장 빠른 방법은 여자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에 더해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라는 이름까지 얻기도 했다. 그가 성판매 여성으로 인식되게 된 계기는 따로 있다. 시작은 591년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재위 590~604년)의 설교였다. 그가 루가복음 7장에 등장하는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죄지은 여자’를 막달라 마리아로 해석해 다음과 같이 그녀를 ‘회개한 창녀’로 설교한 것이다. “우리는 이 여인이 루가의 죄 많은 여인, 곧 요한이 마리아라 부르는 그 여인이자 마르코가 마리아에게서 일곱 마귀를 쫓아내줬다고 말하는 그 마리아임을 믿습니다.”(복음서 강론 33편) 성경에서도 향유 부은 여성을 ‘죄지은 여자’라고만 말했을 뿐 성판매 여성이었다는 근거는 없었다. 하지만 때는 중세 말. 성적인 죄는 모두 여자에게 씌워지던 시대였기에, 막달라 마리아의 죄는 손쉽게 성을 파는 여성으로 치부됐다. 나중엔 아예 요한복음 8장에 등장하는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마저도 막달라 마리아와 동일 인물로 해석됐다. 즉 막달라 마리아는 신학적으로 마음대로 채울 수 있는 ‘무형의 빈 공간’(null)이었다. 그녀에게 날을 세운 베드로가 세운 정통파 교회가 기독교 주류가 되면서, 그 빈 공간은 너무도 쉽게 얼룩덜룩한 이미지로 채워졌다.


쥘 르페브르가 그린 <동굴 속의 막달라 마리아>는 이런 배경 아래 탄생한 그림이다. 예수 부활의 증언자이자 성경 속 영웅을 이렇게 성적인 존재로 표현한 것은 그녀의 권위를 부정하는 한 방법으로 볼 수 있다. 어쩌면 르페브르가 막달라 마리아를 동굴 속에서 벌거벗은 것으로 묘사한 것은 9세기부터 유행한 막달라 마리아의 전설에 근거한 것이라고 항변할지도 모른다. 전설은 그녀가 예수 승천 후 동굴에서 ‘은둔 수도자’로 30여년을 살았고 고행으로 옷이 다 닳아 머리카락으로 몸을 가렸다고 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르페브르의 그림에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행한 강도 높은 금욕적인 생활의 자취를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막달라 마리아의 진짜 모습을 그린 이는 성적 매력이 여전히 충만한 ‘전직 창녀’로 묘사한 르페브르가 아니라, 표정을 일그러트린 채 통곡하는 ‘신실한 제자’로 표현한 이탈리아의 화가 에르콜레 데 로베르티(1450~1496?)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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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콜레 데 로베르티가 그린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는 소실된 벽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의 일부로 추측되는 작품이다. 스승이 죽음을 받아들이자 가만히 손을 놓았던 수제자 베드로를 비롯해 다른 남성 제자들도 절망과 두려움에 떠나간 빈자리. 로마 군인들이 창을 들고 감시하던 그 엄혹한 자리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소리 내어 운다. 섬세한 묘사에 적합하지 않은 프레스코 기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지만 에르콜레 데 로베르티는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칼을 한 올 한 올 공들여 그렸다. 다른 화가들이 보통 박제된 것처럼 조용한 슬픔에 잠긴 모습으로 막달라 마리아를 표현했다면 에르콜레 데 로베르티는 볼을 타고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투명한 눈물방울 아래, 입을 벌린 채 격정적으로 우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그래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으리라. 막달라 마리아는 이때 존경하는 스승의 죽음으로 인해 거대한 충격에 휩싸였을 테니까. 이것이 바로 생전 예수가 믿고 사랑했던 제자 막달라 마리아의 본모습에 가깝지 않았을까.


하지만 교회가 막달라 마리아의 본모습을 바로잡은 것은 20세기가 되어서였다. 1969년에야 가톨릭교회는 그레고리우스 1세의 설교에 실수가 있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철회했다. 그러나 2004년 개봉한 멜 깁슨 감독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여전히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였으나 회개해 성녀가 된 여자로 일반적으로 지칭되곤 한다. 교회 안에서 여성의 권한을 제한하고 남성에게만 사도적 권위를 부여한 정통파 교부들이 승리한 증거다. 막달라 마리아의 자리는 그렇게 효과적으로 ‘도둑질’당했다.


올해는 영국의 여성 과학자 로절린드 프랭클린(1920~1958)의 탄생 100주년이었다. 그에 관한 특집 기사를 읽다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드리워졌던 그림자가 프랭클린에게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탄식한 적이 있다. 프랭클린은 디엔에이(DNA)의 구조가 이중나선형이라는 사실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과학자였다. 하지만 프랭클린은 연구 업적을 도둑질당했다. 1952년 프랭클린은 디엔에이 샘플을 추출해 실험을 하던 중 디엔에이가 이중나선 구조임을 보여주는 ‘51번 사진’을 엑스(X)선으로 촬영했는데, 프랭클린과 함께 연구하던 모리스 윌킨스가 그녀 몰래 이를 빼낸 것이다.


윌킨스는 사진을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라는 과학자에게 건넸고, 그들은 프랭클린의 51번 사진을 근거로 디엔에이 구조가 이중나선형이라는 내용의 논문을 1953년 발표했다. 이 논문은 ‘20세기 유전학에서 가장 위대한 발견’으로 평가됐지만, 정작 해당 사진을 찍은 당사자 프랭클린의 이름은 논문에 빠져 있었다. 이뿐이랴. 왓슨과 크릭, 윌킨스는 이 논문으로 1962년 노벨 생리의학상까지 수상했다. 그렇다면 프랭클린은? 디엔에이 사진을 찍느라 엑스선에 자주 노출돼 안타깝게도 그 전에 숨졌다. 프랭클린의 업적을 훔쳤다는 사실을 의식해서였을까. 왓슨은 1968년 <이중나선>이라는 책에서 프랭클린을 “까다롭고 같이 일하기 힘든 사람이었다”라고 일부러 깎아내리기도 했다. 마치 막달라 마리아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주류 남성 교회가 그녀를 “창녀 출신”이라고 거짓으로 헐뜯은 것과 쌍둥이처럼 똑같은 대응이다. 도둑질의 역사는 여전히 질기게 살아 있다. 어느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 이유리 작가. <화가의 출세작> <화가의 마지막 그림> 등 예술 분야의 책을 썼고, <한겨레> 토요판에 연재한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을 묶어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을 낸다. 이번엔 그림을 매개로 인간 사회에 작동하는 다양한 층위의 권력관계를 드러내고, 여기서 발생하는 부조리를 다뤄보려고 한다. 3주에 한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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