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들이 333번, 웃음과 오마카세로 피폐했던 영혼 회복”
[한겨레S] 인터뷰
‘잇어빌리티’ 진행자 에리카 팕
직장서 ‘어린 여자’ 등 무시당해
요리로 풀다 쿠킹 클래스 진행
퇴사 뒤 여성 직장인 위로 기획
“내 인생은 나만 사는 거니까"
닉네임 ‘에리카 팕’ 박지윤씨가 지난달 23일 서울 송파구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익살맞은 안경을 쓴 채 활짝 웃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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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를 한다는 건 누군가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일이다.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간이 입에 맞을지, 양은 적당할지, 만족스러워할지 등 메뉴를 생각하고, 재료를 준비하고, 조리하고, 맞춤한 그릇을 골라 식탁 위에 차려내는 모든 과정 동안 ‘먹을 사람’을 생각하는 행위다. 그렇기에 집밥이 위로의 상징이 될 수 있을 터.
닉네임 ‘에리카 팕’ 박지윤(32)씨는 이런 요리와 집밥을 매개로, 사람살이를 들여다보고 마음을 나누고 싶어 하는 ‘…’이다. 통상 직업처럼 그가 어떤 사람인지 한눈에 설명할 명사가 들어가야 자연스러운 자리에 ‘말줄임표’를 넣은 건, 그를 한 단어로 규정하는 게 쉽지 않아서다. 독립출판 작가, 뉴스레터 발행인, 인플루언서는 통용되는 단어 가운데 그 자리에 들어갈 만한 것이다.
‘에리카’는 중학교 때 읽은 독일 동화 <분홍 돼지>에 나오는 돼지 인형의 이름에서 따왔는데,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에리카를, 주인공이 자기보다 더 불행해 보이는 사람한테 주는 걸 읽고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돼야겠다’고 한 다짐”이 담겨 있다. ‘요리먹구가’ ‘내적 댄서’는 그가 사람들에게 음식을 만들어주고, “춤추는 걸 좋아하지만 부끄러워서 남 앞에선 안 추는”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하려고 만든 표현이다. 최근 출연한 방송 프로그램에선, 집들이만 333번 치른 ‘집들이 러버’로 소개됐다. 대체 에리카 팕은 어떤 사람일까. 장마가 시작돼 폭우가 쏟아진 지난달 23일 오후, 서울 방이동 그의 오피스텔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집들이만 333번
―방송에서 집들이를 333번이나 한 사람으로 나와 화제가 됐어요. 어떻게 집들이를 그렇게 많이 하게 된 거예요?
“생각보다 많이 보셨는지, 평소 보기 힘든 먼 친척들한테도 연락이 오고, 50대 아주머니들한테서도 인스타그램 메시지가 오더라고요.(웃음) 집들이를 하게 된 건 독립출판물을 내면서부터였어요. 2017년부터 해마다 <웃_픈>, <우_잉>, <도시시>라는 책을 잇달아 냈는데, 독립출판이다 보니 아무래도 친구, 지인들이 많이 사주시게 되더라고요. 그때 마침 제가 자취도 시작하게 돼서 고마움도 전할 겸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했는데,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을 보고 ‘나도 초대해달라’는 사람들이 계속 생긴 거예요.
저는 사람 만나야 충전되는 스타일이고,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생기는 일에 열려 있으니까, ‘그럼 날짜 잡아요’ 이런 일이 반복된 거예요. 그러다 2020년 7월 ‘잇어빌리티’(EatAbility)라는 요리 원데이 클래스를 시작했는데, 근래 들어 신청자가 2~3명일 때가 있어 저희 집에서 진행했고요. 지난해 회사를 그만둔 뒤 두 달 동안은 ‘함바데리카’라는 프로젝트로도 또 식사 초대를 하고, 그러다 보니 333이라는 숫자가 됐어요.”
잇어빌리티에서 만든 문어 스테이크. 에리카 팕 제공 |
―확신의 이엔에프피(ENFP)로군요.(웃음)
“하하. 맞아요.”
―원래 요리를 좋아했어요?
“자취하기 전까진 해본 적도 없었어요. 그런데 친구들을 집으로 부르는 게 좋고, 기왕 불렀으니 정성을 다하고 싶더라고요. 나와 함께한 하루를 좋게 기억하면 좋겠다는 마음이었고, 거기 갔더니 극진히 모시더라는 반응을 받고 싶었어요. 사실 처음엔 밀키트를 썼는데, 자주 쓰던 게 단종돼서 제가 직접 요리를 할 수밖에 없기도 했어요.(웃음) 본격적으로 요리에 마음을 붙인 건 2020년이었는데 그때 회사 생활이 힘들어서 공황장애가 생겼고, 특정인이 연락하면 가슴이 마구 뛰고 숨이 안 쉬어지고 그랬거든요. ‘월급 뤼팽’처럼 출근해서 요리 유튜브 보고, 얼른 퇴근해서 음식을 만들어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사람들이 달아준 ‘맛있겠어요’ 댓글 보는 게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법이었어요.”
―삼성에스디에스(SDS)와 자회사를 포함해 7년 동안 직장생활을 했는데, 어떤 게 그렇게 힘들었어요?
“퇴사 전에 했던 업무가 교육시스템 운영이었는데, 파견 나간 고객사에선 ‘이런 거 못 한다’ ‘저렇게 해 달라’ 불만을 터트리고, 본사에선 ‘안 된다’ ‘그런 요구 못 들어준다’ 압박하는 사이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특히, 제가 맡은 고객사가 ‘아저씨’들이 많은 곳이어서 그랬는지 저를 담당자가 아니라 ‘어린 여자애’로 보고 무시하고 함부로 막말을 하는 경우도 잦았는데, 회사는 전혀 저를 보호해주지 않는 거예요. 외롭고, 전선에 혼자 나가 직격탄을 맞는 느낌이랄까. 그 스트레스를 요리로 푼 거예요. 인스타그램엔 좋은 댓글만 달리니까, 사람이 들어야 할 좋은 말의 적정량을 그런 식으로 채우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요.
그렇게 병적으로 매일 다른 요리를 해서 올리니까, 제 상황을 잘 아는 책방 ‘스토리지북앤필름’ 사장님이 소셜 다이닝을 해보자고 제안해 잇어빌리티가 시작된 거예요. 쿠킹 클래스이긴 하지만, 웃음치료와 오마카세를 합친 콘셉트의 다이닝 쇼처럼 진행해요. 맛있게, 있어 보이게 차려서 함께 먹고,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는 거죠. 회사 다닐 땐, 평일에 축적된 불행이 주말 잇어빌리티로 해소되고, 피폐해진 영혼과 살이 다시 차오르는 느낌이었어요.”
일하는 여성들의 이야기
―그럼 함바데리카 프로젝트는 어떤 계기로 한 거예요? ‘자기만의 세계를 건설해가는 여성 노동자를 위한 함바집’이라는 콘셉트가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잇어빌리티를 더 많은 곳에서 본격적으로 진행하고 싶어서 지난해 7월 퇴사했는데, 당시 방역 지침 때문에 여러 사람이 밥 먹는 모임을 하는 게 어려웠어요. 그러던 차에 친구를 만났는데, ‘요즘 간단한 음식만 시켜 먹지, 집에서 밥해 먹은 지 오래됐다’는 거예요. ‘우리 집 와서 밥 한번 먹어’ 했더니 ‘너희 집이 함바집도 아니고 무슨 밥을 먹으러 가~’라길래 ‘내가 함바집 하지 뭐, 이름은 함바데리카(에리카의 함바)로 하고’라면서 웃었어요.
그런데 집에 돌아오는 길에 능소화가 너무 예쁘게 피어 있길래 꽃말을 찾아보니 여성, 명예 이런 거더라고요. 함바집은 건설 현장에 있는 거잖아요. 아, 이거다, 싶었죠, 나를 건설해가는 여성을 위한 밥집. 사실, 저희 집에서 진행해야 하니 여성으로 국한한 측면도 있고요.”
함바데리카 손님에게 대접한 밥상. 에리카 팕 제공 |
―어떤 분들이 오셔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나요?
“작년 9~10월 두 달 동안 20번, 41분을 모셨는데 제가 좋아하는 작가님들께 먼저 연락해서 오시게 한 적도 있고, 인스타그램으로 신청을 받기도 했어요. 정말 다양한 직업을 가진 분들이 오셨는데, 제 또래의 직장생활 6~8년차가 많았어요. 이 일을 계속할지, 다른 길을 갈지 고민하는 시기라 그런지 그런 얘기를 많이 했고요.
전 카피라이터가 꿈이었지만 못 이뤘고, 불만족스러운 회사 생활을 하다 그만뒀으니까 원래 꿈이 뭐였냐, 회사는 만족스럽냐 그런 걸 많이 물어봤죠. 대체로 다른 걸 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됐다는 분들이 많았는데, 그래도 만족스럽다는 분들은 직장과 퇴근 후 자신의 삶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능력이 뛰어난 것 같았어요. 영혼이 나를 보듯, 객관적으로 자기를 다시 바라보는 시간도 필요하고요. 내 인생은 나만 사는 거니까요.”
―지난해 11월부터 발행하고 있는 뉴스레터 ‘중구난방’에 함바데리카 손님 이야기도 실리는데, 처음부터 뉴스레터를 생각하고 시작한 거였어요?
“아뇨. 원래는 함바데리카도 돈을 받을까 하다가, 집에서 밥 차려주면서 돈 받는 게 아무래도 이상해서 제 퇴직금 믿고 무료로 했어요. 그 대신 유튜브랑 인스타그램 영상 콘텐츠를 만들어 수익을 내보려고 했는데, 찍은 영상이 너무 길어 편집할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그래서 뉴스레터에 넣게 된 거죠. 함바데리카에 오셨던 분 중에 7~8팀 이야기는 이 프로젝트 소개와 함께 묶여 올해 하반기에 책으로도 나와요.”
퇴사한 지 1년
―회사를 그만둔 지 이제 곧 1년인데,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에게 들려줄 말이 있을까요?
“핸드폰 위젯으로 퇴사한 지 며칠 됐는지 매일 확인해요. 오늘이 343일째인데, 얼마 전에 제 수입이 회사 때 월급을 넘었어요. 많이들, 새로운 일을 하고 싶으면 원래 월급을 뛰어넘을 수 있을 때 나오라고 하는데, 전 나와봐야 알게 되는 수입원도 있다고 생각해요. 요즘은 모임 플랫폼이 많아서, 자기를 어떻게 알리고 브랜딩하느냐에 따라 돈 벌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요. 회사에 다니면서 퍼스널 브랜딩부터 하고 싶다면 뉴스레터를 해볼 수도 있고요.”
닉네임 ‘에리카 팕’ 박지윤씨가 지난달 23일 서울 송파구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익살맞은 안경을 쓴 채 활짝 웃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
―요리먹구가, 내적 댄서, 잇어빌리티와 함바데리카 진행자, 중구난방 발행인, 작가 중에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뭔가요?
“요리먹구가, 내적 댄서 같은 말은 저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제가 누구인지 이해시키려고 만든 말이에요. 그런데 전, 백남준이나 피카소처럼 아무 설명 없이도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게 꿈이에요. 어쨌든 제일 중요한 건 에리카 팕이에요.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나’로 살아가는 에리카 팕이요.”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