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의 애달픈 사연이 곳곳에
장태동의 서울을 걷다
[한겨레] 종로구 청계천 영도교부터 낙산을 넘어 혜화문까지 4㎞
정순왕후가 단종 마지막 본 영도교
궁에서 쫓겨난 뒤 살아가던 정업원
옷감에 물을 들이던 샘터
단종을 그리워하며 올랐던 동망봉
단종과 정순왕후 송씨가 살아서 서로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다던 청계천 영도교, 궁에서 쫓겨난 정순왕후 송씨가 살아가던 정업원(터)과 옷감에 물을 들이던 샘(터), 강원도 영월로 유배된 단종을 그리워하며 올랐던 동망봉, 열여덟 살 꽃다운 나이에 들려온 남편 단종의 부고, 여든두 살 세상을 뜰 때까지 숨죽여 살아야 했던 정순왕후의 숨결이 느껴지는 길.
생이별의 다리 영도교
종로구에서 만든 길 중 청계천 영도교에서 시작해 낙산 비우당에서 끝나는 ‘동네골목길 관광코스 15코스’(단종애사 정순왕후의 숨결길)와 숭인근린공원에서 시작해 혜화문에서 끝나는 ‘종로 건강산책 코스 숭인근린공원~한양 도성길(낙산) 구간’을 걷는다.
이 두 길은 숭인근린공원에서 비우당까지 구간이 겹치기 때문에 영도교에서 숭인근린공원을 지나 비우당까지는 ‘동네골목길관광코스 15코스’를 온전하게 따라 걸으면 되고, 비우당부터 혜화문까지는 ‘종로건강산책코스 숭인근린공원~한양도성길(낙산) 구간’을 따르면 된다.
그 길의 시작은 청계천 영도교다. 삼촌인 세조에 의해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던 단종, 유배지 영월로 가는 길은 죽음으로 치닫는 예정된 운명이었다.
유배지로 가는 길, 단종과 왕비 정순왕후 송씨가 살아서 서로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던 곳이 청계천 영도교였다고 한다. 단종도 정순왕후 송씨도 그길로 헤어지면 다시 못 볼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고, 단종이 죽은 뒤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그 다리는 ‘영영 다시 못 볼 이별의 다리’가 되었다.
궁에서 쫓겨난 정순왕후 송씨를 도왔던 사람들 중에는 동대문 밖 여인시장 사람들도 있었다. 여인시장은 당시 여인들과 아이들만 드나들 수 있었던 시장으로, 주로 배추 등 채소를 파는 곳이었다고 한다.
옛 숭신초등학교(현재 서울다솜관광고등학교) 정문 옆 담장 아래 여인시장 터를 알리는 푯돌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여인시장이 있었던 자리를 밝힐 만한 뚜렷한 역사 자료가 없어서 서울시에서 푯돌을 치웠다.
동망봉에 올라 임 계신 영월 쪽 하늘을 바라보다
옛 물건이 빛을 내는 동묘벼룩시장 한쪽에 사람들이 동묘라고 이르는 ‘동관왕묘’가 있다(현재 공사 중이다). 중국 촉나라 장수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다. 조선시대 선조 임금 때 명나라 장수 진인이 머물던 곳에 만들었다. 남관왕묘 다음에 동관왕묘를 세웠다. 북묘와 서묘도 만들었는데 지금은 동관왕묘만 남았다. 보물 제142호다.
숭인근린공원에도 정순왕후 송씨의 이야기가 깃들었다. 숭인근린공원 남쪽에 동망정이 있다. 정순왕후 송씨가 유배지 영월에 있는 단종을 그리며 올랐던 동망봉에 세운 정자다.
숭인근린공원 북쪽에는 동망각이 있다. 동망봉 아래 보문동에 살던 사람들이 정순왕후 송씨의 넋을 기리고 마을의 안녕을 위해 제를 올리던 곳이었다. 원래는 보문동6가 209-192에 있었는데, 재개발로 철거되고 지금의 자리에 다시 세웠다. 동망각 위 체육공원 한쪽에 동망봉을 알리는 푯돌이 있다. 푯돌에는 정순왕후 송씨가 날마다 단종의 명복을 빌었던 곳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단종 또한 왕비에 대한 마음이 같았다. 단종의 유배지 영월 청령포는 삼면이 강물로 둘러싸였고 한쪽은 절벽처럼 치솟은 벼랑이다. 단종이 절벽으로 올라가는 길에 돌로 탑을 쌓았다고 전해진다.
임 그리는 자줏빛 마음
정순왕후 송씨가 궁에서 쫓겨난 뒤에 살던 곳이 정업원이었다. 지금은 그 자리에 청룡사가 들어섰다. 청룡사 옆에 정업원 터를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안내판 뒤에 조선시대 영조 임금 때 세운 ‘정업원구기’라는 비석이 있다. 영조가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 송씨가 살던 곳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비석과 현판에 글을 썼다. 그 글은 ‘정업원 옛터 신묘년 9월6일에 눈물을 머금고 쓰다’와 ‘앞산 뒷바위 천만년을 가오리’라는 내용이다.
영조는 또 ‘東望峰’(동망봉)이라는 글씨를 써서 정업원에서 보이는 동망봉 절벽에 새기게 했는데, 일제강점기에 채석장이 되면서 바위에 새겼던 글자는 완전히 사라졌다. ‘앞산 뒷바위 천만년을 가오리’라는 영조의 뜻은 불과 200년도 못 간 채 일제강점기에 무너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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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왕후 송씨가 빨래를 하고 옷감에 물을 들이기 위해 찾았던 샘은 현재 청룡사에서 직선거리로 약 370m 정도 떨어진 비우당 초가 뒤 바위 아래에 있었다. 비우당은 조선시대 최초의 백과사전인 <지봉유설>을 쓴 지봉 이수광이 살던 초가집이다. 원래는 창신동 쌍용2차아파트 자리에 있었는데 낙산공원을 만들면서 지금의 자리에 복원했다.
비우당 초가 뒤 바위 아래 샘이 하나 있다. 그 샘이 정순왕후 송씨가 빨래를 하던 곳이라 한다. 당시에 이곳에서 빨래를 하면 자줏빛 물이 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주민 말에 따르면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에는 샘에 물이 찰 경우도 있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물이 말랐다.
600년 역사와 현재가 공존하는 길
낙산 꼭대기에 낙산공원이 있다. 낙산공원 제일 높은 곳에서 사방이 터진 전망을 즐긴다. 풍경이 한눈에 다 안 들어온다. 눈 아래 한양도성 성곽이 보인다. 동쪽에서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아차산 용마산 불암산 수락산 북한산이 먼 데서 휘돌아 흐르고 그 안에 백악산(북악산), 인왕산이 자리잡으니 그 안에 든 사람 사는 마을이 동화 같다.
성곽을 따라 남쪽으로 걷는다. 성곽 왼쪽으로 남산과 동대문 일대 풍경이 펼쳐진다. 조금만 가면 길 오른쪽에 정자가 보인다. 정자 앞에 서면 백악산(북악산), 인왕산, 안산, 남산이 둘러싼 조선시대 한양도성 안 마을이 한눈에 보인다. 왔던 길을 걸어서 낙산공원으로 향한다. 낙산공원 성곽 암문(적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만들어 돌로 막아두었다가 필요할 때 비상구로 사용한 문)으로 나가서 성곽 밖에 난 성벽길을 걷는다.
성벽길 옆에 ‘장수마을’이 있다. 옛집과 골목이 남아 있는 마을이다. 길 아래 지붕이 있고 또 그 아래에 집이 있는, 산비탈에 다닥다닥 집들이 들어선 마을이다. 지붕 위 새끼 고양이 눈빛이 호기심 반 두려움 반이다. 또 다른 지붕 위에 화분이 놓였고, 하얀색으로 칠한 시멘트 담벼락 옥상에서 빨래가 나부낀다.
일상이 풍경이 되는 골목길에서 나와 다시 성벽길로 접어든다. 패랭이꽃이 선명하게 피어난 600여 년 전 성벽길을 걷는다. 역사와 현재가 공존하는 길을 걷다보면 빽빽하게 들어선 집과 건물 사이로 기와지붕 얹은 문루와 문이 보인다. 도착지점인 혜화문이다.
글·사진 장태동 여행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 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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