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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안경은 왜 비난받아왔을까

안나 도로테아 테르부슈, ‘안경을 쓴 자화상’


18세기 담대한 ‘안경을 쓴 자화상’

그린 여성 화가 파리에서 실패한 이유

“젊음·미모·수줍음·애교 부족해서”


계급차별 없는 여성살롱 ‘블루스타킹’

경멸적 의미로 쓰며 여성 지성 비난

애교 섞는 말하기 권하는 한국 사회

한겨레

안나 도로테아 테르부슈, <안경을 쓴 자화상> , 1777년, 캔버스에 유채, 베를린 국립회화관.

한 지상파 여성 아나운서가 안경을 쓴 채 뉴스 진행을 했다는 이유로 포털 실시간검색어에 올랐던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은 국경을 넘어 프랑스 <르몽드> 기사에서도 다뤄지고, 일본, 홍콩, 타이에서도 화제가 됐다. 그저 안경 하나 썼을 뿐인데, 우리 사회는 왜 이렇게 호들갑을 떨었던 걸까. 바로 그의 행동이 ‘아름다움과 젊음’이라는 여성 아나운서의 이미지를 탈피하는 의도로 간주됐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여성의 안경 착용’을 외모를 덜 꾸민 상태로 여기는데, 그것은 가부장 남성이 기대하는 ‘여성적인 이미지’와 거리가 멀다. 우리 사회의 성숙도를 고려해보자면 충분히 ‘스캔들’이 될 만했던 것이다.


18세기에도 안경을 쓴 자화상을 그리면서, 아름다움과 젊음 밖으로 탈주한 여성 화가가 있었다. 프로이센 베를린 출신의 화가 안나 도로테아 테르부슈(1721~1782)가 그 주인공이다. 테르부슈는 초상화가였던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아, 어릴 때부터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날린 신동이었다. 성인이 된 후에도 슈투트가르트의 뷔르템베르크 궁정과 프로이센 프리드리히 2세의 궁정에서 일하며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다. 즉 아름다움과 젊음을 내세울 필요 없는 ‘천재 프로 화가’였던 셈이다.

18세기 파리에서도 강요된 애교

그걸 테르부슈 자신도 알고 있었던 걸까. 50대 중반이 된 어느 날 테르부슈는 대담한 자화상을 그린다. 그림 속 그는 아이를 돌보거나 뜨개질을 하는 기존의 ‘여성적’ 성역할을 수행하는 모습이 아니다. 대신 은발과 주름살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몸을 숙인 채 책을 읽다가 잠깐 고개를 든 모습이다. 테르부슈가 평소에도 꾸준히 책을 읽는 사람이라는 단서는 안정된 자세를 위한 발 받침, 그리고 베일 아래에 매달려 있는 외알 안경에서 찾을 수 있다. 지금도 ‘여성의 안경 착용’은 외모 관리에 무성의한 것으로 간주하는 판에 250년 전엔 오죽했으랴. 테르부슈는 자화상을 통해 자신의 용모보다는 교양과 지성을 강조했던 셈이다.


그런데 그게 바로 문제였다. 테르부슈의 지성을 앞세우는 ‘비여성적인’ 태도가 스캔들을 부른 것이다. 이 자화상을 그리기 12년 전인 1765년, 테르부슈는 그간 쌓아온 자신감을 바탕으로 ‘예술의 메카’인 프랑스 파리에 진출했다. 그의 그림은 곧 파리에서 주목을 끌었다. 살롱전에 작품이 전시되었고 프랑스 아카데미의 회원도 되었다.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드니 디드로도 테르부슈의 그림에 놀라워하며 구매자와 연결해주기도 하고 파리 예술계에서의 처신에 대해 조언하는 등 그의 앞길을 적극 도왔다. 그러나 테르부슈는 루이 15세의 궁전에 출입할 정도로 입지를 굳힐 수는 없었다. 디드로는 파리에서 테르부슈가 큰 명성을 얻지 못한 이유를 알아챘다며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이 나라에서 테르부슈가 대단한 화제를 불러일으키지 못했던 것은 재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젊음과 미모와 수줍음과 애교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테르부슈는 40대 중반에 들어선, 무뚝뚝하면서도 자신의 재능에 자부심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파리의 사교계는 ‘애교’를 여성의 미덕으로 중요시했는데, 그런 관점에서 테르부슈는 이래저래 걸맞지 않은 인물이었던 셈이다. 결국 테르부슈는 파리에 숱한 뒷말만 남긴 채 빈털터리로 고향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테르부슈뿐이었으랴. 애교와 교태 대신 지성을 연마하는 여성은 늘 지탄의 대상이었다. 위대한 철학자라는 루소조차도 이렇게 말했다. “여성이 받는 모든 교육은 남성과 관련이 있어야 한다, 남성의 마음에 들고, 남성에게 이로우며, 남성에게 사랑을 받고, 남성을 자랑스러워하고, 아들을 키우고, 돌보고, 조언하고, 위로하며, 쾌적하고 행복한 삶을 만들어주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여성의 의무이고 어릴 때부터 여성이 배워야 하는 것이다.” 가부장 남성의 기대에서 벗어나, 공부하고 토론하고 글을 쓰는 ‘새 길’을 개척하는 여성들의 모습에서 위기감을 느꼈던 걸까. 인류의 절반이 막 시작한 모험을 향해 고함을 지르며 공격하는 남성의 모습은 그림에도 기록이 남았다. 프랑스의 판화가 오노레 도미에(1808~1879)의 풍자화 <블루스타킹>이 그중 하나다.


한눈에 보기에도 어지러운 집안. 의자가 뒤집히고 슬리퍼와 빗자루가 바닥에 나뒹구는 난장판을 정리하기에도 바쁜 시간에 아이 엄마는 책상 앞에 앉았다. 청소를 시작하려는 찰나에 영감이 떠오른 듯, 그는 모든 걸 팽개친 채 무언가를 쓰고 있다. 이 순간 아기는 무얼 하고 있을까. 그저 버둥거리는 다리만 보일 뿐이다. 도미에는 그림 밑에다 이렇게 적었다. “어머니가 창조의 열풍에 빠져 있을 때 아기는 욕조에 고개를 처박고 있다.” 도미에는 아기 엄마가 가사와 육아를 팽개치고 ‘자기 일’에 바빠서 아이가 위험한 상태인지도 모르고 있다고 비꼰 셈이다.

한겨레

오노레 도미에, <블루스타킹> , 잡지 <르샤리바리> 1844년 2월26일치, 석판화, 파리국립도서관.

도미에가 저격한 구체적인 대상은 ‘블루스타킹’이었다. 블루스타킹은 사교와 교육을 위해 결성된 비공식적인 여성단체로, 18세기 중엽 영국의 시인 엘리자베스 몬터규가 일주일에 한번씩 문학 취향이 비슷한 여성들을 모아 모임을 연 것이 시초다. 독특한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식물학자 한 사람이 검은색 비단 양말이 아닌 검소한 파란 양말을 신고 모임에 나왔는데, 다른 살롱이었다면 복장 논란이 불거졌겠지만 몬터규의 살롱은 그렇지 않았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계급적 차별이 없는 살롱이라는 의미로 몬터규의 살롱을 ‘블루스타킹’이라고 불렀다.

여성의 지성 저격하는 한국 사회

하지만 이 ‘블루스타킹’이라는 용어는 곧 경멸적인 함의를 가지게 됐는데, 이유는 바느질과 뜨개질, 댄스와 피아노 이외의 활동을 하는 여자를 남성 대부분이 못마땅해했기 때문이다. 그 단어가 바다 건너까지 전해져 프랑스에서도 조르주 상드, 델핀 드 지라르댕 같은 여성 지성인들의 회합을 비꼬는 말로 ‘블루스타킹’이 사용되었다. 도미에가 잡지 <르샤리바리>에 ‘블루스타킹’을 풍자하는 석판화를 시리즈로 내게 된 것도 이런 적대적인 사회 분위기가 토양이 되었다. ‘블루스타킹’을 멸시한 도미에의 풍자화는 사회에 널리 유포되었고, 여성들은 ‘블루스타킹’처럼 될까 봐 지레 몸을 사리게 되었다. ‘개인적인 야망 때문에 남편과 아이들을 무시하는 어리석은 여성’이라는 비난을 받고 싶은 여성은 없을 테니 말이다.


21세기 한국에 사는 ‘블루스타킹’의 사정은 조금 달라졌을까. “여자가 너무 똑똑하면 인기가 없다” “너무 잘난 여자는 적을 만들고 남자들도 피곤해한다”는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통용되는 걸 보면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이러한 사회의 악평과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여성들은 ‘쿠션어’를 사용한다. 쿠션어는 틀린 내용 하나 없는 얘기를 하는데도 조심스러워하고, 자신의 주장이 단정적으로 들릴까 봐 애교와 이모티콘 같은 쿠션을 이어 붙여 문장을 맺는 어법이다. 쿠션어를 쓰면 적어도 ‘드세 보인다’ ‘싸가지 없다’는 비난은 받지 않는다. 문제는 이런 어법이 오히려 말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듣는 이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 힘들어 결과적으로 발화자에게 피해를 준다는 점이다. 여전히 도미에 그림 같은 한국 사회의 분위기가 또 한명의 테르부슈를 내쫓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이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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