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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남성들의 ‘이국 취미’였던 원주민 소녀

고갱, ‘마나오 투파파우(유령이 그녀를 지켜본다)’

서구 남성들의 ‘이국 취미’였던 원주

고갱, <마나오 투파파우(유령이 그녀를 지켜본다)>, 캔버스에 유채, 1892년, 버펄로 올브라이트 녹스 미술관.

3년 전 인도네시아 발리의 ‘뮤지엄 파시피카’를 방문했다. 애초 목적은 발리의 예술작품을 짧게나마 공부해보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타자의 시선’으로 본 발리를 다룬 작품들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20세기 초반 발리에 살았던 서구 남성 작가의 작품을 찬찬히 살피다가 쓴웃음이 나왔다. ‘아, 정말 이들은 영락없는 고갱의 후예로구나.’


프랑스 화가 폴 고갱(1848~1903)은 “원시의 생명력으로 문명의 때를 깨끗이 씻겠다”며 1891년 프랑스의 식민지인 남태평양 타히티로 떠났다. 낙원 같은 풍경과 졸지에 ‘원시인’이 된 어두운 피부의 사람들은, 고갱의 눈엔 예술적 영감과 세속적 수입의 원천 그 자체였다. 이제 고갱은 ‘원시의 생명수’를 들이켜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곧 고갱은 타히티의 13살 소녀 테하아마나와 결혼했다. 당시 그의 나이 44살. 본국에 아내와 아이들도 있었기에 자칫 ‘아동 성범죄’로도 몰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타히티’니까 괜찮다고 생각한 고갱은, 어린 신부를 얻어 마음껏 그녀의 누드를 그렸다. 그 대표작이 1892년에 그린 <마나오 투파파우(유령이 그녀를 지켜본다)>다.


고갱은 <마나오 투파파우>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한밤중에 집에 들어간 나를 전설 속 유령 ‘투파파우’로 착각한 테하아마나를 그린 것이다.” 하지만 당시 타히티인이 고갱의 설명을 듣고 그림을 보았다면 고개를 갸우뚱했을 것이다. 인류학자 벵트 다니엘손에 의하면 ‘투파파우’는 크게 번쩍이는 눈에 위턱에서 아래턱 쪽으로 엄니가 뻗친 무시무시한 짐승 형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갱의 그림 속에서 ‘투파파우’는 꼭 끼는 검은 모자를 쓴 왜소한 여자로 묘사됐다. 이유는 단순하다. 고갱은 타히티인이 아니라 유럽 사람이 보라고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마녀와 악령은 검은 모자를 쓴 노파의 모습이었기에, 고갱이 악령을 서구적으로 그린 건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를 방증하듯, 그는 그림을 완성하자마자 프랑스로 보냈다. 낯설고 이교적인 ‘투파파우’와 엉덩이를 드러낸 수동적인 원주민 소녀는 서구 남성들의 ‘이국 취미’를 한껏 만족시켰고, 덩달아 고갱의 이름값도 높여주었다. ‘예술을 위해 머나먼 섬나라까지 간 순교자’라는, 프랑스의 인정을 받기 위한 도구. 어쩌면 고갱에게 타히티는 그 정도의 의미였을지도 모르겠다.


발리의 ‘뮤지엄 파시피카’에서 만난 다른 서구 남성 화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고갱처럼 자신을 ‘문명인’ 또는 ‘탐험자’로 규정한 채, 발리의 ‘원시성’을 예찬한 그림을 그렸다. 그 대가로 그들은 ‘이국적인 작품’을 그린 화가로 서구 예술계에 이름을 남겼다. 네덜란드 여성과 결혼하면서 인도네시아(당시 네덜란드 식민지)로 오게 됐다는, 폴란드 화가 체스와프 미스트코프스키(1898~1938). 그는 발리에서 고갱의 <마나오 투파파우>를 쏙 빼닮은 작품 <비스듬히 누운 누드>를 그렸다. 그림 속 발리 누드모델은 고갱의 테하아마나처럼 ‘소녀라는 성’, 그리고 ‘유색인’이라는 두가지 타자화된 시선 아래 무방비 상태로 엎드려 있다. 벨기에 화가 아드리앵장 르마이외르(1880~1958)도 마찬가지다. 1935년 55살의 나이로 그림의 모델이 되어준 15살 발리 댄서와 결혼했다는 뒷얘기를 들으니 더더욱 고갱과 겹쳐 보일 수밖에 없었다. 고갱의 유산은 타히티를 넘어 발리에도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짙은 그림자를 남긴 셈이다.


이유리 예술 분야 전문 작가 sempre8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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