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끝으로 공 조종하는 이 쾌감 ‘못 참지!’
커버스토리: 불붙은 여성 축구
김소민 칼럼니스트 여자 축구 원데이클래스 체험
예능프로 인기 한몫…‘퀸컵 대회’ 2분 만에 모집 마감
단체운동 팀워크 매력적, “뛰다보면 해방감 느껴져”
지난 12일 서울 송파구 한 풋살장에서 열린 ‘위밋업’의 축구 원데이클래스 참가자들이 미니 경기를 치르고 있다. 윤동길 스튜디오어댑터 실장 |
나는 마흔여섯이 될 때까지 축구를 해본 적이 없다. 공도 안 만져봤다. 학교 다닐 때 남자아이들이 운동장을 차지하고 축구를 하는 동안 여자아이들은 흰 분필로 그은 선 안에서 피구를 했다. 피구에선 상대편 선수가 던진 공에 맞으면 ‘죽는’데, 살살 맞고 빨리 죽고 싶었다. 100m 달리기 24초, 매달리기 0초, 몸에서 제일 튼실한 근육은 괄약근인 내게 체육 수업은 굴욕을 맛봐야 하는 시간이었다. 달리기도, 매달리기도 점수를 매겼다. 그렇게 운동과 헤어졌다.
'여축' 난리네 난리
“미쳐, 미쳐, 정말 재밌어.” 여성 대상 스포츠 플랫폼인 ‘위밋업’의 풋살·축구 초보 원데이클래스에 참여하고 온 30살 친구가 “꼭 해보라”고 난리였다. <에스비에스>(SBS) 예능 프로그램 ‘골 때리는 그녀들’이 인기를 끌고 있고, 지난해 여자 대학 축구 대회인 ‘K리그 퀸(K-WIN)컵’ 참가 팀 모집이 신청 2분 만에 마감됐다. 지난 2월 여자 축구 대표팀이 아시안컵에서 준우승하면서 여자 축구 인기가 더 뜨거워졌다. 포털에 ‘여자 축구’를 치자 축구 강습 프로그램이 여럿 나왔다. 유튜브에도 ‘부산여자의 축알못 구제’ ‘키킷’(KICKiT) 등 여성들에게 축구 기본기부터 알려주는 강의들이 떴다. 그렇게 재밌나? 신혜미 위밋업 대표에게 40대 중후반에 몸치도 원데이클래스에 참여할 수 있냐고 물었더니 “50대도 온다”고 말했다.
지난 12일, 운동화에 추리닝 차림으로 서울 송파구에 있는 풋살장에 섰다. 그날 원데이클래스에는 나 빼고 20~30대 15명이 참여했다. 스트레칭 뒤 몸풀기로 얼음땡 같은 놀이를 했다. 형광색 조끼를 입은 4명이 술래다. 터치당하면 팔 벌려 뛰기 열번이다. 40년 만에 술래잡기를 하니 다시 애가 된 거 같다. 왜 이렇게 재밌는 걸까.
지난 12일, 서울 송파구 한 풋살장에서 열린 여성 스포츠 플랫폼 ‘위밋업’의 축구 원데이클래스 참가자들이 드리블 연습을 하고 있다. 윤동길 스튜디오어댑터 실장 |
납작한 뿔 모양 장애물 4개를 간격을 띄워 놓았다. 공을 짧게 차며 장애물 사이를 오가는 훈련을 할 차례였다. 공을 차는 게 아니라 주우러 다니느라 땀이 뻘뻘 났다. 그날 강사인 양수안나 위밋업 대표가 “괜찮다”고 위로했다. “매번 공을 짧게 짧게 차줘야 해요. 방향 전환할 때는 앞꿈치를 띄워야 해요. 공을 받을 때는 공이 신발 깔창이 아니라 그 윗부분에 닿게 하세요.” 양 대표가 발 안쪽 면을 가리켰다. 내 뒤에 섰던 김정민(25)씨가 내 공을 주워줬다. 괜히 서로 보고 웃었다.
물 마시는 시간에 정민씨에게 말 걸었다. 무역회사에 다니는 그는 이번이 원데이클래스 두번째라고 했다. “여학교를 나와서 축구할 기회가 없었어요. 축구 보는 건 좋아했어요. 토트넘 팬이에요. 2년 전부터 축구를 직접 해보는 게 버킷리스트에 있었는데 어색해서 망설이다가 이번에 용기 냈어요. 1년 전부터 혼자 아침마다 30분씩 달리기를 해왔어요. 복잡한 마음이 차분해지거든요. 그런데 혼자 뛰면 웃을 일은 없어요. 축구는 같이 웃을 일이 많아요. 팀워크가 매력인 거 같아요.”
승부 겨루는 쾌감
진짜 그랬다. 정민씨랑 짝을 이뤄 뛰면서 공을 주고받는 ‘러닝 패스’를 하는데 오랜만에 깔깔 웃었다. 3월 바람에 정민씨 머리카락이 날렸다. 공 차는 게 익숙하지 않아 우선 손으로 던졌다. 운동장 한바퀴를 돌자 서로 합이 맞아갔다. “와, 우리 진짜 잘한다.” 그새 공이 이탈했다. 이게 대체 뭐지? 누군가 내가 던진 공을 받고 그가 던진 공을 내가 받는 것만으로 이렇게 즐거울 수 있는 건가? 양 대표가 말했다. “우리 편이 어디 있는지 항상 봐야 해요. 공을 뺏겨도 괜찮아요. 바로 수비로 전환하면 돼요.”
이어 슈팅 연습을 했다. 양 대표가 던진 공을 발가락 끝으로 찼더니 통증이 찌릿하게 무릎을 타고 왔다. “자기 걸음 보폭이나 리듬을 잘 보세요. 한쪽 다리가 버텨줘야 다른 발을 마음대로 쓸 수 있어요.” 한 여자가 공을 차는데, 나랑 다르다. 텔레비전 축구 경기에서 보던 포즈로 공을 차 골대에 넣은 안소정(32·프리랜서 작가)씨가 앉아 물을 마셨다. 어떻게 그렇게 잘 차냐고 했더니 “두달째 격주로 수업에 참여한다”고 말했다. 그는 주로 혼자 일한다. 때로는 고립감이 덮친다. “축구엔 전혀 관심 없었어요. 다이어트 때문에 시작한 거예요. 중고등학교 때 운동장은 남자애들 차지잖아요. 이렇게 뛰어보니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지는 해방감이 들어요. 첫날 수업 듣고 집에 갔는데 남편이 저한테 이렇게 기분이 ‘업’돼 있는 거 처음 본다고 하더라고요. 체력도 확실히 좋아졌고 실력이 쌓여가는 걸 느껴요. 공을 내 발로 조종하는 성취감이 있더라고요.”
미니 경기 전 파이팅을 외치는 참가자들. 윤동길 스튜디오어댑터 실장 |
이번엔 진짜 경기다. 5명씩 한 팀으로 7분씩 두 경기를 뛴다. 골키퍼는 돌아가며 했다. 양 대표가 “위로, 아래로, 괜찮아 서로 말해주는 것도 작전”이라고 했다. 수비가 뭐고 공격이 뭐냐. 나는 무작정 공만 쫓아다녔다. 잡생각이 모두 사라졌다. 그 순간만큼은 공과 나만 있는 거 같았다. 그게 문제였다. 자꾸 상대 팀에 공을 보냈다. 내가 골키퍼를 하는데 공이 굴러온다. 공을 잡으려고 했는데 오히려 내 손에 공이 밀려 골대 깊숙이 들어갔다. 나는 골키퍼를 가장한 상대 팀 공격수인가? 우리 팀 선수들이 “괜찮아, 괜찮아” 해줬다.
등 번호 10번이 내게 패스했다.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내 발 앞에 떨어졌다. 나는 그 공이 폭탄인 것처럼 차냈다. 공은 그대로 10번에게 돌아갔다. 6번이 나서 공을 몰고 가더니 시원하게 골인했다. 왜 이렇게 기쁘지? 우리 팀 선수들이 다 ‘와!’ 했다. 이 6번 선수의 이름은 박가을, 33살 프리랜서다. “아휴, 겨우 넣었어요. 지난해 10월부터 격주로 여기서 축구하고 있어요. 원래 축구를 좋아해요.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남자아이들이랑 축구했는데 그 뒤로는 기회가 없었어요. 상대랑 부딪혀가며 승부를 겨루는 게 두근거리고 재밌어요.” 그랑 같이 축구를 배우고 있는 친구 주소현(33)씨는 “처음 경기 뛸 때는 1~2분 만에 토할 거 같았는데 이제 끝까지 뛸 수 있다”며 “축구를 더 잘하고 싶어 피트니스 퍼스널 트레이닝도 받고 있다”고 했다.
경기를 마친 참가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윤동길 스튜디오어댑터 실장 |
일단 해보세요
경기가 끝나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데 끝이 아니었다. 보강 운동을 했다. 기마 자세로 서서 옆걸음으로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발목 강화 운동으로 앞꿈치를 들고 걸었다. “이거 열심히 하면 슈팅 세게 때릴 수 있어요!”(양수안나 대표) 스쾃 자세로 운동장 중간쯤 가다 그만두려 했는데 그 말에 끝까지 갔다.
1시간30분 수업이 끝나고 위밋업 신혜미 대표와 양 대표가 공, 조끼 따위를 챙겼다. 두 사람은 고등학생 때 상대편 축구 선수로 만났다. “1991년 제가 중학생 때 한창 나라에서 여자 축구 육성하려 했어요. 당시 체력장에서 특급 받은 애들을 차출해서 팀을 꾸리는 바람에 저도 선수가 됐어요. 축구의 매력에 빠져버렸어요. 팀 스포츠로 이만한 게 없어요. 내가 실수하면 우리 팀 다른 선수가 커버해주고, 내가 공 뺏기면 우리 팀이 뺏어주고.”(신혜미 대표) 그는 “한번 빠진 분들은 풀 착장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며 “요청이 많아 정규반도 만들었다”고 했다. 두 사람은 대학 때까지 선수로 뛰었는데 그 뒤 길이 갈렸다. 신 대표는 대학원에 갔고 양 대표는 실업 팀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소속 팀이던 ‘숭민 원더스’가 해체된 날, 양 대표는 울었다. “고등학교 때 축구가 좋아서 시작했는데 ‘여성’이 붙으면 비인기 종목이 돼요.” 두 사람에게 ‘축알못’을 위한 팁을 부탁했더니 그랬다. “일단 해보세요. 그게 최고예요. WK리그(전국여자축구선수권대회)를 관람하는 것부터 시작해도 좋아요.”
평생 처음 축구공을 차본 다음날, 온몸 근육이 다 아우성쳤다. 어기적어기적 일어나 WK리그를 검색했다. 4월2일 시작한다. 인생 첫 축구경기 직관을 해보고 싶어졌다.
김소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