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보는 ‘라이언 아저씨’ 강신일 “너무 바빠 미안합니다”
조연이 주연이다-연극·영화·드라마 종횡무진 강신일
연극 <레드> 9일 개막, 영화 <집이야기> 촬영
드라마 <비켜라 운명아>까지 몸이 열개라도 모자라
“연기 인생 39년 작품 100편 훌쩍
출연 제의 고마워 되도록 다 출연
드라마 ‘태후’ 이후 팬층 넓어져
팬들이 얼마나 고맙고 또 미안한지…
좀더 다양한 인간군상 해 보고파
후배들 위한 아카데미 열고 싶어요”
배우 강신일이 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
2시간 인터뷰 내내 그는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10번은 했다. 사진 촬영을 하면서 “제가 포즈를 잘 못 잡아서 미안합니다”로 시작한 ‘미안 시리즈’는 인터뷰 말미 “제가 말이 좀 느리죠. 미안합니다”로 끝을 맺었다. 왜 자꾸 미안할까. “다른 사람에게 폐 끼치는 걸 싫어해요. 제가 말이 느려 인터뷰 시간이 두배가 걸렸으니 미안하죠. 하하.” 그런 그가 요즘은 매일 미안하다. 연극 <레드>와 독립영화 <집이야기>, 일일드라마 <비켜라 운명아>(한국방송1)를 본의 아니게 동시에 하고 있다. “강신일이어야 한다”는 독립영화·연극 제작진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바쁜 일정에 모두를 힘들게 하는 건 아닐까, 미안하다”고 했다. “내 몸에게도 미안하고요.”
이 한없는 ‘미안함’은 강신일을 ‘믿맡믿보’(제작진이 믿고 맡기고 시청자는 믿고 보는)로 만든 비결이다. “미안하지 않게 더 열심히, 더 최선을 다해”왔기 때문이다. 9일 개막한 <레드> 첫 공연 때도 그는 2인극이라 분량도 많고 대사도 어려운 화가 ‘마크 로스코’ 역할을 압도적으로 해냈다. 영화와 드라마를 하면서 소화해낼 수 있는 역할이 아니다. 무대, 스크린, 브라운관을 종횡무진하며 곳곳을 빛내는 배우 강신일을 서울 최근 대학로와 예술의전당에서 두차례에 걸쳐 만났다. “미안합니다. 두번이나 왔다 가게 해서.”
39년 내공으로 연극, 드라마, 영화를 종횡무진
연극 '레드' 신시컴퍼니 제공 |
<레드>로 새삼 확인한 강신일의 내공은 그냥 얻어진 게 아니다. 1980년 극단 ‘증언’을 설립한 그는 39년간 드라마와 영화, 연극을 100편 넘게 출연했다. “찾아주는 게 고마워서, 되도록이면 다 출연합니다.” 이 많은 작품에서 그는 경찰 반장(영화 <공공의 적>)이었다가, 실미도 대원(영화 <실미도>)이었다가, 강직한 대통령(드라마 <신의 선물-14일>)에, 재벌그룹 고문변호사(<비켜라 운명아>) 등 수많은 역할을 경험했다. 흔히 중견 배우들이 누군가의 아버지로 규정되는 것과 다르다. “아버지만 하는 게 꼭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아버지 역할을 제대로 못 했나 보죠. 하하. 그래도 좋게 해석한다면, 어느 한 캐릭터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건 다행인 거고 고마운 거죠.
모든 역할을 그가 역할을 생동감 있게 만든다는 게 중론이다. 피디들은 “그의 연기에는 묵직한 울림이 있다. 그가 맡은 역할들은 저마다의 사연이 도드라진다”고 말한다. 그와 작업한 적이 있는 한 드라마 피디는 “표정이나 행동에서 큰 변화를 주지 않지만, 쳐다보는 눈빛이라든지, 톤의 높낮이 등의 변화로 다 다른 인물이 된다”고 말했다. 또렷한 발음과 깊은 발성도 그의 연기를 집중해서 보게 만든다. 그는 부정하지만. “발음이 정확하고 목소리가 좋은 것이 장점일 수도 있겠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에요. 혀가 짧고 말이 어눌해도 이 사람이 자기가 해야 하는 그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고 진심으로 표현해 낸다면 그게 최고의 연기죠.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한해 한해 자꾸 발음이 새요. 하하.”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한 장면. 프로그램 갈무리 |
그는 처음부터 연기 잘하는 배우였다. 고등학생 때 ‘첫 작품’인 교회 무대에서부터 주연을 맡았다. 데뷔작인 연극 <칠수와 만수>(연우무대·1986년)에서도 문성근과 함께 주연을 해냈다. 이 연극은 당시 400회 이상 공연하며 누적 관객 5만명을 모았다. “너무 함께하고 싶던 연우무대에서 그저 허드렛일만 해도 행복하다고 생각했는데, 첫 공연에서 주연을 맡아서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냈었죠.” 그를 대중적으로 알린 영화 <공공의 적> 출연도 강우석 감독이 연극 <날 보러 와요>에서 강신일을 본 뒤 먼저 연락했다. 황정민도 “후배 연극인들에겐 강신일이 출연하는 연극은 필독서와 같았다”고 말한다.
모두 다 그를 연기 잘한다고 인정하지만, 주연을 도맡았던 연극에서와 달리, 대중매체에서 ‘강신일의 시대’라고 불리는 순간은 없었다. 그는 “아쉬움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라면서도 “주연 욕심보다는, 40살에 영화로 넘어와 내가 나오는 장면만 잠깐 찍고 빠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있었다. 영화든 드라마든 처음부터 끝까지 한 인물의 삶이나 감정을 심도 있게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작업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제가 처음으로 한 연극은 교회에서 1주일간 소외된 곳을 돌면서 하는 것이었어요. 대학가서도 내내 연극을 하다가 군대에 갔는데, 제대 즈음에 연기를 직업으로 삼자고 결심했어요.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연극을 하게 됐으니 그뿐이에요. 저로 인해 행복하다면, 그거면 됩니다.”
연기 잘하는 배우에서 귀여운 ‘라이언 아저씨’로
강신일은 카카오톡 이모티콘 라이언과 닮았다고 해서 '라이언 아저씨'라 불린다. |
몇년 전부터 강신일은 인기 많은 ‘아저씨’가 됐다. 2016년 <태양의 후예>(한국방송2) 출연 이후 초등학생들이 알아볼 정도로 팬층이 넓어졌다. 별명도 생겼다. ‘라이언 아저씨’. 카카오톡 이모티콘 라이언과 닮았다고 해서 누리꾼들이 비교 사진을 올리기도 한다. 그가 이날 들고 온 가방에도 라이언 인형이 달려 있었다. “3년 전에 팬이 닮았다고 줬어요. 동의하진 않지만 비슷하다고 하니까. 그리고 고마워서 달고 다녀요. 나를 좋아해 준다니 얼마나 고맙고 또 미안한지….” 아니 왜 또 미안한가. “하필 나를 좋아해서. 하하.”
강신일과 대화를 하고 있으면, ‘명상 선생님’과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다. 잔잔한 사람과 얘기하다 보면 마음도 평온해진다. 39년간 수많은 일이 있었겠지만, 그가 늘 존재감을 발휘해온 데는 스스로 중심을 잘 잡는 자리관리도 한몫했을 것이다. “지난 석달 동안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이 하루도 없었어요. 그러나 피곤해도 무대에 서면 즐겁고 행복하고 카메라 앞에 서면 기분 좋아요. 물론 힘들긴 하지만 그 과정을 거쳐야 감동을 느낄 수 있겠죠. 불편한 것들이 치고 올라오면 다스려야죠.” 그래도, 그래도, 스트레스 해소법이 있지 않느냐고 거듭 물었더니 대답도 강신일 답다. “숨을 크게 내쉬면 돼요. 책을 읽거나. 기타를 치면서 소리 한번 꽥 질러보고.” 시사뉴스를 꼭 챙겨보고 역사에도 관심이 많은 그는 “정치적인 성향은 없지만 권력자는 누군가 견제해야 한다는 시각을 예술인도 갖고 있어야 한다.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가치를 우선하는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태어난 지 60년, 데뷔 40년, 결혼한 지 30년을 맞는 2020년을 잘 맞기 위해 2019년을 “미안하지 않게” 열심히 보낼 생각이다. “강직한 리더 역할을 많이 맡았는데, 악역, 멜로, 코미디 등 좀더 다양한 인간 군상을 표현하고 싶어요. 장기적으론 젊은 친구들을 위해 극장과 아카데미를 열고 싶은 바람도 있고요.” 39년을 돌아보면 “고마운 마음뿐”이라는 ‘고마운’ 강신일은 앞으로도 계속 종횡무진 누빈다.
드라마 <태양의 후예>의 한 장면. 프로그램 갈무리 |
강신일이 꼽은 ‘내 인생의 작품’
강신일이 데뷔 40년간 출연한 작품은 100편이 넘는다. 모든 작품에 애정을 쏟았지만, 그래도 지금의 강신일을 만든 특별한 손가락들은 있다. ‘무대’별로 한편씩 강신일이 꼽았다.
연극 <칠수와 만수> “극장 바닥을 쓸고 청소하고 무대 뒤에서 허드렛일을 해도 행복하다고 다짐했던 연우무대에서 들어가자마자 주인공을 하게 됐다. 연우 무대에서 연기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행복했다.” 1986년 <칠수와 만수>는 80년대 암울한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현실 고발 연극으로 당시 400회 공연에 관객 5만명을 동원하는 등 화제를 모았다.
영화 <공공의 적> “영화를 해야겠다고 본격적으로 마음먹고 시작한 작품이다. 배우로서 영화 안에서 내가 뭔가를 하고 있구나 느끼게 해줬고, 강신일을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게 됐다. 은인 강우석 감독을 만나게 된 작품이기도 하다.”
드라마 <오 필승 봉순영> <태양의 후예> 여러가지가 있지만, 코미디를 할 수 있어서 좋았던 <오 필승 봉순영>과 캐릭터가 너무 마음에 들었던 <태양의 후예>다. <태양의 후예>는 강직하면서도 아버지로서 세속적인 모습도 있고, 그러다 결국 딸의 편을 들어주는 역할이 좋았다. 김은숙 작가에게도 고마운 작품이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