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나서는 남성들 많아졌으면”…일상 속 ‘먼지차별’ 드러내다
[토요판] 은유의 연결
‘며느라기’ 작가 수신지
결혼생활 불합리 그린 웹툰
동명 웹드라마로 만들어져
누적 1700만뷰 기록 ‘인기’
매체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활동하는 수신지 작가가 보내온 자신의 캐리커처. 태블릿피시로 <며느라기> 를 보면서 얼굴을 붉히고 있다. “실제 사람이 연기하는 걸 보니까 더 열받는다는 말도 있더라”고 그는 말했다. |
그냥,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학창 시절 무슨 대회에 나가면 상을 곧잘 받았다. 화가가 되려고 서양화과에 갔다. 졸업전시회에 찾아온 출판사 편집자의 권유로 그림책에 삽화를 그렸다. 한참 일하던 이십대 후반에 난소암에 걸렸는데 투병기로 그냥 한번 그려본 만화 <3그램>(2012)이 데뷔작이 되었다. 필명은 수신지. 별 뜻 없이 본명을 조합한 이름이다.
그냥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연애할 때는 여자의 핸드백도 들어주던 남자가 결혼하면 여자가 부엌에서 혼자 일하는데도 어째서 무신경한지. 왜 명절엔 남자 집에 먼저 가는지. 은근히 서럽고 말하면 치사해 ‘먼지 차별’로 불리는 일들로 <며느라기>(2017)라는 만화를 그려서 개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에 연재했다. 60만 팔로어의 사랑을 받은 이 웹툰은 동명의 웹드라마로 제작돼 지난해 11월부터 카카오티브이(TV)로 방영, 누적 1700만뷰를 기록했다. 설과 추석은 <며느라기> 대목이다. 이후 낙태죄의 문제점을 이야기한 <곤>(2019)까지, 그의 작품을 본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던 일상 풍경을 불합리한 ‘사건’으로 감각하기 시작했다. 대단한 갈등도 급진적 대사도 없다. 무심한 듯 집요한 ‘그냥’의 힘으로 가부장제에 실금을 내고 있는 수신지 작가를 지난 9일 자택에서 만났다.
무심히 지나치던 풍경에서
‘말하면 치사한’ 차별 짚어내
여성들에게 깊은 공감 불러
“부인도 가만히 있는데 굳이?
먼저 나서는 남성 많아졌으면”
며느라기 이후 4년, 명절에 각자 집으로 간다
―드라마가 얼마 전 종영됐죠. 댓글 반응이 뜨겁더라고요. 웹툰 때랑 비교해서 어떤 차이가 느껴지시나요?
“웹드라마를 계속 원작과 비교하면서 보시는 분들이 많았고요. 실제 사람이 연기하는 걸 보니까 더 열받는다고 울었다는 분도 계시고요.(웃음) 확실히 영상이 더 널리 퍼지는 것 같아요.”
―<며느라기>도 히트를 쳤고 <82년생 김지영>이 책과 영화도 잘되고 세상이 많이 바뀐 것 같으면서도 댓글 보면 논의가 제자리 같기도 해요.
“가끔 자기네 집안 행사 문화가 바뀌었다고 피드백을 주는 분들이 있고요. 명절날 번갈아서 양가에 가는 부부를 제 주변에선 많이 봤어요. 그 순서가 별거 아니라면 아니지만 또 중요한 거잖아요. 그런데 만화나 드라마나 ‘요즘 저런 집이 어디 있어’라는 반응은 늘 있어요. 그러다가 또 누군가가 ‘저 정도만 돼도 좋겠다’ 그러면 그런 의견이 막 달리고. 이게 계속 반복돼요.”
―명절 풍속도가 많이 달라지긴 했어요.
“코로나도 있어서 급물살을 타지 않을까요.”
―<며느라기>를 쓴 작가의 결혼생활은 어떨지 사람들이 궁금해하죠. 며느라기 코멘터리 <노땡큐>(2018)를 내기도 하셨는데요.
“북토크 가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시어머니가 뭐래?’(웃음) 시아버지도 아니고 시어머니만 물어봐요.”
―고부 갈등 프레임이 익숙하니까 그렇게 보는 거네요.
“만화 연재할 때 남편이나 시부모님 몰래 연재할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정말 많았어요. 근데 그게 제 직업이잖아요. 시부모님은 작품이 드라마도 되고 하니까 좋아하고 자랑하지 갈등이 있진 않거든요.”
―작가님 제사와 명절은 어떻게 보내세요?
“제사는 자연스럽게 없어진 것 같아요.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저도 (2014년에) 결혼하고 처음엔 명절날 당연하게 남편 집 먼저 갔거든요. 연휴 첫날 가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음식 하고 차례 지내고 밥 먹고 점심 먹고 올라와서 우리 집에 가고. 그때는 진짜 생각을 별로 못 했어요. 좀 문제가 있다 해서 양가를 번갈아 가다가 지금은 각자 자기 집으로 가요.”
―<며느라기> 이후 변화인가요?
“만화를 시작할 때만 해도 좀 문제가 있다는 각성 정도였죠. 연재하면서 댓글을 보니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걸로 고통받고 바꾸고 싶지만 못 바꾼다는 걸 느낀 거예요. 사실은 누가 시가 먼저 가라고 말한 사람도 아무도 없거든요, 그게 며느라기가 아닐까 싶은데.”
‘며느라기’란 사춘기, 갱년기처럼 시가 식구들한테 예쁨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어 과도하게 희생하며 무리하는 시기를 뜻한다. <며느라기> 주인공 민사린은 결혼 이후 불합리한 현실에 눈뜨며 서서히 며느라기에서 벗어난다.
―명절에 각자 집으로 가는 건 얼마나 됐어요?
“한 2년 정도.”
―불합리하다는 인식에서 행동으로 나갈 수 있었던 힘이 뭐였을까요?
“그게 남편에게 달려 있다는 건 아니지만 사실 남편이랑 의견이 맞았던 게 큰 요인이긴 하죠.”
―어느 인터뷰 보니까 남편이랑 사이가 좋으시다고요.
“연애를 7년 정도 했어요. 동갑이고 친구 같아요.”
―댓글들 영향도 컸을 것 같아요. 나만 겪는 일이 아니란 게 용기를 주잖아요.
“네. 남편도 댓글을 많이 봐서 생각이 변했을 수도 있어요. 만화든 드라마든 사람들이 남편한테 보여주려고 되게 노력을 하더라고요. 근데 안 본대요. 이거 뻔하다 싸우자는 거냐 이러면서 안 보고, 그런 댓글을 남편도 많이 보면서 아, 정말 많은 여성들이 이 일로 고통받는구나, 그냥 명절 하루 일이 아니구나 아는 거죠.”
카카오티브이(TV) <며느라기> 화면 갈무리. |
‘고구마 같은 현실’ 관심과 공부로 파악
―작가님한테는 어떤 소재가 작품이 되는 거예요?
“그냥 제 마음에 다가오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요. <곤>은 <며느라기> 연재할 때 사람들이 아이 키우는 이야기가 나오면 좋겠다고 제보도 많이 해주셨어요. 제가 아이가 없어서 작품으로 할 엄두를 못 내고 있다가 우연히 낙태죄에 관한 팟캐스트를 들었는데, 육아와 낙태죄 두가지를 접목하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생각해보니 희한하네. 벌은 여자가 받고 성씨는 남자가 받고.” <곤>에 나오는 대사가 인상적이었어요. <며느라기>도 ‘고구마’ 같은 현실을 잡아낸 ‘사이다’ 대사가 돋보였고요.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이런 디테일을 어떻게 잡아내시는 거예요?
“하나의 에피소드를 예로 들면, 저도 낙태죄가 있다는 건 알지만 큰 문제라고 생각은 안 하고 그냥 있다가 팟캐스트를 듣고서 <배틀그라운드>라는 책을 찾아 읽어보고 이게 진짜 문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됐죠.”
―비결은 관심과 공부네요?
“네. 그리고 검색. 문제라고 생각했을 때 관련 책을 읽고 사례를 찾아보고 뉴스를 검색하다 보면 조금씩 가지를 칠 만한 것들이 생기잖아요. 성은 남자 성으로 한다, 낙태하면 여자가 처벌받는다, 이게 둘 다 불합리하지만 따로 떨어져 있을 때보다 합쳐놓으면 비슷한 카테고리가 돼요. 얼마나 이상한지 더 잘 보이잖아요.”
―여성이라서 저절로 아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들 생각하는 것 같아요.
“맞아요. 어느 날 갑자기 깨달음을 얻는 건 아니에요.”
카카오티브이(TV) <며느라기> 화면 갈무리. |
“부인 뒤로 숨지 말고 나서는 남자 많아졌으면”
“그냥 보통의 남자들이죠.”
―남자들이 왜 그렇다고 생각하세요?
“안 그럴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눈치를 봐서 행동할 필요를 느끼는 순간들이 살면서 별로 없지 않았을까요. 남자들이 만약에 자기가 해야 되는 상황이었으면 바꿔야겠다고 생각했겠죠.”
<며느라기>에서 무구영은 시할아버지 제사 준비를 하는 아내에게 “내가 빨리 가서 도와줄게”라고 한다. 이에 민사린은 “구영아, 나는 할아버지 얼굴 본 적도 없거든. 내가 너를 돕는 거라고 생각되지 않니?”라고 말한다. 무구영에 대해 위근우 칼럼니스트는 ‘무골호인 같은 태도 안의 폭력성’을 탁월하게 드러낸다고 지적했다.
―평소에 남자들을 관찰하면서 캐릭터를 구상하나요?
“제가 어느 진보단체에서 강의를 했을 때, 질문 시간에 여성들이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힘든 점들을 이야기하니까 한 남자 대학생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하는 일이 뭐가 왜 그렇게 힘든가요?’ 그러는데 제가 정말 너무 말문이 막혔어요. 그런 식의 발언을 듣는 경우도 많이 있었는데 다 되게 나이 많은 남성분들이었거든요. 제가 그 단체에 오는 분들은 다를 것이란 기대가 있었나 봐요. 그 청년을 생각하면서 <곤>에 나오는 노민아 남편 캐릭터를 만들었어요. 출산 계획이 없을 땐 엄마 성으로 공정하게 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막상 자기한테 아이가 생겼을 때 엄마 성으로 할 수는 없지 않냐고 하는 사람이요.”
―자기 문제가 됐을 땐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 거네요.
“제가 남자 지인이랑 부성우선주의 얘기를 하는데, 부인이 남편 성이 더 예쁘니까 굳이 자기 성 안 써도 된다고 했다는 거예요. 근데 자기가 부성우선주의가 문제라고 생각하면 먼저 부인에게 제안할 수도 있잖아요. 다른 모든 사회문제에도 관심이 많고 적극적이고 자기 의견을 내는 사람이 왜 가정 문제에 있어서만은 부인 뒤로 한발 빼는지.”
―얼핏 상식 있어 보이는 남자들이 가부장제의 불합리한 관행의 공모자이고 수혜자라는 게 작가님 작품에서 잘 보여요.
“남자들이 굳이 부인도 가만히 있는데 내가 팔 걷고 나서서 해야 하나? 이러는데 저는 나서는 남성들이 좀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며느라기> 의 한 장면. 귤프레스 제공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만화 SNS 연재에서 출판 유통까지 직접 해
―민감한 이슈도 작가님 그림으로 보면 좀 편안하게 다가와요.
“그건 만화 자체의 특성 같아요. 일종의 학습만화잖아요. 어떤 것을 설명하는 데에 너무 장점을 가진 장르죠. 더군다나 제가 에스엔에스라는 플랫폼을 통하니까 두개의 궁합이 잘 맞는 거예요. 어떤 이야기를 만화로 쉽게 만들어서 에스엔에스를 통해 퍼트린다. 시너지가 있어요.”
―작가님 작품에 대해 ‘담담하게 가부장제를 고발한다’ 이런 평이 주를 이뤄요.
“담담하단 얘기 많이 들어요. <3그램>도 담담하다는 평을 많이 들었고.”
―투병기도 담담하게 그리시고.
“원래 성격이 좀 심드렁~.(웃음)”
―천성인 거네요.
“저는 무슨 덕후도 아니고 취미도 없고 사람이 정말 특징이 없거든요. 그게 되게 단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그러다 보니까 제가 만들어내는 것들이 사람들이 받아들일 때 거부감 없이 그냥 받아들이지 않나….”
―긍정적인 편이세요?
“네. 원래 성격도 그랬는데 아프면서, 죽을 수 있다는 걸 한번 느낀 거잖아요. 이 시간 자체가 언젠가 끝이 있다는 것을 당연히 알지만 느껴보니까 힘들게 살고 싶지 않고 그냥 좋게 좋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있어요.”
―한번 크게 아프고 나면 가치관이 달라진다고 하잖아요.
“시간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어요.”
―시간의 유한성?
“네. 작업을 시작하면 2년 정도 걸려요. 준비하고 연재하고 책으로 내기까지.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면서 2년을 보내는 게 싫은 거예요.”
―귤프레스 출판사도 운영하시죠. 에스엔에스에 연재한 작업물을 직접 출판하시고. 기성의 시스템에 기대지 않고 직접 만들어서 도전적으로 하세요.
“그렇죠. 멋있지 않아요?(웃음)”
―그 멋있음은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웃음)
“독립출판을 예전에도 했었는데 사업자등록 하고 규모가 좀 커진 거죠. 연재할 때 출판사에서 막 제안이 많이 왔는데 전체적인 그림을 봤을 때 직접 하는 게 더 재밌을 것 같았어요. ‘민사린닷컴’을 만들어서 책이랑 굿즈를 제작하고 선주문을 받고 재고 없이 다 판매했어요. 그렇게까지 일을 벌인 건, 좀 더 멋있게 해보자, 여성으로서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여성 작가로서 여성의 목소리를 내는 작품 활동을 하는 것에 대한 부담은 없으세요?
“그렇지는 않고요. 사실 제가 <며느라기>를 그리면서도 페미니즘적인 콘텐츠라고 생각하고 시작한 게 아니거든요. 어쩌다 보니 그 카테고리에 꽂혀 있는 책이 됐더라고요. 오히려 제가 지식도 없는데 그중에 한 사람이 됐다는 게 괜찮을까 생각해요.”
―내가 여기 있어도 되나?
“네. 뭔가를 알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뭔가를 만들어낸 게 아니라 일단 만들었는데 이게 그런 이야기를 담고 있는 거였어? 하며 뒤늦게 공부하게 된 경우라서요. 내가 자격이 있나 싶고, 사실 저는 너무 고맙죠.”
―명예의 전당에 올라가 있는 기분인가요?(웃음)
“맞아요. 어쩌다 뒷걸음질하다가 잡은 것처럼.(웃음)”
수신지 작가는 매체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활동한다. 그냥 그 작가를 아는 것보다는 그 작품을 아는 게 독자로서 더 좋은 것 같다고 생각한다. 작품보다 작가가 좀 더 매력적인 경우도 있는데 내가 그런 경우는 아니라고 스스로 객관적인 평가를 내렸다. 또 처음 낸 만화책이 투병기였기 때문에 드러나고 싶지 않은 점도 있었다. 아팠던 걸 몰랐던 사람들이 이 책을 계기로 알게 되는 게 그렇게 달갑지는 않았다고 했다.
언뜻 민사린의 느낌이 묻어나는 수신지 작가는 느릿한 어투에 ‘그냥’이란 말을 습관적으로 쓴다. 그냥은 ‘어떤 작용을 가하거나 상태의 변화 없이 있는 그대로’라는 뜻이다. 대수롭지 않게 행동하고 복잡하지 않게 그려내는 그냥 사람, 그냥 만화. 그래서인지 읽다 보면 그냥 동화된다. 태양이 나그네의 옷을 벗기듯 자연스럽게 변화를 일으키는 그냥의 마법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만화에 나오는 일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니까 그냥 사실대로 알아줬으면 좋겠다”며 창작의 변을 밝혔다. 마지막으로 물었다. 왜 있는 그대로 알아야 할까?
“같이 살기 위해서인 것 같아요. 이번에 코로나 겪으면서 더더욱 사람들이 다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잖아요. 코로나 때문에 어려운 사람은 더 살기 어려워졌다, 그런 뉴스가 나오는데 그걸 보면서 내가 행복하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그냥, 일단 그 뉴스를 보는 순간이 안 행복하잖아요. 다 같이 잘 살아야 나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녹취 홍혜원
▶ 은유: 글 쓰는 사람. 글쓰기 수업도 한다. <글쓰기의 최전선> <다가오는 말들>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등을 펴냈다. 2005년부터 여러 매체에 칼럼을 쓰고 인터뷰를 해왔다. 성폭력 피해 여성, 국가폭력 피해자, 성소수자, 산재 노동자까지 다양한 이들을 만나고 기록했다. 사람을 살게 하는 말을 모으고 나누는 인터뷰를 하고 싶다. ‘은유의 연결’은 4주에 한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