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키 설산 넘어 쪽빛 호수들 향해 칙칙폭폭
이기적인 여행
캐나다 서~동 4500㎞ 횡단열차 체험기
밴쿠버에서 토론토까지 4박5일 열차 숙식
각국서 모인 여행자들 어느새 ‘한가족’
재스퍼 등에선 하차, 거리 산책 기회도
밴쿠버에서 재스퍼로, 로키산맥을 넘어가며 만난 캐나다 로키 최고봉 로브슨 산(3954m). 만년설로 덮인 거대한 바위산이다. 이병학 선임기자 |
캐나다 중부 서스캐처원주의 주도 새스커툰역에서 열차가 잠시 멈춰 섰다. 밴쿠버에서 출발해 토론토로 향하는, 캐나다 횡단열차 ‘캐나디안 라인’ 열차를 탄 지 사흘째 되는 날이다. 캐나다 로키산맥의 아름다운 설산 경관은 이미 지났고,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황무지 평원이 이어지는 구간이다. ‘장기간 열차 여행은 역시 답답하고 지루해’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때다. 무심코 둘러본 새스커툰역 대합실, 벽에 붙은 포스터에 적힌 글귀가 가슴을 쳤다.
‘아름다운 것을 만나는 데 지름길은 없다.’
캐나다 국영철도 비아레일이 내세운 구호다. 포스터 아래쪽에는 ‘기차로 캐나다를 횡단하며 지형의 변화를 감상하고, 그저 지나가는 시간을 즐겨 보라’고 적혀 있었다. 장거리 열차 여행에 지루함을 느끼는 여행자의 마음을 알아챈 듯한 내용이다. 여행길 자체에 아름다움이 있으니, 목적지를 향해 서둘러 가기보다는 천천히 그때그때 여정을 즐기라는 뜻으로 읽혔다.
그래, 흘러가는 시간을 즐겨 보자. 다시 열차에 올라 차분히 차창 밖을 내다보니, 지루했던 풍경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광막한 벌판에 가끔씩 모습을 드러내는 초록 숲들, 함께 달리는 구름 더미, 헤아릴 수도 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크고 작은 호수들과 굽이치는 물줄기들, 고사목 가득 쓰러져 누운 습지대가 모두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열차가 교행을 위해 속도를 늦출 때면 호수 주변을 나는 새들과 달려가는 작은 동물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새벽녘 호수 수면 위로 피어오르는 물안개도 멋졌고, 저물녘 열차의 꼬리 쪽으로 드리우는 석양도 황홀했다. 비좁고 답답했던 침대칸도 아늑하게 느껴지고, 열차의 흔들림도 소음도 자장가처럼 푸근하게 다가와 행복감이 밀려왔다. 이런 느낌이야말로, 횡단열차 승객들이 4시간30분이면 족한 지름길(비행기 여행)을 마다하고 굳이 4박5일에 걸친 열차 여행을 선택한 이유일 것이다.
횡단열차는 숱한 강과 호수를 건넌다. 이병학 선임기자 |
횡단열차 차창 밖으로 울창한 숲과 호수들이 끝없이 나타난다. 이병학 선임기자 |
물안개 낀 숲과 습지대를 달리는 횡단열차. 이병학 선임기자 |
지난 6월 말, 밴쿠버에서 토론토까지 캐나다 서~동 횡단열차 여행을 체험했다. 캐나다 서쪽 끝 해안도시 밴쿠버에서 저녁에 출발해, 열차에서 4박5일 동안 먹고 자고 구경하며 온타리오 호반의 토론토에 이르는 여정이다. 철로는 토론토에서 동북쪽으로 몬트리올과 퀘벡을 거쳐 해안도시 핼리팩스까지 이어지지만, 일반적으로 밴쿠버~토론토 구간을 운행하는 ‘캐나디안 라인’을 캐나다 횡단열차라고 부른다.
새벽 물안개 피어오르는 호숫가를 달리는 횡단열차. 이병학 선임기자 |
횡단열차는 약 4466㎞ 거리를 약 87시간에 걸쳐 달린다. 재스퍼, 에드먼턴, 새스커툰, 위니펙 등 주요 도시를 거쳐 토론토에 닿는다. 19개의 캐나다 철도 노선 중 가장 긴, 캐나다 로키산맥의 설산과 평원지대, 호수지대를 두루 관통하는 매력적인 관광열차 노선이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주, 앨버타주, 서스캐처원주, 매니토바주, 온타리오주 등 5개 주를 거치는 대장정이다. 캐나다는 세계 2위의 영토를 자랑하는 나라답게, 세계 24개의 표준시간대 중 6개의 표준시간대를 사용한다. 달리는 동안 태평양 시간대, 산악 시간대, 중부 시간대, 동부 시간대를 거치게 돼 3번이나 1시간씩 시간이 당겨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밴쿠버 퍼시픽센트럴역, 저녁 8시30분에 출발하는 토론토행 횡단열차에 올랐다. 객차 21량에 디젤 엔진 기관차 2량까지 무려 23개 차량이 연결된 열차다. 열차는 다양한 등급의 침대칸을 포함한 객실 차량, 3끼 식사가 제공되는 식당 차량, 각종 놀이·공연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라운지 차량, 그리고 앞뒤·좌우·천장이 유리로 된 2층 전망 차량 등으로 구성됐다.
천장까지 유리로 된 2층 전망칸. 이병학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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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무원 아만다는 이 길고 긴 열차에 “승객 72명, 승무원 35명이 타고 있다”고 했다. 그는 “재스퍼·에드먼턴·위니펙 등까지만 이용하는 이들이 있고, 토론토까지 가기 위해 새로 타는 승객들이 있다”며 “위니펙에 이르면 승객이 더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배정된 객실 문을 여니, 의자 2개가 놓인 작은 방이다. 좁아 보여도 화장실, 세면대, 2층 침대가 갖춰진 2인용 객실이다. 의자를 접어 깔고 벽에서 침대를 꺼내 펼치자 아늑한 침실로 변했다. 위층 침대는 천장에서 내려 받침대에 고정한다. 샤워실은 객차마다 1개씩 갖춰진 공용 샤워실을 쓴다. 좀 더 공간이 넓은 고급 객실엔 샤워실에 냉장고, 비디오 모니터까지 딸려 있고, 의자도 소파형으로 돼 있다. 침대 1개 크기의 공간에 출입문이 커튼으로 된 1인용 객실도 있다.
일반실 2층 침대칸. 이병학 선임기자 |
소파가 놓인 특실. 이병학 선임기자 |
침대는 시트도 깨끗하고 편안했지만, 첫날에는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열차의 흔들림과 덜컹거리는 소음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덜컹거림에 익숙해졌다. 이튿날부터는 누군가 흔들어주는 요람에 누운 느낌으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제공되는 식사도 훌륭했다. 아침에는 오믈렛이나 빵·달걀·소시지가 나왔지만, 점심·저녁으론 육류·생선류·채식요리 등 세 가지 요리 중에서 고를 수 있게 했다. 빵과 샐러드·소스 등도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다. 주스 등 음료수는 무료지만, 와인·맥주 등 주류는 따로 요금을 내야 한다.
라운지 칸에서는 일정표에 따라 퍼즐 맞추기, 와인 알아맞히기 등 각종 놀이와 노래 공연, 의자에 앉아서 하는 요가 등 갖가지 행사가 벌어진다. 함께 모여 식사하며 대화하고, 노래 공연을 감상하는 동안 승객들은 금세 친해졌다. 밴쿠버에 사는 80대 부부, 미국 미네소타에서 온 60대 부부, 독일에서 온 20대 연인, 중국에서 혼자 온 80살 할아버지…모두 여행담을 나누며 한 가족처럼 어울렸다.
횡단열차 식당칸. 이병학 선임기자 |
라운지 객차에선 수시로 게임, 노래공연 등이 벌어진다. 밴쿠버에서 토론토까지 함께 한 20대 부부 듀엣 ‘제네시아’가 여행자들에게 노래를 선사하고 있다. 이병학 선임기자 |
승객들이 일제히 탄성을 터뜨린 때는, 로브슨산 주립공원과 재스퍼 국립공원 일대를 지날 무렵이었다. 특히 캐나다 로키산맥의 최고봉 로브슨산(3954m) 부근을 지날 때, 사방이 유리로 된 2층 전망 칸은 승객으로 가득 찼다. 언제나 나이 지긋한 노부부들 차지였던 전망 칸에, 이때만큼은 젊은층도 몰려들어 양보 없는 ‘눈 호사’ 즐기기에 바빴다. 가문비나무·자작나무 등 키다리 나무숲을 헤치며 열차는 달리고, 그 사이로 만년설과 빙하로 둘러싸인 거대한 바위산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웅장한 설산은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버티고 있어 더욱 눈부셨다. 눈 덮인 산봉우리들의 행렬은 재스퍼를 지나서도 이어졌다. 승객들은 차창 밖으로, 가문비나무 숲 부근에서 먹이활동을 하는 야생 흑곰도 만나고, 호숫가에서는 펠리컨도 보고 비행하는 독수리도 관찰할 수 있었다.
철로변에서 만난 야생 흑곰. 이병학 선임기자 |
횡단열차가 가문비나무, 자작나무 우거진 로키산맥 산자락을 달리고 있다. 이병학 선임기자 |
캐나디안 라인에는 총 66개의 역이 있다. 열차는 6~7곳의 역에 30분~1시간30분 가량씩 정차한다. 캐나다 로키산맥 관광의 관문 도시인 재스퍼에는 1시간30분간 머물렀다. 승객들은 갇혀 있던 열차에서 풀려나와, 로키 설산에 둘러싸인 도시 재스퍼 거리를 산책하며 해방을 만끽했다. 에드먼턴의 경우는 한밤중에 도착해 잠시 머물다 출발했다.
캐나다 횡단열차의 맨 뒤 마지막 객차인 돔형 라운지. 이병학 선임기자 |
횡단열차 여행이 다 좋지만은 않았다. 불편한 점도 있었다. 객실의 짐 둘 공간이 좁아, 옷가지 등이 든 큰 짐은 화물로 부쳐야 했다. 작고 간단한 가방 정도만 객실로 가져갈 수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 구간이 단선 철로여서, 마주 오는 열차와 교행하기 위해 수시로 복선 구간에 멈춰선 채 대기해야 했다. 밤에도 낮에도 몇 번이고 멈춰 섰다.
놀라운 건 교행 때 만난 화물 열차의 전체 길이였다. 꼬리에 꼬리를 문 화물 열차 차량 행렬은 기다려도 기다려도 끝나지 않았다. 다 지나가는 데 10여분이나 걸릴 정도다. 작심하고,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화물 열차 차량 수를 직접 세어 봤다. 무려 165량이나 됐다.
어쨌든, 교행을 위한 대기 시간이 길어진 결과로 토론토에는 예정시각보다 10시간 가까이 늦게 도착했다. 나이아가라 폭포 탐방은 다음날로 미뤄야 했다. 토론토 주변 여행을 계획했다면, 미리 일정을 여유 있게 짜놓는 게 좋겠다.
“건강할 때 떠나세요…안전한 열차로”
캐나다 횡단열차서 만난 중국인 리우 펑
“이렇게 경치도 보고 친구도 사귈 수 있어 좋다. 열차 여행의 장점이다.”
캐나다 밴쿠버~토론토 횡단열차(캐나디안 라인) 식당 칸에서 만난, 중국 광저우에서 온 리우 펑(79·사진)의 말이다. 백발에 주름지고 검버섯 많은 얼굴이지만 표정은 온화하다. 수수한 점퍼 차림에 지팡이를 짚었다. 지난 6월8일 혼자 중국 광저우에서 출발해 밴쿠버에서 알래스카로 8일간 크루즈 여행을 다녀온 뒤 토론토로 가기 위해 횡단열차를 탔다고 한다.
광저우 철도공사에서 엔지니어로 40년간 일하고 은퇴한 그는 지난해 아내가 세상을 뜨기 전까지, 50여개 나라로 부부 여행을 다녔다고 했다. 틈만 나면 중국은 물론, 유럽·일본 등을 열차로 여행해온 장거리 열차여행 마니아였다. “아내를 보내고 나서, 이번이 첫 여행이다. 자식들이 혼자 떠나는 걸 말렸지만 내가 우겼다. 아직 건강하고, 특히 철도여행은 매우 안전하다.”
그는 “아내를 생각하면 마음 아프지만 다 지나간 일”이라며 “이제 많이 정리됐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휴대폰에 저장된, 아내 생일에 꽃과 음식을 올리는 사진을 보여줬다.
철도 전문가답게 그는 캐나다 횡단열차에 대해서도 한마디 했다.
“차량 구조와 시설이 매우 편하게 돼 있다. 음식 등 서비스도 훌륭하다. 이런 열차를 타고 로키산맥 등 멋진 경치를 구경할 수 있어서 만족한다.” 문제도 있단다. “도착 시각이 계속 지연되는 건 문제다. 철도의 장점이 정시 출발, 정시 도착인데, 이건 안 좋다.” 마주 오는 열차와 교행을 위해 수시로 복선 구간에 멈춰 서면서, 목적지 도착 예정 시각이 늦춰지는 걸 지적한 말이다.
그는 토론토와 캐나다 동부 해안의 섬들을 둘러본 뒤 미국 디트로이트, 시카고 등을 거쳐 7월 중순 중국으로 돌아갈 생각이라고 했다. 몇몇 대학교도 가볼 생각이란다. “대학 공부를 못한 게 한이 됐다. 그래서 기회 있을 때마다 유명 대학교를 찾아 캠퍼스를 구경하는 게 버릇이 됐다.” 서울 여행 때는 아내와 이화여대를 둘러봤다고 했다.
내년부터는 과거 부부여행 때 아내가 좋아했던 곳, 그리고 못 가본 곳들로 계속 ‘나 홀로 여행’을 떠날 생각이라고 말했다. 객실로 가기 위해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며 그가 덧붙였다.
? “건강할 때 여행 많이 하라. 걸을 수 있을 때 다녀야 한다.”
캐나다 횡단열차 여행 팁
△ 에어캐나다가 인천~밴쿠버 노선, 인천~토론토 노선 직항편을 매일 운항한다. 인천~밴쿠버 약 9시간30분 소요, 인천~토론토 약 13시간 소요. 에어캐나다 누리집(www.aircanada.com) 참조.
△ 비아레일(캐나다 국영철도) 캐나다 밴쿠버~토론토 ‘캐나디언 라인’ 횡단열차는 여름에 주 3회(화·금·일요일), 겨울에는 주 2회(화·금요일) 출발한다. 밴쿠버 퍼시픽센트럴역에서 출발한다. 밴쿠버~토론토 3박4일(또는 4박5일:출발시각에 따라 달라짐) 1인실(커튼형 문) 약 150만원, 2인실 일반실(2층침대·화장실·세면대) 1인당 약 210만원, 밴쿠버~재스퍼 1박2일 1인실(커튼형 문) 약 60만원, 2인실 일반실 1인당 약 85만원(이상 자동 할인 가격). 자세한 사항은 캐나다관광청 누리집(www.keepexploring.kr)을 참조하거나 헬로캐나다(02-737-3773) 등 전문여행사에 문의.
글·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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