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뿌리를 증오하는 당신에게 부치는 편지
[책&생각] 정여울의 문학이 필요한 시간
(22) 가족, 영원히 끝나지 않는 문학의 테마
부모 향한 이상화가 깨지는 순간 탄생하는 가족소설
핏줄 아닌 인연으로 얽힌 새로운 공동체까지 품어야
아름다운 요정 칼립소는 오디세우스에게 무한한 사랑과 풍요를 선물했지만, 등을 돌린 채 매일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는 오디세우스의 노스탤지어를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아르놀트 뵈클린, <오디세우스와 칼립소> , 1882. |
‘너는 정말 엄마를 많이 닮았구나’라는 타인의 시선이 싫어지는 순간. ‘아휴, 넌 아버지 판박이로구나!’라는 어른들의 덕담이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심장을 찌르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의 뿌리를 부정하며 자신을 증오하는 시기, 사춘기로 접어든다. 더 이상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멋져 보이지 않고, 더 이상 어머니가 세상에서 가장 다정해 보이지 않는 순간. ‘도대체 우리 부모는 왜 저럴까’라는 불만이 늘어만 가는 순간. 인간은 사춘기에 접어든다. ‘우리 엄마는 혹시 계모가 아닐까’, ‘나의 진짜 부모는 아주 자애롭고, 잔소리 따위는 결코 안 하고, 완벽한 인격과 부와 명예까지 갖춘 그런 사람일 거야’라는 상상에 빠지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업둥이 콤플렉스’다. ‘내 부모가 부끄럽다’는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진정 어른이 되기 위해 반드시 뛰어넘어야만 하는 성장의 통과의례이기도 하다. 문학평론가 마르트 로베르는 <기원의 소설, 소설의 기원>에서 ‘어딘가 나의 진짜 멋진 부모님이 계실 거야’라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인간의 마음을 업둥이 콤플렉스 혹은 사생아 콤플렉스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뼈아픈 콤플렉스는 문학의 원초적 뿌리, 즉 가족소설의 뿌리이기도 하다. 나의 뿌리를 증오하기 시작하는 순간, 즉 부모를 향한 이상화의 시선이 깨어지는 순간, 가족소설이 탄생한다.
오디세이부터 SF까지, 가족 서사의 ‘진화’
문학사에 길이 남은 수많은 가족 이야기의 기본 플롯은 ‘집 나간 주인공의 귀환’, 즉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가족에게 돌아오는 문제적 인물의 이야기다. 예컨대 <오디세이>는 영웅적 풍모와 세속적 욕망을 동시에 지닌 오디세우스가 20년 가까이 집을 떠나 온갖 파란만장한 모험을 일삼다가 끝내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이며, 박경리의 <토지>는 그 수많은 땅과 재산을 다 빼앗기고 머나먼 이국땅 간도까지 쫓겨났다가 마침내 모든 것을 되찾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최서희 일가의 확장된 가족 서사라고 할 수 있다. 오디세우스에게는 이타카가 있었고, 서희에게는 평사리가 있었다. 즉 가족의 터전, 고향을 향한 멈출 수 없는 노스탤지어야말로 이 영웅적 주인공들이 결코 버릴 수 없는 존재의 기원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온갖 콤플렉스와 트라우마로 가득한 가족을 증오하다가도, 결국 더 큰 사랑과 이해와 성숙의 과정을 통해 ‘이제는 더 커진, 확장된 가족’(오디세우스에게는 아들 텔레마코스가 생기고, 어린 시절 부모를 잃은 최서희에게도 남편과 아이들이 생긴다)으로 돌아오는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오랫동안 인류의 사랑을 받아온 것이다.
그런데 카프카의 <변신>과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싯다르타> 같은 근대 초기 소설에서는 전형적 가족 서사가 지닌 ‘귀환의 구조’가 깨져버린다. 영원히 집으로 돌아오기를 거부하는 아들의 이야기, 어머니와 고향과 존재의 뿌리를 향한 그리움은 남아 있지만 고향으로의 귀환을 완강히 거부하는 불안한 노마드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들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가족,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랑의 의무를 짊어져야 하는 무거운 부담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자기만의 제2의 고향을 창조한 것이 아닐까. 프란츠 카프카에게 제2의 고향이 ‘문학’이었다면, 헤르만 헤세가 창조한 제2의 고향은 ‘방랑’ 그 자체였다. 카프카는 가족보다 문학을 사랑하여 영원히 새로운 가족을 만들지 않았으며, 헤세는 방랑 그 자체를 일종의 ‘움직이는 고향’으로 삼아 영원히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주인공들을 그려냈다. 그러고 보니, 항상 집에 있으면서도 한 번도 집에 진정으로 거주하지 않는 듯한, 미칠 듯한 불안의 주인공들을 그린 버지니아 울프도 있다. 버지니아 울프의 천재성은 늘 집에 있으면서도 한 번도 집을 자신과 일체화시키지 못한 여성들의 고통스러운 분열의 심리를 놀랍도록 생생하게 묘사했다는 점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그린 여성들은 집에 있으면서도 집을 벗어난 존재, 가족과 함께 있으면서도 가족과 유리되어 철저한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뿌리 뽑힌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가족을 향한 불멸의 노스탤지어를 거쳐, 가족의 뼈아픈 해체를 향해 나아가는 문학의 오랜 역사를 생각하고 있는 요즈음. 에스에프 소설의 신기원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 세계적 작가 켄 리우의 <종이동물원>을 읽었다. 판타지문학, 하드보일드, 대체 역사, 전기소설 등 다양한 장르에 뛰어난 역량을 보이는 작가이지만, 역시 표제작 <종이동물원>이 가장 감동적이었으며, 그 중심에는 우리 모두의 뿌리, 가족이 있었다. <종이동물원>을 읽으며 다시 한 번 ‘가족사 소설의 궁극적 귀환’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토록 떠나고 싶어했던 가족의 기원으로 다시 돌아오는 주인공의 이야기라니. 아무리 최첨단 에스에프 소설의 기린아라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가족의 이야기가 가장 감동적이라니. “신부로 팔려 가려고 자기 사진을 카탈로그에 싣다니, 뭐 그런 여자가 다 있어?”라고 비난했던 바로 그 여자가, 자신의 엄마임을 깨닫는 소년. 문화대혁명 기간에 가족을 모두 잃고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며 팔려 다녔던 가여운 소녀의 이야기가 바로 엄마의 이야기임을 알게 되는 아들의 뼈아픈 후회는 독자의 가슴을 날카롭게 후벼판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가족 이야기
가족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자리에도 가족은 있다. 가부장제가 무너져가는 자리에도 가족은 있다. 1인 가구가 급증하는 이 시대에도, 사람들에게는 늘 마음 한켠에 쓰라린 부채감을 자극하는 가족이 있다. 가족의 해체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정아은 작가는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정은 인류에게 남겨진 마지막 공동체가 아닌가. 가족은 원시시대에 있었다는 ‘나눔’의 삶, 내 것 네 것 따지지 않고 사냥해 온 고기를 똑같이 나누어 먹는 원시 공산제를 실현할 지상 최후의 ‘공산주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계산 없이 ‘나’를 주고 ‘너’를 건네받는 유일한 집단이기 때문에. 그리고 전업주부는 이런 ‘가정 공산주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를 포기한단 말인가. 지상의 마지막 공동체를 방어하는 역할을 어떻게 내동댕이친단 말인가.” 나는 이 대목에서 우리가 가족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절실한 이유를 발견했다. 아무리 세상이 철두철미한 자본주의로 물들어가도, 가족 안에서만은 원시 공산제처럼 ‘내 것’과 ‘네 것’을 나누지 않는 완전한 나눔을 평생 실천하는 존재, ‘엄마’라는 존재에게 우리는 여전히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엄마, 누나, 언니, 그 누구라도 마찬가지다. 가사노동과 돌봄노동, 가족에 대한 무한한 걱정이라는 감정노동까지 책임지는 존재야말로 ‘힘 있는 아버지’보다 더 무너뜨리기 어려운 가족의 뜨거운 중심이었던 것이다. 가족은 그렇게 쉽게 해체되고, 해방되고, 극복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어쩌면 가족은 여전히 우리가 무의식에서마저 의존하고 있는 최후의 보루일지도 모른다. 여성의 희생을 예찬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지상에는 아직 가족이라는 최후의 보루를 대체할 만한 대안적인 공동체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여전히 우리는 가족 안에서 가장 많은 감정노동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의 피와 땀과 눈물을 먹고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 또한 내 문학의 뿌리, 나의 엄마를 생각한다. 지적이고 우아하게 감정을 표현할 줄 모르는 나의 엄마. 맛있는 음식으로밖엔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데, 이제 요리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 자식에게 밥 한 끼 해주고 나면 골골 앓는 우리 엄마. 우리 모두는 바로 그런 눈물겨운 밥을 먹으며 다시 살아갈 에너지를 얻는 존재들이었다. 우리를 살리는 건 항상 이렇게 약자들의 노동인데, 우리는 자꾸 강자들에게 인정받으려고 몸부림치다가 진정 소중한 것들을 잊어버린다. 내게 자기를 넘어선 사랑의 의미를 처음으로 가르쳐준 사람, 내게 자기를 넘어선 증오의 의미도 처음으로 가르쳐준 사람, 엄마. 우리는 그 존재를 아직 충분히 벗어나지 못했다. 가족이란 그렇게 쉽게 파괴되거나 망각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가족에 대한 더욱 절절한 탐구를 필요로 한다. 그토록 집을 떠나고 싶어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디세우스처럼, 서희처럼, 카프카의 커다란 벌레처럼, 우린 끝내 집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존재임을 되새긴다.
가족의 이야기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우리가 누군가의 딸이고 아들이고 아버지이고 어머니인 한. 다만 이제 우리는 가족보다 더 크고 깊은 사랑을 말할 때가 온 것 같다. 가족사 이야기를 멈추자는 것이 아니라, 내 핏줄만이 가족이 아닌, 피 한 방울 안 섞인 낯선 사람들을 가족 이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더 커다란 의미의 가족사 소설에 포함시켜야 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가족의 해체’가 아니라 ‘더 커다랗고, 더 다채롭고, 엘지비티(LGBT)는 물론 온갖 핏줄 아닌 인연으로 얽힌 새로운 공동체’의 이야기까지 가족 서사의 울타리 안에 포함시켜야 한다. 가족사 이야기의 원형적 매력은 결코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족중심주의로 회귀하자는 것이 아니다. 가족에게조차 고통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독은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밖에는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의 외로움까지, 여전히 ‘가족’의 문제라는 것이다. 가족의 해체 담론이나 탈가족 이데올로기보다 더 강하고 질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향한 슬프도록 질기고 끈덕진 그리움이었다.
정여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