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방의 미친 여자’ 버사, 세상 밖으로 나오다
[책&생각] 정여울의 문학이 필요한 시간
‘제인 에어’ 속 ‘광녀’ 버사 메이슨에 새 서사 부여한 ‘광막한…’
평범한 세계로부터 추방당한 존재의 차가운 손 잡아주는 문학
<제인 에어> 1847년판에 삽화로 그려진 버사 메이슨의 모습은 영락없는 광인이다. 위키피디아 |
(26) 열광 뒤에 가려진 분노의 속삭임
열광과 분노라는 상반된 감정이, 동시에 똑같은 대상을 향해 차오를 때가 있다. 예컨대 <제인 에어>를 생각하면 열광과 분노가 동시에 느껴진다. 주인공 제인 에어가 겪어낸 모험과 투쟁에 열광하면서도 로체스터가 ‘다락방의 미친 아내’ 버사 메이슨을 방치하는 장면에서는 분노가 끓어오른다. 로체스터는 새로운 사랑 제인을 얻기 위해 엄연히 살아 있는 아내 버사 메이슨을 ‘미친 여자’이자 ‘살아 있는 시체’로 취급한 것이다. 작가 샬럿 브론테는 자신이 사랑하는 주인공 제인 에어를 향해서는 마침내 해방된 여성의 눈부신 행복을 거머쥐게 하면서도, 또 다른 고통받는 여성 버사 메이슨에게는 원인도 해결책도 없는 광기를 부여한 것이다. <로빈슨 크루소>를 읽을 때도 비슷한 열광과 분노가 동시에 솟아오른다. 무인도에 홀로 고립된 로빈슨 크루소가 마치 혼자서도 문명을 처음부터 재창조할 수 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척척 1인용 왕국을 개척할 땐 자못 신이 나면서도, 그가 원주민 프라이데이를 노예처럼 부려먹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분노를 금할 길이 없다. 작가가 로빈슨 크루소를 영웅으로 만드는 동안, 영문을 모르는 순박한 청년 프라이데이는 졸지에 자유민에서 노예로 전락한 것이다. 사실 우리가 걸작이라고 믿고 있는 수많은 작품들이 이런 문제를 품고 있다. 자신이 누구의 희생을 짓밟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승리를 구가하는 주인공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제인 에어>가 영국 본토 출신 여성의 주체적 성장을 위해 식민지 출신 여성의 희생을 자신도 모르게 방조하고 있다면, 로빈슨 크루소의 성공은 철저한 제국주의적 입장에서 문명화된 주체의 시선으로 무인도의 원주민을 야만인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셈이다.
1966년에 나온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초판본 커버에는 너무도 평화롭고 아름다운 분위기 속에서 아직 미치지 않은 버사 메이슨(앙투아네트)이 등장한다. 로체스터를 만나기 전, 아름답고 총명한 여인의 모습이다. ⓒAndré Deutsch (UK) & W. W. Norton (US) |
미쳐서 가둔 게 아니라 가둬서 미쳤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 버사 메이슨의 원래 이름은 앙투아네트 코즈웨이다. 영국인 농장주였던 양아버지와 식민지 크레올(유럽인의 혈통이지만 식민지에서 자라난 사람) 출신의 엄마 사이에서 자라난 앙투아네트. 그는 눈부신 미모와 열정을 지녔지만 자신을 ‘흰 검둥이’나 ‘하얀 바퀴벌레’라고 저주하는 원주민들의 괴롭힘에 지쳐간다. 원주민들의 시선에 비친 앙투아네트 모녀는 영국인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얼굴, 영락없는 이방인의 얼굴, 이쪽도 저쪽도 아닌 ‘하얀 가면을 쓴 검둥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앙투아네트는 원주민들의 방화사건으로 그토록 정든 집은 물론 사랑하는 남동생까지 잃고, 어머니가 정신병원에 갇혀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아직 굴복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나라 영국에서 온 남자, 로체스터와의 사랑을 믿었기 때문이다. 앙투아네트는 굴복하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그의 날개를 꺾어놓아도, 그의 날개는 마치 도마뱀의 잘린 꼬리처럼 놀라운 회복력으로 다시 자라났다. 로체스터가 앙투아네트의 이름을 ‘버사 메이슨’으로 멋대로 바꿔 부르기 전에는. 그는 앙투아네트를 ‘마리오네트’(꼭두각시인형)라고 부르더니, 아내가 꼭두각시인형처럼 마음대로 조종되지 않자 결국은 버사 메이슨이라는 전형적인 영국식 이름으로 바꿔 부르면서 아내의 정체성을 앗아간다. “그 남자가 나를 앙투아네트라고 부르지 않자, 나는 앙투아네트가 창문을 통해 슬그머니 날아가버리는 것을 보았어. 앙투아네트의 향기도, 옷도, 거울도 모두 사라져버리는 것을 나는 보았거든.” 로체스터는 처음에는 아내의 재산을, 나중에는 육체를, 결국에는 정신까지 장악해버림으로써 앙투아네트의 생명력을 차례로 정복해나간다. 마치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의 영토와 주권을 빼앗은 뒤, 끝내는 언어와 문화까지 빼앗아가는 것처럼. 마침내 앙투아네트의 하녀와 하룻밤을 보냄으로써 로체스터는 마지막 남은 부부 사이의 믿음까지 앗아가버린다.
당신들의 세상 속으로 나를 들여보내줘요
하지만 앙투아네트는 아직 기억한다. 영국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고향의 모습을. 식민주의자들이 정복하고 착취하고 때로는 깡그리 잊고 싶어 하는 존재들, 그런 존재가 바로 자신들임을 알면서도, 앙투아네트는 쉽사리 잊히기를 거부한다. ‘더러운 피’를 물려받은 크레올이자 저주받은 유전자 취급을 받으면서도, 앙투아네트는 버사 메이슨이라는 영국식 이름이 아니라 자신의 원래 이름 앙투아네트를 고집한다. 그는 남편의 보호를 바란 것이 아니다. 남편의 사랑을 꿈꾼 것이다. 우리와 똑같은, 사랑받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능으로. 하지만 남편 로체스터는 아내의 ‘보호자’를 자처하면서 결국 아내에 대한 모든 ‘통제권’을 휘두르려 한다. 손필드의 대저택 다락방에 앙투아네트를 가두는 순간, 앙투아네트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로 전락하여 영원히 보통 사람들의 세계에서 추방당한다. 앙투아네트는 로체스터가 언젠가는 자신의 진짜 이름을 불러주길 바라지만, 언젠가는 자신이 지닌 진짜 아름다움을 알아주기를 갈망하지만, 그 사랑은 얼마나 철저히 짓밟혔는가. 하지만 그 사랑은 또한 얼마나 투명하고 눈부셨는가. 앙투아네트는 자신을 사랑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한 남자를, 바보처럼 아무 조건 없이 사랑했고, 끝까지 믿었으며, 끝내 그 저주받은 사랑으로부터 영원히 해방될 방법은 죽음뿐임을 깨닫는다.
앙투아네트의 유모였던 크리스토핀은 앙투아네트의 몸에 ‘태양’이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남편 로체스터는 바로 그 눈부신 태양을 두려워한다. 앙투아네트의 마음속에 깃든 그 모든 열정과 재능과 자유가 그에게는 불편하고, 길들일 수 없으며, 예측 불가능한 무엇으로 인식된다. 마침내 앙투아네트의 재산과 육체를 빼앗은 로체스터는 아내의 마음속에 꿈틀거리는 태양마저 없애버린다. 이름을 잃어버린 앙투아네트는 이제 영혼마저, 정체성마저, 내가 누구라는 자각마저 잃어버린다. “너무나 외로워서 거울 속의 나에게 입을 맞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유리가 우리를 가로막았다. 유리는 딱딱하고 차디찼으며, 내 입김 때문에 뿌옇게 안개가 꼈다. 이제 그들이 모든 것을 다 가져가 버렸다. 나는 도대체 이곳에서 무얼 하고 있는 건가? 나는 누구란 말인가?”
<제인 에어>는 버사 메이슨의 죽음을 마치 악인의 합당한 최후라도 되는 듯 처참하게 묘사하지만, 내 눈에 비친 버사 베이슨, 아니 앙투아네트는 결코 패배한 것이 아니다. 마음속의 낙원, 그가 꿈꾸는 새로운 꿈의 고향 그 어딘가로, 보이지 않는 날개를 달고 멀리 날아간 것이 아닐까. 진 리스는 브론테가 크리올 여성을 미친 여자로 묘사한 것에 분노를 느낀다. 진 리스의 어머니가 크리올이었으며, 자신 또한 영국의 식민지 도미니카공화국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곳의 분위기가 어떤지를 뼛속깊이 알고 있었다. <제인 에어>에서 마치 ‘옷을 입은 하이에나’처럼,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굴욕적인 존재로 그려진 버사 메이슨의 존재는 영국인들의 집단적 우월감이 만들어낸 식민지 여성의 그릇된 이미지가 아니었을까.
문학은 그렇게 ‘다락방의 미친 여자’로 갇혀버린 그 수많은 버려진 존재들의 이야기를 우리 곁의 생생한 인물로 부활시킨다. 오늘 밤 다락방의 미친 여자, 아니 버사 메이슨, 아니 아름다운 앙투아네트는 우리 집의 창문을 두드리며 이렇게 외칠 것 같다. 렛미인(Let me in)! 나를 들여보내줘요. 당신들의 세상 속으로. 당신들이 웃고 떠들고 박수치며 열광하는 그 아름다운 생의 한가운데로, 나를 초대해주세요. <폭풍의 언덕>에서 유령이 되어 사라져버린 비련의 여주인공 캐서린의 대사처럼. 같은 여성조차 그 아픔을 공감해주지 않은 <제인 에어>의 미친 여자 앙투아네트는, 오이디푸스의 비참한 마지막을 끝까지 함께해준 딸 안티고네는, 영웅 이아손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자 헌신짝처럼 버려진 아내 메데이아는, 그렇게 우리를 향해 외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렛미인. 당신들이 매일 희로애락과 간난신고를 경험하는 바로 그 따뜻하고 평범한 세계 속으로, 나를 들여보내주세요. 렛미인. 당신들과 함께하고 싶어요. 렛미인. 당신들과 나는 같은 하늘을 이고 있는, 서로 다른 것보다 서로 닮은 것이 훨씬 많은, 살아 있는 인간이니까요. 렛미인, 렛미인. 세상 속으로 미처 편입되지 못한 그들의 안타까운 속삭임이 내 작은 창문 위로 빗물처럼 흐르는 밤이다. 나는 내 창문을 절박하게 두드리는 그대의 차가운 손을, 꽉 붙든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나의 손으로. 내가 살아오고, 읽어오고, 공감해온 모든 이야기의 힘으로. 당신의 차디찬 손을 언제까지나 꽉 붙들 것이다.
정여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