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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들고 색칠한 피규어로 ‘손맛’ 나는 게임을

테이블 위에서 펼쳐지는 전쟁 시뮬레이션! 직접 만든 미니어처로 전략을 펼치는 ‘테이블탑 미니어처 보드게임’의 매력

‘테이블탑 미니어처 보드게임’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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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탑 미니어처 보드게임’ 판매 전문점 오크타운에서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마니아. 직접 만든 미니어처로 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해 전략전술을 고민하고 있다. 염서정 스튜디오 어댑터

커다란 나무 테이블 위엔 삭막한 전쟁터 모랫바닥과 군데군데 만들어진 벙커를 연상시키는 갈색 매트가 깔렸다. 전투를 벌일 두 군대의 진영에는 실제처럼 정교하게 제작된 미니어처 탱크들이 도열했다. 투명 받침대 위에는 위장 무늬까지 칠한 전투기들이 적진 방향으로 놓였다. 표정과 제스처가 가지각색인 미니어처 군사들 수십명까지 탱크 뒤에 배열하자 비로소 게임 준비가 끝났다. 플레이어 앞에는 얇은 책 한권 분량의 ‘규칙서’와 각 캐릭터의 특징과 능력치를 보기 쉽게 정리한 플라스틱 템플릿이 놓여 있었다. 주사위가 굴러가자, 게임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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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탑 미니어처 보드게임’ 판매 전문점 오크타운에서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마니아. 직접 만든 미니어처로 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해 전략전술을 고민하고 있다. 염서정 스튜디오 어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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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탑 미니어처 보드게임’이 펼쳐지는 테이블. 염서정 스튜디오 어댑터

지난달 11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테이블탑 미니어처 보드게임’(이하 테이블탑 게임) 판매 전문점 ‘오크타운’. 주말마다 동호인들의 모임 장소로도 북적이는 이곳에서 테이블탑 게임 마니아 권수현(38)씨는 ‘플레임즈 오브 워’라는 테이블탑 전투 게임에 한창이었다.



‘테이블탑 미니어처 보드게임’은 말 그대로 테이블 위에서 미니어처를 활용해 즐기는 전략전술 전쟁 시뮬레이션 보드게임이다. 플레이어는 각자 자신의 군대를 미니어처로 구성해 복잡한 규칙과 특정 시나리오에 따라 전략전술을 펼치며 상대와 싸운다. 전쟁 게임부터 신들이 등장해 세력 다툼을 펼치는 판타지 게임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던전 앤 드래곤’ ‘스타워즈 리전’ 등이 대표적이다. 게임 진행엔 주사위 굴림과 규칙서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6면체 주사위가 가장 많이 사용되지만, 10면체, 20면체 주사위도 있다. 미니어처 크기가 작을수록 전투 규모가 커지는 편이다. 게임에 등장하는 캐릭터나 소품 하나하나를 직접 만든 다음, 전략을 테이블 위에 실제로 구현하며 게임을 진행한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컴퓨터 게임과 달리 ‘손맛’이 느껴지는 게임이라는 게 마니아들의 설명이다. 현재 국내에서 활동 중인 테이블탑 게임 동호회 회원은 100명 남짓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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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탑 미니어처 보드게임’ 판매 전문점 오크타운에서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마니아. 염서정 스튜디오 어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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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탑 미니어처 보드게임’은 주사위를 던져 캐릭터들의 이동 방향을 정하고, 줄자로 적군을 향해 전진하는 거리를 측정하는 게 규칙이다. 염서정 스튜디오 어댑터

2시간가량 진행된 게임은 유명 전쟁 영화의 가장 중요한 전투 장면을 오프라인에 그대로 구현한 듯했다. 플레이어들은 자신의 차례가 돌아올 때마다 주사위 십여개를 던져 캐릭터들의 이동 방향을 정했다. 그러고는 줄자를 꺼내 적군을 향해 전진할 수 있는 거리를 섬세하게 측정한 뒤 움직였다. 공격받은 탱크 위에는 불붙은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붉은 솜뭉치를 올려두는 식으로 전투 상황을 시각화했다.



권씨는 “실제 전투 지휘관이 된 듯 짧은 시간에 전략을 설계해 매트 위에 풀어내는 것이 테이블탑 게임의 가장 큰 매력”이라며 “적의 요충지를 하나씩 점령할 때마다 마치 직접 전투 현장에 서 있는 듯한 긴장감마저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날 게임에 쓴 탱크와 군사 미니어처는 전부 권씨가 직접 칠한 ‘작품’이다. “컴퓨터 게임에서처럼 누군가 만들어놓은 이미지를 가져다 쓰는 게 아니라 진짜 제 부대, 군사들이죠. 그래서 더 게임에 몰입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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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탑 미니어처 보드게임’에선 공격받은 탱크를 표현하기 위해 붉은 솜뭉치를 올려두기도 한다. 염서정 스튜디오 어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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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탑 미니어처 보드게임’은 주사위를 던져 캐릭터들의 이동 방향을 정하는 게 규칙이다. 염서정 스튜디오 어댑터

소통하며 몰입하는 ‘테이블탑 게임’

국내 테이블탑 게임 1세대로 17년째 테이블탑 게임 매장을 운영 중인 오태훈(47) 대표는 “미국이나 북유럽에서는 테이블탑 게임 문화가 더 발달했지만, 국내에서는 아직 소규모”라며 “하지만 국내에서도 ‘나만의 취향’을 입힌 게임을 찾는 젊은 세대들이 늘면서 새롭게 테이블탑 게임을 배우러 찾아오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주말마다 오크타운은 동호회 활동을 위해 찾은 마니아들로 붐빈다. 다른 한쪽에서는 20년차 테이블탑 게임 마니아인 최상민(34)씨가 판타지 게임 종류인 ‘컨퀘스트’의 규칙을 배우기 위해 찾아온 초보 유저들에게 게임의 배경이 되는 ‘세계관’을 설명하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이 게임에 등장하는 신들은 추종자가 생길수록 힘을 얻어왔습니다. 하지만 ‘하슬리아’라는 신이 점점 탐욕에 찌들기 시작했고, 제국이 분열된 뒤 각 군대가 영토와 세력 다툼을 벌이게 된다는 스토리예요. 게임의 규칙에 얽매이기보다 스토리에 몰입하다 보면 금방 익숙해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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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탑 미니어처 보드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마니아들. 염서정 스튜디오 어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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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탑 미니어처 보드게임’에 등장하는 미니어처들. 염서정 스튜디오 어댑터

최씨에게 테이블탑 게임은 오랜 인생 친구이기도 하다. 캐나다로 유학을 떠났던 중학생 시절, 우연한 기회에 이 게임을 접한 것이 계기가 됐다. 컴퓨터 게임과 달리 직접 사람을 대면하며 소통하는 과정에 큰 즐거움을 느꼈다. 게임 분위기가 과열되다 보면 서로 감정이 상하기도 하지만 갈등을 매너 있게 풀어내는 과정 역시 게임의 일부라고 여긴다.


“20대 대학생 형, 30대 아저씨까지 주말이면 동네 차고지에 모여 테이블에 각자 미니어처를 꺼내두고 게임을 하곤 했죠. 상대방과의 소통이 무척 중요한 게임이다 보니 덕분에 타지 생활의 외로움과 향수병을 느낄 새도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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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탑 미니어처 보드게임’에 등장하는 미니어처들. 염서정 스튜디오 어댑터

최씨는 열정적으로 국내 테이블탑 게임 동호회에서 활동을 해온 덕분에 최근에는 그리스의 한 게임 제작사로부터 앰배서더(홍보대사) 자격을 얻기도 했다. 테이블탑 게임이 단순 게임이 아닌, ‘매너’가 특히 중요한 스포츠 종목처럼 알려지면서 전국에서 이를 배우기 위해 찾아오는 초보 유저들을 돕는 게 그의 가장 큰 임무다. 규칙서를 모두 숙지해야 하고, 미니어처도 자신이 직접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언뜻 복잡하고 번거로워 보이지만 몇번 게임에 참여해보면 그 모든 게 장벽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최씨의 설명이다.


“처음엔 두꺼운 규칙서를 보면서 무작정 어렵겠다며 부담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요. 하지만 농구나 야구, 축구를 처음부터 끝까지 글로만 규칙을 풀어놓았다고 생각해보세요. 아마 누구도 해볼 엄두가 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직접 경기에 뛰어들어 하다 보면 익숙해지잖아요. 테이블탑 게임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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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탑 미니어처 보드게임’에 등장하는 미니어처들. 염서정 스튜디오 어댑터

미니어처 피규어 준비도 게임의 일부

테이블탑 게임은 게임의 ‘말’인 미니어처 피규어를 직접 준비하는 과정도 게임의 일부라고 본다. 마니아 김종성(33)씨는 10여년 전부터 게임을 단순한 취미생활로 즐기다 최근에는 본격적으로 ‘피규어 페인터’라는 직업인의 길에 들어섰다.


“게임에 빠져들수록 작은 미니어처 병사의 표정까지 더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싶어지더라고요. 색다르게 눈 쌓인 설원이나 밤 전투에서 병사들의 모습을 표현해보거나, 탱크의 음영을 더 실감 나게 넣는 식으로 욕심을 내다 보니 주변에서 페인팅 의뢰가 들어오기 시작한 거죠.”


김씨는 테이블탑 게임을 ‘낭만의 게임’이라고 표현했다. 컴퓨터 게임처럼 자리에 앉으면 바로 게임이 시작되는 게 아니라, 세심한 준비가 필요해서다. 게임 하나에 쓰일 미니어처들을 모두 직접 준비하다 보면 길게는 6개월까지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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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참가자들이 직접 만드는 미니어처는 정교하게 제작돼 예술 작품처럼 보인다. 염서정 스튜디오 어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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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규어 페인터’라는 직업이 생길 정도로 미니어처 제작 과정은 섬세한 공정을 수반한다. 염서정 스튜디오 어댑터

“오랜 시간 공들인 ‘작품’들을 들고 게임에 나섰을 때 테이블 위에서는 비장함까지도 느껴집니다. 상대방도 마찬가지고요. 자식 같은 미니어처들이 전투에서 졌을 땐 속이 배로 쓰리고, 전장에서 승리한 채 우뚝 서 있을 때는 얼마나 기특하고 행복한 느낌이 드는지 몰라요.”


김씨는 정성이 깃든 미니어처를 통해 게임을 하다 보니 더 ‘매너’ 있고 진정성 있게 게임에 임하게 된다고도 덧붙였다.


“테이블 위는 컴퓨터 게임에서의 익명성과는 거리가 먼 곳이죠. 컴퓨터 게임에서처럼 지고 있거나 화가 난다고 게임을 꺼버릴 수도 없어요. 열정적으로 게임에 몰두하다 보면 자칫 감정이 상하는 순간도 있는데, 서로 대화로 소통하면서 풀어가곤 해요. 플레이어들은 미니어처를 준비하는 과정은 물론, 게임 종료 후 순간까지도 테이블탑 게임의 연장선이라 생각합니다.”


장선희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