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화가다. 성폭행 피해자만은 아니다”
[토요판]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34. 암브로시우스 벤손, ‘루크레티아’
무고 입증 위해 목숨 내건 고대
피해자다움 요구, 지금은 다른가
비참함·참혹함 피해자 자격 아냐
피해 경험이 삶 압도하지 않도록
작품으로 생존 증명한 젠틸레스키
치욕은 피해자 짐 아닌 가해자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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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히 살아왔던 제 인생은 모두가 재판 중 가해자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피해자답지 않게 열심히 일해왔다는 이유였습니다.” 얼마 전 책 <김지은입니다>를 읽었다. 전 충남도지사 안희정의 비서였던 김지은이 자신의 성폭력 피해를 증언한 뒤 대법원 최종 유죄 판결을 받아내기까지 기록을 담은 책이다. 그중 2019년 1월 항소심 결심공판 최후진술서의 문장이 유독 가슴을 때렸다. 성폭행 가해자에게 범행 동기를 묻기보다 피해자다운지 아닌지 더 따지는 관행이 여전하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사실 성폭행 사건 뉴스 댓글만 봐도 피해자를 보는 사회적 시선이 어떤지 확인할 수 있기에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성폭행을 당했는데 어떻게 농담에 웃을 수 있으며,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셀카를 올릴 수 있으며, 지인들과 잘 어울릴 수 있단 말인가. 혹시 꽃뱀 아닐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피해자들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까. 대신 그들은 ‘피해자다움’이라는 주홍글씨를 가슴에 철저히 새긴 채 숨죽이며 살아야 한다. 이런 주변 시선이 성폭력 피해 사실보다 피해자에게 더한 고통을 주는 숨막히는 족쇄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생존마저 포기한 ‘피해자다움’
그래서일까. 피해자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까지 끊는 사례도 많다. 기원전 6세기 고대 로마의 여인 루크레티아도 그중 한명이었다. 이탈리아의 화가 암브로시우스 벤손(1450?~1550)이 그린 <루크레티아>를 보자. 루크레티아가 오른손에 단도를 쥐고 자신의 명치를 향해 칼끝을 겨누고 있다. 이제 곧 그녀는 피를 흘리며 숨을 거둘 것이다. 하지만 루크레티아의 얼굴엔 슬픔이나 분노, 격정의 흔적이 전혀 없다. 그녀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인 양 평온한 얼굴로 ‘죽음의 임무’를 수행 중이다. 루크레티아는 고대 로마의 장군 콜라티누스의 부인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장군의 아내는 자살하려는 것일까.
그 이유가 그림 오른쪽 뒤편에 펼쳐진다. 당시 로마는 이웃 도시국가 아르데아와 한창 전쟁 중이었다. 남편이 전쟁터로 나간 터라 홀로 잠든 루크레티아의 침대로 어느 날 누군가가 침입했다. 그는 바로 로마 왕의 아들 섹스투스. 그는 부하에게 망을 보라고 한 후 루크레티아를 성폭행하려 한다. 루크레티아는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곧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계속 반항하면 그녀와 남성 노예를 함께 살해한 뒤 알몸으로 침대에 함께 눕혀놓겠다고 섹스투스가 위협했기 때문이다. 이는 곧 그녀가 노예와 간통을 저지르다가 대가를 치른 것으로 위장하겠다는 뜻이었다. 결국 성폭행 피해자가 된 루크레티아는 아버지, 남편, 남편의 친구인 브루투스를 부른 뒤, 모든 일을 설명하고 스스로 가슴을 찔러 자살한다. 그렇게 루크레티아는 ‘고결한 여성의 상징’이 되었다.
만약 루크레티아가 자살하지 않았다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갔을까? 주변 남성들은 루크레티아의 말을 믿었을까. 오히려 왜 문단속을 더 철저히 안 했나. 외부인을 들이려고 일부러 경계를 늦춘 건 아닌가. 옷은 어떻게 입고 있었는가. 평소에 여지를 준 것 아닌가. 온갖 말들이 루크레티아를 옭매었을 것이다. 남편의 명예와 집안의 위신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없었기에, 루크레티아의 자살은 사실상 사회적 타살이나 다름없었다. 무고한 피해자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생존을 포기함으로써 사회가 바라는 ‘피해자다움’을 완벽히 구현했다.
당연하게도, 피해자는 꼭 ‘고통받는 모습’으로만 살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비참함과 참혹함이 피해자의 자격요건인 상황에서는, 성폭력 피해자를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존재’라고 규정하는 건 어느 정도 불가피한 일이기도 했다. 그런 맥락에서 2012년 대한민국 법원은 20살 여성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판결문에 이런 구절을 넣었을 것이다. “감수성 예민한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성적 피해를 입게 되었는바, 이로 인한 피해자들의 성적 모멸감과 수치심은 평생 치유하기 어려운 마음의 상처와 정신적 고통으로 남게 되고 향후 올바른 성적 가치관과 자기 존중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는 점.”
하지만 피해자는 이런 통념으로 인해 다시 한번 상처를 받는다고 한다. 피해는 피해자의 삶을 구성하는 것 중 일부일 뿐인데, ‘너는 성폭력 후유증에서 평생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암시를 받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래서 이탈리아의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1593~1656?)가 더 씩씩하게 지냈는지도 모르겠다. 젠틸레스키는 이러한 세간의 통념에 반항하듯 살았던 ‘성폭력 생존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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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틸레스키는 17살 되던 해, 아버지의 친구이자 그림 스승인 아고스티노 타시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이후 10개월간의 고통스러운 법정 소송이 이어졌다. 젠틸레스키는 수치심을 누르고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타시는 나를 침대 모퉁이로 집어던졌다. 한 손으로 내 가슴을 누르고 내 다리 사이로 무릎을 집어넣었기 때문에 나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재판부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젠틸레스키는 판사 앞에서 부인과 검사를 받는 걸 감당해야 했고, 위증을 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손가락을 옥죄는 고문까지 받았다. 다행히 젠틸레스키는 승소했지만, 그럼에도 고향인 로마를 도망치듯 떠나야 했다. 하지만 그의 다음 행보는 놀랍게도 여느 피해자와 달랐다. 젠틸레스키는 우울함과 참담함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는 ‘피해자다움’을 거부했다. 그는 개인 작업실을 마련해 프로 화가로서 보란 듯 열심히 일했으며, 남성 화가들보다 작품 가격을 더 높게 받을 정도로 능력 있는 화가로 인정받았다. 피렌체에서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디자인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는 명예를 누리기도 했다. 이즈음 그는 비범한 <자화상>을 그린다.
가해자답게 살도록 압박하자
붓과 팔레트를 든 젠틸레스키가 캔버스 앞에 서 있다. 곧 그가 창조한 형상들이 캔버스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여성은 재현의 대상일 뿐’이라는 생각이 만연했던 시대에 젠틸레스키는 이처럼 자신을 ‘그림 그리는 주체’로 표현했다. 왜였을까. 어쩌면 그는 <자화상>을 통해 세상에 대고 “나는 불쌍한 성폭행 피해자만은 아니다. 나는 화가다!”라고 천명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고객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엿볼 수 있다. “나는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입니다. 당신은 시저의 용기를 가진 한 여자의 영혼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성폭력 피해자는 ‘삶이 망가진 사람’이 아니다. 성폭력당한 경험을 ‘삶을 압도하지 않는 하나의 사건’으로 만들기 위해 싸워나가는 사람일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에게서 ‘피해자다움’이 아니라 ‘생존자다움’을 보아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차라리 시선을 반대편으로 돌려 ‘가해자다움’을 보자. 가해자답게 셀프 용서 하지 말기를, 가해자답게 숨죽이고 살기를, 가해자답게 피해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건 꿈도 꾸지 않기를, 가해자는 가해자답게 살도록 압박하자. 치욕은 성폭력 피해자의 짐이 아니라 가해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 범죄를 저지른 대가는 가해자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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