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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한국인’이란 사람들에게

한국과 중국의 동이족론


한반도와 만주의 민족들을 통칭하는 ‘동이’라는 명칭은 원래 ‘동쪽의 오랑캐’라는 뜻으로 중국 내에서 사용한 것이다. 주나라 건국 직후에는 상나라를 의미했으며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산둥반도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의미하게 되었다. 중국이 통일을 한 직후인 한나라 때부터 동이라는 이름은 바다 건너 고구려, 부여, 옥저 등 한반도와 만주의 민족을 통칭하게 되었다. 동이라는 명칭의 등장과 그 의미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 문명의 발달과 수천년간 서해를 둘러싼 문화 교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하지만 동이족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미루어진 채 근대 이후 제국주의의 발흥과 중화사관의 팽창으로 현대 국가의 관점에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동이족의 의미를 해석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번엔 동아시아 역사 속에서 친근하지만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동이족’을 둘러싼 여러 나라의 동상이몽과 그 실체를 살펴보려 한다.

반제국주의 논리로서 동이족

중국에서 동이족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이 일어난 것은 20세기 초반이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 직후 중화 민족주의에 입각하여 중국사를 지키겠다는 민족주의 중국 역사가들이 있었다. 그들을 대표하는 푸쓰녠(傅斯年·1896~1950, 이후 국립대만대 총장을 지냄)은 중화문명의 우수성을 주장하기 위해 ‘이하동서설’을 제창했다. 이 설은 중국 최초의 국가인 하(夏)나라는 서쪽에서 채색무늬 토기를 쓰는 신석기시대 앙소(양사오)문화에서 기원했으며, 상(商)나라는 산둥반도에서 흑색의 토기를 쓰는 용산문화에서 기원한 동이족이라는 설이다. 한마디로 중화문명의 기원은 이원적이라는 뜻이다. 이는 서양 학계에서 주장하던 중국문명의 서방기원설을 반박하기 위함이다. 19세기 말부터 서양 학자들은 미개한 중국 사람들이 스스로 문명을 만들 리 없기 때문에 근동 지역 문명의 혜택을 받아 중국문명이 탄생했다는 극단적인 전파론을 주장했다. 게다가 1920년대에 스웨덴인인 안데르손이 중국 양사오유적지에서 서아시아의 신석기시대 토기와 너무나 유사한 채색무늬 토기도 발굴하면서 중국문명의 서방전래설은 더욱 확실해졌다. 이에 푸쓰녠은 이하동서설을 통해서 서방전래설 대신에 산둥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토착적인 중국인의 문화를 강조하려 했다. 즉, 동이족은 서방기원설을 막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 것이지, 우리나라 일각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한국의 동이족 역사를 밝히기 위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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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소문화 채색무늬 토기(왼쪽)과 터키 아나톨리아 지역의 채색무늬 토기(오른쪽)는 유라시아 전역에서 발견되는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100년 전 중국의 서방전래설의 근거로 사용되었다. 강인욱 제공

1930년대 들어 일본의 만주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푸쓰녠의 동이족에 대한 생각도 진화했다. 고조선의 성립 이래 만주는 전통적으로 한국사의 일부였으며 청나라 300년 동안엔 만주족의 발상지로도 신성시되었다. 어떤 경우이든 중원의 한족이 자신의 역사로 주장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자 푸쓰녠을 비롯한 중국의 열혈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은 비분강개하여 만주가 태고부터 중국의 역사라는 주장을 펴게 되었다. 푸쓰녠은 <동북통사>라는 저서에서 상나라에서 시작하여 만주와 한반도까지 모두 ‘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기 때문에 모두 중원에서 발흥한 역사라고 견강부회했다.


2000년대에 들어 푸쓰녠의 학설은 동북공정의 제창과 함께 다시 등장해 만주 일대를 중화민족의 역사로 재편하려는 중국의 팽창주의 사관에 이용되고 있다. 20세기 들어 중국이 서양과 일본의 침략을 이겨내기 위한 수단으로 고대사를 동원하여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해석하는 수단이 되면서 동이족을 둘러싼 혼란은 더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 역사계가 동이족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동안 한국에선 다소 감정적인 대응이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인터넷을 중심으로 유포된 ‘공자가 동이족 출신이기 때문에 한국인’이라는 주장이다. 공자가 동이족이라는 주요 근거는 공자가 죽기 직전 자신의 빈소가 상나라식으로 차려졌다는 꿈을 꾸었다는 데에 있다. 그런데 공자는 출생 자체가 부정확하기 때문에 그의 출신을 논하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없다. 공자는 70살에 가까운 숙량흘과 16살의 안징재 사이에서 야합의 결과로 태어났다. 공자가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만날 수도 없었고 무덤의 위치도 몰랐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야 무덤을 지키던 할머니가 아버지의 무덤을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그제야 공자는 정식 부부도 아닌 두 사람을 합장했다고 한다. 이렇듯 숙량흘이 실제 혈연적인 아버지인지는 공자 자신도 확신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니 공자의 동이족설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다.


혈연적인 계통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공자는 스스로 동이족의 관습과 문화를 금기시했다는 점이다. 공자가 동이족을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보여주는 ‘협곡회제’라 불리는 공자의 일화가 있다. 노나라는 정공 10년(기원전 500년)에 앙숙으로 지내던 산둥반도의 강력한 제후국인 제나라와 협곡에서 회담을 하게 되었다. 노나라의 운명이 걸린 일촉즉발의 상황에 공자도 노나라의 대표로 참여했다. 회담 전 행사로 제나라가 데려온 산둥반도 바닷가에 사는 동이족의 일파인 ‘래인’(萊人)으로 구성된 악사들이 음악을 연주했다. 공자는 군자들의 모임에 동이족의 음악을 연주한다고 분개하며 칼을 뽑아 들고 단상으로 올라가 춤을 추는 광대들의 손발을 그 자리에서 베어버렸다. 동이족의 음악이라는 이유로 불쌍한 광대들의 손발을 자른 공자의 행동은 공자가 동이족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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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화가 김진여가 그린 <‘협곡회제’ 공자성적도>(1700년, 비단에 색, 32×5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공자의 동이족설은 사실 지나가는 수많은 해프닝 중 하나로 끝날 거리였지만, 중국과 대만의 인터넷에서도 퍼지면서 큰 반발을 일으켰다. 학문적으로 제대로 된 연구는 없이 동이족 논란은 고대 국가를 둘러싼 현대 국가들 사이 갈등의 상징이 되었고, 공동연구 같은 것은 상상도 못 하는 상황이 되었다.

고고학이 전하는 동이의 실체

사실 동이를 비롯한 중원 변방의 오랑캐에 대한 역사 기록들은 워낙 단편적이고 그 내용도 천차만별이니 혼란만 가중된다. 그러니 남은 희망은 고고학 자료다. 고고학 자료는 고대 중국의 기록들에서 보이는 주변 집단들에 대한 편견이 생각보다 강했음을 증명한다. 예컨대 공자는 귀신을 믿던 상나라를 무너뜨리고 예와 제사를 갖춘 주나라를 이상적인 국가로 생각했다. 하지만 고고학 자료를 보면, 정작 기원전 11세기의 주나라 초기에는 예와 제사는 정립되지 않았으며, 공자가 생각하던 이상적인 제사의 모습은 공자 시기 약 100~150년 전인 기원전 7세기의 무덤에서야 등장한다. 게다가 주나라가 발흥한 중국 서북 지역을 발굴한 결과 주나라의 뿌리는 유럽인종 계열도 섞이고 유목문화의 영향이 강한 ‘융적’ 계통의 오랑캐임도 밝혀졌다.


중국의 남쪽도 오랑캐라 멸시받았지만, 실제론 중원보다 더 발달한 기술을 보유한 곳이었다. 신석기시대 양쯔강 일대에선 중원이나 내몽골의 홍산문화보다 더 앞선 성터와 옥기를 사용하는 양저문화가 등장했다. 또한 공자가 살던 시기인 기원전 5∼6세기에 ‘짐승 같은 야만인들’로 멸시된 초나라나 오월 지역의 청동기 기술은 같은 시기 중원보다도 훨씬 우수했다.


동이의 경우 협곡회제 때 공자의 칼에 봉변을 당한 래인은 바로 산둥반도와 랴오둥반도(요동반도) 사이에서 바다를 끼고 어로에 종사하며 고조선과 교류하던 사람들이다. 산둥반도를 중심으로 해안가에선 만주와 마찬가지로 고인돌이 널리 사용되며, 고조선 시기에는 비파형동검과 관련된 청동기들도 흔히 발견되었다. 바로 래인의 활약으로 모피나 비파형동검 같은 고조선의 특산품과 유물이 중국에도 알려지게 된 것이다. 반대로 랴오둥반도에서도 4천년 전부터 산둥반도의 주민들이 살면서 무덤을 만들었던 유적이 다수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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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산둥성 왕무산(王母山)의 고인돌. 박준형 해군사관학교 교수 제공

이런 관계가 진시황의 중국 통일과 이어진 박해로 산둥반도의 많은 사람이 한반도에 이민을 오게 된 배경이다. 그 좋은 예가 전북 완주 상림리에서 출토된 중국식 동검 26점이다. 국립전주박물관의 도움으로 한데 묶여서 발견된 동검들을 조사해보니 실제 사용한 흔적이 거의 없는 신제품이었다. 이 중국식 동검은 산둥반도에서 박해를 피해 한반도로 이주한 청동기 장인이 남긴 것이다. 중국 역사서가 동이족의 개념을 중원에서 바다 건너 만주와 한반도로 바꿀 수 있었던 데는 이런 수천년의 서해를 둘러싼 중국과 한국의 교류가 뒷받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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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완주 상림리에서 발견된 중국식 동검은 서해를 둘러싼 중국과 한국의 교류를 보여주는 고고학 자료다. 강인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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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산둥반도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 문화의 부채도끼 거푸집. 박준형 해군사관학교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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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산둥반도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과 유사한 동검들. 강인욱 제공

현대적인 고고학이 발달하지 않은 공자 당시에 주변 지역과 과거 유물에 대한 인식에 오류가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물론 그런 단점 때문에 공자의 학식을 깎아내릴 수는 없다. 문제는 고대 한국과 만주에 살던 이들을 ‘동이족’으로 통칭하면서 주민들의 다양성이 간과될 수 있다는 데 있다. ‘동이’로 통칭하는 지역은 고조선을 시작으로 해서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는 예맥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고, 남쪽에는 한이 있었다. 더 동쪽에는 청나라와 금나라를 건국한 선조인 읍루, 숙신, 말갈 등도 있다. 대부분의 중국이나 일본인 학자들은 애매하게 ‘동이의 세계’라는 식으로 처리하는데, 이런 관점은 오히려 진정한 고대사 연구에 장애가 된다.


고대사에 대한 편견에 가득 찬 중국인이 만들어낸 ‘동이’라는 개념을 현대의 관점에서 고집할 필요는 없다. 모든 역사는 그것이 쓰인 시대와 정보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동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현대 한국과 중국의 역사를 가르는 것도 의미가 없다. 대신에 중국인이 만들어낸 선입견으로 중원 이외 지역의 역사를 보는 관점이 얼마나 잘못 전달되었는가를 자각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동쪽 미지의 땅을 대표하는 단어가 된 ‘동이족’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경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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