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대생 출신 늦깎이 모델, 세계를 휩쓸다
김성일이 만난 완소 피플
군대서 패션지 보고 감명 받아 모델로 전향한 박경진
데뷔 직후 ‘엠포리오 아르마니’ 오프닝에 서
워킹 수업 받지 않고 ‘나만의 스타일’ 살려 호평
“데이비드 보위처럼 문화적 영향력 있는 이 되고파”
모델 박경진(27)씨가 지난 해 12월 28일 김성일 스타일리스트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
2015년 10월에 열린 이탈리아 밀라노 패션위크 행사 중 하나인 ‘2016 엠포리오 아르마니’ 패션쇼에서 런웨이 첫 번째 주자로 무대를 밟은 이는 한국인 모델 박경진(27)씨였다. 동양인 최초라고 한다. 24살 늦깎이 모델로 데뷔한 후 외국 굴지의 패션쇼에 도전장을 내민 지 1년도 채 안 돼 이뤄낸 성과였다. 오프닝 모델은 그해 그 브랜드의 얼굴 같은 존재다. 지금 그가 행보가 궁금하다.
모델 겸 방송인 한혜진(35)씨는 몇 년 전 한 방송에서 “패션쇼에서는 오프닝과 엔딩 무대가 중요하다. 그 자리에 서려고 톱모델끼리 신경전을 벌이기도 한다”고 말했다. 외국에서 무명 모델에 불과했던 박경진(27)씨는 4년 전 ‘2016 엠포리오 아르마니’ 패션쇼 오프닝 모델로 서면서 국내외 패션업계에서 화제가 됐었다. 그 뒤로 박씨는 2017년 글로벌 브랜드 ‘준지’(Juun.J)의 캠페인 모델로 활동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쳐 왔다. 지난해 12월28일 김성일 스타일리스트가 그를 만났다.
박씨가 서울 강남구에 있는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김성일(이하 김) : 패션쇼에서 몇 번 봤지만, 얘기 나눈 건 처음이네요. 모델 일을 늦게 시작했다면서요?
박경진(이하 박) : 네, 군대 제대 후 처음 했어요. 2014년 국내 패션 브랜드 ‘뮌’(MUNN) 쇼에 서면서 데뷔했죠. 그때 24살이었으니까 늦게 시작한 편이죠.
김 : 보통 10대 중·후반에서 20대 초반 시작하는 편이니까 늦은 편이네요. 그 전에는 무슨 일을 했어요?
박 :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어요. 공대생이었죠. 생각보다 적성에 맞지 않더군요.(웃음)
김 : 나와 비슷하네요. 대학에서 국문학을 공부했지만, 입대 후 내게 맞는 멋진 일이 뭘까 고민하다 패션업계로 오게 됐죠. 경진씨는 키가 무척 크잖아요.(그는 189㎝다) 타고난 모델 체형인데.
박 : 키가 크고 마른 게 콤플렉스였어요. 군대에서 우연히 패션잡지를 보고 ‘이거다’ 싶었어요.
김 : 어떤 내용을 봤나요?
박 : 독일의 명품 브랜드 ‘질 샌더’의 패션쇼 사진이었어요. 패션 디자이너 라프 시몬스가 쇼를 맡고 있었을 때였어요. 남성복인데 마른 체형이 입어도 될 법한 여성적인 옷이었죠. ‘마른 체형도 이렇게 멋있을 수가 있구나’ 감탄했죠.
김 : 제대 후에 바로 모델 일을 했나요?
박 : 처음에는 무작정 옷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2014년에 그 가게에 드나들던 한 패션 브랜드 관계자 분이 모델 일을 제안해주셔서 시작하게 됐어요.
김 : 공대생이 갑자기 패션 일을 하게 됐으니, 진로가 확 바뀐 거네요.
박 : 패션에 아예 관심 없었던 건 아니에요. 어머니가 한때 디자이너 앙드레김 선생님의 무대에 잠깐 올랐던 모델이셨어요. 옷의 중요성을 잘 아셨죠. 초등학교 때 어머니께서 아침마다 제 침대 위에 그날 입고 갈 옷을 놓아주셨지요. 가방까지 세심하게요. 자연스럽게 옷을 잘 입는 일에 관심이 생겼어요.
박경진씨가 2014년 국내서 모델로 데뷔해 이듬해 이탈리아 밀라노 패션위크의 문을 두드리며 외국 패션계에 도전했을 때 아무도 그가 이런 눈부신 성과를 낼지 예상하지 못했다. 워킹을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는 그였다. 주변의 우려를 뒤엎고 박씨는 모델들의 꿈인 영국의 브랜드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패션쇼에도 올랐다. 한 해만 반짝하는 신인 모델이 아니었던 것이다. 2016년에는 파리 패션위크에서도 증명했다. 프랑스의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 ‘드리스 반 노튼’ 등 패션쇼 무대를 섭렵한 그는 현재까지 정상급 모델로 활동 중이다.
‘2016 엠포리오 아르마니’ 패션쇼 오프닝에 선 박씨. 와이지케이플러스 제공 |
김 : 외국에 진출하자마자 유명 패션 브랜드 쇼의 오프닝을 했다면서요.
박 :처음부터 무조건 외국 무대에서 모델 활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늦게 시작했는데 어떻게 바로 외국 무대에 설 수 있겠느냐며 염려했지만 도전했죠.
김 : 어떻게 뽑히게 된 거예요? 원래 오프닝은 유명 모델을 세울 때가 많잖아요.
박 : 엠포리오 아르마니의 모델 캐스팅장에 도착했을 때, 그 브랜드 관계자들이 회의를 하고 있었어요. 저를 보자마자 놀란 표정을 짓더니 뭐라고 하더라고요. 영어를 한 마디도 못 할 때여서 제 뒤에 누가 있나 싶어 두리번거렸죠. 그런데 아무도 없는 거예요.(웃음) 그날 베레모(챙이 없는 모자)를 쓰고 갔는데 ‘이건 어느 브랜드 모자야?’라고 물어보며 관심을 보이더니, 자기네 브랜드의 베레모를 가져와 쓰게 한 뒤 ‘오, 좋아’ 하더라고요.
김 : 그 유명한, 디자이너 아르마니도 실제로 만났나요?
박 : 그분 앞에서 워킹을 했더니 ‘멋지다’고 해주셨어요. ‘이번 쇼의 오프닝은 너다’라고 하더군요. 순간 눈물이 나왔죠. 처음 외국에서 따낸 무대가 오프닝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어요.
‘2016 비비안 웨스트우드’ 패션쇼에서도 박씨는 런웨이를 걸었다. 와이지케이플러스 제공 |
김 : 다른 패션 브랜드 무대에서도 섰던데요. 기억나는 일화가 있나요?
박 : 당시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모델 캐스팅장도 갔어요. 200명 넘게 줄을 서있었죠. 원래 티셔츠와 바지만 입고 워킹 하는 분위기인데, 저는 제 스타일대로 입고 베레모도 썼죠. 바로 ‘합격’이란 말을 들었어요.
김 : 늦깎이인 데다가 패션쇼 경험도 거의 없었는데, 캐스팅 성공 노하우가 뭘까요?
박 : 능숙하지는 않았지만, 패기와 자신감이 충만했던 게 눈길을 끌었던 것 같아요. 당당하게 베레모를 쓰고 다닌다든지. 헤어스타일도 독특해서 튀었고요.
김 : 헤어스타일이 남들과 좀 달랐나 봐요.
박 : 원래 머리 길이가 엄청 짧았어요. 그러면 다양한 헤어스타일을 할 수 없잖아요. 머리를 좀 길러서 펌을 했어요. 주변에서는 다 말렸지요. 짧은 검은 생머리를 해야 외국 패션쇼에 자주 설 수 있다면서요. 동양인 특유의 매력을 유지해야 캐스팅이 잘될 거란 얘기죠. 저는 성격이 하고 싶으면 해야 해서요.(웃음) 결국 새로운 헤어스타일로 2016년 파리 컬렉션의 문을 두드려봤죠.
김 : 반응이 어떻던가요?
박 : 남자 모델은 짧고 단정한 헤어스타일이 정석이었던 터라 제 모습이 신선하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드리스 반 노튼’의 캐스팅 담당자가 ‘너무 예쁘다. 사진 찍어도 되냐’며 관심을 보였던 기억이 나요.
김 : 캐스팅을 대비해서 워킹 연습은 어떻게 했어요?
박 : 워킹을 전문적으로 배우진 않았어요. 열정 하나로 부딪혔어요. 평소에 패션쇼 영상을 보는 걸 좋아해서, 선배들의 워킹을 제 방식대로 풀어 보려고 노력했죠. 모델 캐스팅장에서는 3~5초 만에 당락이 결정 나거든요. 짧은 순간에 ‘나’를 보여주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2017 에르메스’ 패션쇼에서 박씨는 찬사를 받았다. 와이지케이플러스 제공 |
김 : 롤 모델이 있나요?
박 : 패션모델은 아니지만, 영국의 록 스타 데이빗 보위, 미국의 현대미술가 앤디 워홀 등이요. 자신만의 아우라를 만드는 이들에게서 매력을 느껴요. 그 아우라에 끌려 그들이 하는 음악, 미술 등에도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김 : 앞으로 어떤 모델이 되고 싶어요?
박 : 모델로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싶어요. 최대한 많은 패션쇼에 올라 경력을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모델로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대중에게 보여주는 것에도 흥미를 느껴요. 요즘은 에스엔에스(SNS) 등 온라인 채널이 활성화돼 있잖아요. 저만의 스타일을 보여주면서 종국에는 모델을 기반으로 다양한 일들을 해보고 싶어요.
김 :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해보고 싶나요.
박 : 안경에 관심이 많아요. 안경 디자인을 공부해서 브랜드를 만들고 싶어요. ‘박경진’이라는 모델을 통해 대중이 패션 등 다양한 문화를 경험할 수 있게 하고 싶어요. 데이빗 보위의 음악을 좋아했던 이들이 그의 패션이나 사고방식에 관심을 가졌던 것 처럼요.
김 : 어떻게 보면 인플루언서(영향력 있는 개인)가 꿈인 거네요.
박 : 상업적인 인플루언서는 아니고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모델이 되는 게 꿈이에요.
박경진씨는 2018년 마지막 날인 12월31일 프랑스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2019년 2월에 열리는 파리 패션위크에서 날개를 펴기 위해서였다. 그의 비상이 어디까지일까 궁금해진다.
박경진 프로필
- 2015년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엠포리오 아르마니’ 오프닝 장식. 영국 고급 브랜드 ‘비비안 웨스트우드‘ 모델로 활동. ‘헤라서울패션위크’에서 ‘푸시버튼’·‘김서룡옴므’ 모델로 활동.
- 2016년 프랑스 고급 브랜드 ‘에르메스’·‘드리스 반 노튼‘·‘벨루티’ 등 모델로 활동. 이탈리아 밀라노 패션위크에서 활동.
- 2017년 글로벌 패션 브랜드 ‘준지’, ‘우영미’ 등에서 활동. 패션사진가협회 선정 신인남자모델상 수상.
- 2018년 프랑스 파리 패션위크에서 ‘드리스 반 노튼’ 등 모델, 안경 브랜드 ‘라피스 센시블레’의 모델로 활동.
김성일 스타일리스트
정리 김포그니 기자pognee@hani.co.kr, 사진 강현욱(스튜디어 어댑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