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장애 소년’ 그림을 ‘천국행 보험’ 삼은 부자들
[토요판] 이유리의 그림 속 권력 (2)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명화에 등장하는 가난한 자들
고난 속 삶 긍정하는 메시지뿐?
적선 통한 구원 갈구한 부자들
천국행 염원에 빈자를 장식물로
선거철 시장·쪽방 찾는 정치인들
소외자 들러리 세우는 행태 비슷
후세페 데 리베라, <내반족 소년> , 1642년, 캔버스에 유채,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
“성경의 말씀에서 가장 유익한 건 이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늘 너희 곁에 있을지니’, 그들이 있기에 우린 언제나 자비로울 수 있는 것이지요.”
미국의 작가 진 웹스터가 1912년에 펴낸 서간체 소설 <키다리 아저씨> 중 한 부분이다. 주인공 주디가 교회에서 들은 주교의 설교를 ‘키다리 아저씨’에게 편지로 옮겨 쓴 구절인데, 주디는 이 설교에 크게 불만을 표시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주교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가난한 사람들이 무슨 유용한 가축이라도 된단 말인가요.”
환한 표정 ‘내반족 소년’이 든 쪽지의 의미
내가 만약 주디에게 이런 편지를 받았다면, 답장 대신 그림을 보여줄 것이다.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존재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 흔적이 옛 그림에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먼저 스페인의 화가 후세페 데 리베라(1591~1652)의 1642년 작 <내반족 소년>을 보자.
맨발에 낡은 옷을 입은 소년이 탁 트인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다. 한눈에 보아도 그는 가난한 소년. 게다가 발은 굽어 있다. 소년은 발이 안쪽으로 휘는 ‘내반족’ 장애가 있는 듯하다. 어깨에 걸친 기다란 목발 없이는 아마 걷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소년은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가난과 장애의 이중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만 같다. 화가 리베라는 이 그림을 그릴 당시 스페인의 통치를 받던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그곳에서 만난 이 소년의 낙천적인 태도에 꽤 감화됐던 것 같다. 시점을 아래에 둔 채 그려 소년의 풍채를 위풍당당하게 표현한 것만 봐도 그렇고, 귀족이나 왕족 초상화의 배경이 되는 넓고 광활한 풍경을 소년의 뒤에 배치한 것도 그렇다. 그래서인지 <내반족 소년>은 보통 ‘어려운 환경에도 삶을 긍정하는 인간’에 대한 경의를 표현한 그림으로 국내에 소개되곤 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의아한 지점이 있다. <내반족 소년>의 세로 크기는 164㎝. 거의 사람 키 높이 그림이다. 과연 리베라는 단순히 가난한 소년의 청청한 생기를 기록하고 싶은 인간애 하나로 이 거대한 그림을 그렸던 걸까? 리베라가 살았던 시대는 17세기다. 순수한 취미로서의 회화가 등장한 근대 이전에는, 그림이란 주문자가 있어야만 비로소 그려지던 것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장애가 있는 남루한 소년의 초상을 리베라에게 의뢰한 사람이 따로 있었다는 얘기다. 의뢰자가 누구였는지는 학자마다 의견이 엇갈린다. 나폴리 총독인 메디나 데라스토레스 공작 또는 나폴리의 스틸리아노 공작이라는 설도 있고, 플랑드르 상인이 의뢰했다는 주장도 있다. 어쨌거나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 셋 중 누가 주문했든 그들 모두 부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부자는 왜 굳이 목돈을 들여 <내반족 소년>을 주문했을까. 바로 가난한 사람의 존재는 부자들에게 천국을 보장하는 ‘보험’이었기 때문이다.
마태오복음 19장 24절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아예 ‘부자는 천국으로 갈 수 없다’고 못박은 셈이다. 그 옛날 서양 부자들은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심정이 어땠을까. 죽은 뒤 지옥 가기는 두렵고, 그렇다고 현세의 안락을 보장해주는 돈도 포기하기 힘들고. 진퇴양난이었을 것이다. 이때 교회는 부자들에게 한 줄기 빛 같은 해결책을 내놓았다. ‘신은 우리의 행동을 보고 있으며, 가난한 이에게 자선을 베풀면 천국에 갈 수 있다.’ 즉 가진 돈 중 약간만 내놓으면 문제없다는 얘기다. 다행히(?) 가난한 사람은 주위에 널려 있었기에, 부자들은 천국행 티켓을 사 모으듯 그들에게 자선을 베풀 수 있었다.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뿌듯함, ‘나는 착한 사람’이라는 자부심은 덤으로 따라왔다. 그리고 그 증거를 그림으로 남겨 집에 걸어두었다. 리베라의 <내반족 소년>도 그런 ‘선행의 증거’ 중 하나다. 소년이 왼손에 쥔 쪽지엔 보란 듯이 또렷하게 “(당신이) 신의 사랑을 받으려거든 저에게 자선을 베풀어주세요”라고 라틴어로 적혀 있다. 당시 라틴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교육을 잘 받은 상류층뿐이었다. 이 그림의 의뢰자는 자신이 쪽지의 내용을 잘 실현하고 있음을 과시하고 싶었으리라.
선제후 궁전 벽을 장식한 거지 소년들
리베라와 동시대에 스페인 세비야에서 활동한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1618~1682)가 그린 풍속화도 마찬가지다. 무리요의 그림 <포도와 멜론을 먹는 소년들>에도 맨발에 넝마를 걸친 거지 소년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며칠 굶은 것처럼 게걸스럽게 포도와 멜론을 먹고 있다. 다 먹은 멜론의 껍질이 바닥에 어지러이 흩어져 있지만, 이들은 먹는 걸 멈출 생각이 전혀 없는 듯하다. 그런데 이 소년들은 어쩐 일로 비싼 과일을 먹을 수 있게 되었을까? 아마 그림 왼쪽에 놓여 있는 과일 바구니를 선물하고, 소년들이 과일을 허겁지겁 먹는 걸 흐뭇한 눈으로 지켜보는 부자가 있었을 것이다. 미술사학자인 이케가미 히데히로 도쿄조형대학 교수는 리베라와 무리요의 이 같은 풍속화를 “작품을 의뢰하고 사들인 부자 자신이 자비롭다는 것을 신과 다른 시민에게 자연스레 드러내기 위해 그려진 그림”이라고 규정했다. 실제 <포도와 멜론을 먹는 소년들>은 여러 귀족의 방을 거쳐 1698년에 네덜란드 총독이었던 막스 에마누엘 선제후의 궁전 벽을 장식했다. “필요를 생각 안 하고 그려지는 그림은 없다는 것이 원칙”이라는 이케가미 교수의 말을 고려해본다면, 막스 에마누엘 선제후가 이 그림이 필요했던 건 ‘사후 구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으리라.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포도와 멜론을 먹는 소년들> , 1645년께, 캔버스에 유채, 독일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
물론 이유야 어떻든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쪽이 외면하는 것보다야 더 낫다는 사실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례는 어떤가. 돈이 절실히 필요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거액의 사례를 조건으로 ‘조각상’이 되라고 한다면? 실제 19세기까지 영국 귀족들 사이에선 자신의 정원을 고차원적으로 장식할, 살아 있는 ‘인간 조각상’을 고용하곤 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예부터 영국의 귀족과 부자는 자식을 이탈리아 같은 문화 선진국으로 장기 유학을 보내곤 했다. 영국의 도련님들은 고대 로마의 기상이 깃든 유적지를 답사하고 예술작품들을 감상한 후 고전주의적 이상에 물든 채 귀국하곤 했다. 그리고 그동안 배운 것을 영국에 있는 자신의 집과 정원을 설계할 때 재현하고자 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그저 아름답기만 한 정원은 얄팍한 것이었다. 무릇 제대로 된 정원을 만들려면 덤불 깊숙한 곳에 삶의 무상함과 부의 덧없음을 표현할 장치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인간 조각상’이었다. 1738년께, 영국의 귀족이자 정치가인 찰스 해밀턴(1704~1786)은 잉글랜드 서리 지역에 있는 자신의 정원 페인스힐에서 살아갈 ‘인간 조각상’을 모집한다며 다음과 같은 조건을 걸었다. “7년간 인간 조각상으로 지낼 사람 구함. 성서 한 권, 안경, 발을 올려놓을 깔개, 베개로 쓸 방석, 모래시계, 마실 물 그리고 음식은 무료 제공. 낙타의 털로 짠 옷을 입고 있어야 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머리털이나 수염, 손톱, 발톱을 깎아서는 안 됨. 또한 해밀턴의 정원 밖으로 나가거나 하인과 말을 섞어서도 안 됨.”
이런 가혹한 조건을 견딜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없는 사람은 늘 넘쳐났다. 그들은 부자들의 정원으로 제 발로 걸어와 ‘울며 겨자 먹기’로 조각상이 되었다. ‘인간 조각상’이 어떻게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희귀한 그림이 남아 있다. 자신의 정원에 ‘인간 조각상’을 설치하는 행위는 영국 바깥의 유럽 국가에도 퍼졌는데, 독일의 화가 요한 밥티스트 슈미트(1768~1819)가 그것을 <플로트베크의 인간 조각상>이라는 작품으로 남긴 것이다.
급기야 ‘인간 조각상’까지
요한 밥티스트 슈미트, <플로트베크의 인간 조각 상> , 1795년, 세피아 채색, 독일 함부르크 미술관. |
그림 속 ‘인간 조각상’은 독일 함부르크 근처 플로트베크의 정원에서 은둔자처럼 살고 있다.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 테이블에는 삶의 무상함을 의미하는 상징물들, 예컨대 두개골, 모래시계, 책 등만 간신히 놓여 있었을 것이다. 빛도 제대로 들지 않는 오두막 안에서 이제 막 밖으로 나온 노인은 눈이 부신 듯 손으로 햇빛을 애써 가리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러한 여유로움은 주변에 사람이 없을 때만 허락되었다. 만약 고용주가 손님을 대동하고 플로트베크에 온다면 그는 즉시 깊이 생각하는 포즈를 취한 채 미동도 하지 않을 것이다. 고용주는 자신의 인간 조각상을 다른 이들에게 과시하길 좋아했기에 자세와 차림새 모두 일절 흐트러짐이 없어야 했다. 고용주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계약 위반으로 약속한 돈을 못 받을 수도 있었다. 부자들은 인간 조각상이 중도에 포기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을 다 마친 후에야 돈을 건넨다는 의무규정을 계약서에 명시했기 때문이다. 인간 조각상으로 부자에게 고용된 가난한 이들은 계약된 수년 동안 철저히 고립된 채 사람답지 않게 살아야 했다는 이야기다.
<키다리 아저씨> 속 주인공 주디가 이 그림들을 봤다면 어땠을까. 얼떨결에 ‘불편한 진실’을 자기 입으로 말해버린 셈이니 당황했을 것이다. 그림 속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의 유용한 가축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말이다. 어떨 땐 자신의 자비로움을 만천하에 표명하는 도구이자 천국 문을 여는 열쇠로. 때로는 자신의 정원을 좀 더 진지한 사색의 장으로 업그레이드해줄 비싼 액세서리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에게 ‘만능키’와 다름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선거철만 되면 돈을 쥔 자들은 출마를 준비하며 굳이 낙후된 재래시장과 쪽방촌을 찾는다. 그러고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삶을 헤아리겠다며 어설프게 떡볶이나 순대를 사 먹는다. 물론 이때 사진사도 꼭 대동한다. 그들은 왜 이럴까. 다수의 가난한 유권자야말로 자신에게 권력을 가져다줄 도구, 여의도행을 보장해줄 열쇠이기 때문이다. 이때 그들이 몸에 어색하게 걸치는 가난과 서민놀음이야말로 선거철 최고의 액세서리라 할 수 있겠다. 오늘날 선거철에 쏟아져 나오는 이 사진들이야말로, 돈과 권력을 쥔 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어떻게 이용했는지 후세대 사람들이 알 수 있게 해주는 증거가 되리라. 지금 우리가 리베라와 무리요, 슈미트의 그림을 보듯이 말이다.
▶ 이유리 작가. <화가의 출세작> <화가의 마지막 그림> 등 예술 분야의 책을 썼고, <한겨레> 토요판에 연재한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을 묶어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을 냈다. 이번엔 그림을 매개로 인간 사회에 작동하는 다양한 층위의 권력관계를 드러내고, 여기서 발생하는 부조리를 다뤄보려고 한다. 3주에 한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