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에 새겨진 고대 원주민들의 과거, 아나사지
아나사지 문명 /flickr |
미국 남서부 중앙 애리조나·뉴멕시코·콜로라도·유타 등 네 주가 맞닿아 있는 지역에는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이 있다. 언뜻 봤을 땐 사막이나 절벽밖에 보이지 않아 과연 사람들이 문명을 이루고 살았을지에 대한 의문이 들 수 있는 곳이다.
이 곳에 살던 사람들은 푸에블로인이라 불렸다. 최소 천 명이 넘게 살았다고 하며, 이들은 건물을 짓고 아궁이와 방, 침실을 만들어 살았다. 북아메리카 남서부의 농경 문화로, 애리조나·뉴멕시코·콜로라도·유타 접경지역에서 발달한 고대 아메리카 인디언 문명을 아나사지 문명이라 부른다.
절벽 속 숨은 건물 /flickr |
'아나사지'는 북아메리카 인디언 중에서도 인구가 가장 많은 종족이었던 나바호족이 '옛날의 것'이란 뜻으로 부른 이름이다. 고대 푸에블로인들은 작은 가족 단위를 이루어 움집에서부터 시작해 방어를 위해 절벽에 설치한 요새와 거주지까지 다양한 건물을 만들어 살았다. 푸에블로란 말은 스페인의 식민지 개척자들이 붙인 것으로, 절벽에 위치한 건물들은 밧줄이나 암벽등반으로만 통해 접근할 수 있었다. 후기 건물은 벼랑 기슭에 건설되어 다른 지역의 집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고, 협곡과 벼랑을 따라 아파트식 형태로 형성되었다.
고대 푸에블로인들은 유타주·콜로라도주·뉴멕시코주에 걸쳐 있는 콜로라도 고원을 가로질러 일종의 지역 사회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이들은 달과 태양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춘분과 추분의 날짜를 알았고, 천문학 지식을 건축 공사와 농사를 짓는 일에 적용했다.
그들이 치루는 종교 의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키바’라 불린 예배실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기도 했다. 학자들은 이 문명이 언제 생겨났는지에 대한 연구를 지금도 진행 중이다. 현재로서는 기원전 12세기경에 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유물로 바구니가 많이 발견되어 이 때를 사람들이 바구니를 만든다는 뜻의 '바스켓 메이커 시대'라 부른다.
푸에블로인들은 규칙적인 비가 내리는 온화한 기후 속 농사를 지었고 인구는 급속도로 증가한다. 인구가 최대 10배까지 증가했다는데 이것은 아마 적절한 기후의 요인도 있겠지만 주변 지역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도 본다. 수십년에 걸쳐 푸에블로인의 문화는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다만 고대의 푸에블로인들은 12-13세기에 그들의 거주지를 떠나게 된다.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지역적인 기후 변화, 장기간의 가뭄, 삼림 벌채로 인한 주변 환경 악화, 종교나 문화적 변화 등 여러 요인들을 추정할 뿐이다.
절벽에 파여 있는 굴 /flickr |
당시 원주민들의 거주지 /flickr |
지금의 학자들은 고대 푸에블로인들이 농업을 더 이상 지속하지 못할 정도였던 기후 변화를 피해 떠났다는 설을 추정한다. 초기 고대 푸에블로인들이 떠나고 중기, 2대 푸에블로인들이 사는 시기 동안은 기후가 상대적으로 따뜻했고 강수량 또한 충분했다고 한다. 자연히 공동체는 더 커지고, 사람들은 더 오래 거주하기 시작했다. 건축과 도자기 등 지역적인 전통과 문화가 생겨났고, 다른 마을간의 장거리 무역도 등장했다.
후기에 들어 푸에블로인들은 자립을 시작했고 먼 지역 사회와의 무역이나 교류는 감소했다. 대신 변덕스러운 날씨에 대비해 물을 확보할 수 있도록 댐을 만들고 관개 기술을 개발했다. 예전처럼 한 자리에 오래 사는 건 없었다. 인구의 수는 계속해서 유동적이었고 이들은 주변 환경이 불리해지면 거주지와 논밭을 버리고 떠났다. 강우량이 적어 물이 없을 시기엔 농장이 많은 정착지가 버려졌다.
사람들의 종교에 대한 의식 또한 변화했다. 여러 건물들은 종교 의식으로 제공된 것들이 많았지만 하나둘씩 무너졌고 예배당이었던 키바의 벽은 화재로 인해 그을렸다. 거주지는 하나하나 버려지고 푸에블로인들은 뿔뿔이 흩어져 멀리 정착했다.
다만 현대의 푸에블로인들은 고대의 푸에블로족이 일반적으로 묘사되는 것처럼 '급속하게 몰락하여 모두 사라진' 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그저 자신들의 조상들이 더 좋은 기후와 더 많은 물을 가진 지역으로 떠난 것이고, 지금도 애리조나주와 멕시코주에 여전히 살고 있는 현대 푸에블로인들의 뿌리라 말한다.
해골에 난 상처들 /flickr |
급격히 변하는 날씨와 환경에 대한 스트레스는 사회 구조의 변화를 야기하고, 곧 사람들의 갈등과 전쟁을 초래한다. 머리 가죽을 벗기다 생긴 두개골의 상처나, 몸 속에 화살촉이 발견된 해골이나, 인육을 먹다 생긴 이빨자국들이 남은 유골이나 뼈들이 유적지에서 발견된 것이 반증한다.
전쟁, 분쟁, 식인에 대한 증거는 지금도 학자들이 논의하고 있는 주제다. 학자들은 최악으로 치달았던 극심한 가뭄,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린 구성원들, 종교적 의례로 시행됐던 식인 풍습, 외부인이나 적의 침입 등 여러 요인 때문에 아나사지 문명이 멸망했을 것으로 본다.
구덩이를 파고 만든 집 /flickr |
학자들은 아마 이들이 동굴에서 나와 만든 최초의 건물이 바스켓 메이커 시대의 일반적인 특징인, 구덩이를 파 만든 집일 것이라 추측한다. 구덩이를 파고 나무와 흙을 쌓아 만든 집은 이전 고대 시대 사람들이 만든 집보다 훨씬 더 견고했다고 한다. 구덩이 안에 목재로 벽과 지붕, 기둥을 세우고 지붕 위에는 흙을 쌓았다. 그래서 외부에서 봤을 때 마치 흙무덤 같은 느낌의 집들이 세워졌다.
바구니 /flickr |
당시 사람들이 재배했을 콩 /flickr |
초기 바스켓 메이커 시대의 사람들은 농작물에 의존했고 음식들을 저장할 수 있는 창고 같은 저장 시설에 관심을 가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은 옥수수와 호박, 콩을 심어 단백질이 풍부한 식단을 만들었다. 이것은 더 많은 사람들이 오래 살고, 많은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했다.
이들은 음식을 저장하는 데 쓰는 바구니를 만들었다. 도자기를 만들기 전까지 푸에블로인들은 바구니를 이용했다. 이를테면 버드나무로 만든 바구니 안에 물을 채우고 뜨거운 돌을 넣어 요리를 하는 식이었다. 이들이 만든 바구니는 콜로라도, 유타주, 애리조나주 등 여러 지역에서 유물로 발견되었다. 이후 도자기를 만들면서 바구니는 자연스레 사라지게 된다.
유적지에서 발견된 토기 조각들 /flickr |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의 도자 유물들 /fli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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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에블로인들은 도자기를 많이 만들었는데, 당시엔 가뭄도 없고 온화한 날씨로 인해 농사를 쉬이 짓고 공동체가 성장하면서 부족 구성원들 또한 복잡한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요리나 음식 보관에 쓰인 토기들은 매끄러우면서도 질감이 있는 회색 토기들이 많았다.
장식용으로 쓰인 토기들은 가끔 화려한 모습이 있으며 붉은색이나 갈색의 토기도 발견되었다. 도자기는 무역에도 도움이 되었는데, 한 공동체가 농사를 짓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 자신들이 만든 장식용 도자기를 다른 공동체의 농작물과 교환하기도 했다고.
푸에블로인들은 2천 년이 넘게 미국 남서부의 광활한 지역에서 살았다고 한다. 푸에블로인들이 살았던 뉴멕시코주 차코 문화 지역, 콜로라도주 남서부에 있는 메사 베르다 유적지 등이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지정됐으며, 특히 메사 베르데는 미국 최초로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차코 캐니언 /flickr |
특히 차코 캐니언은 4개 주 경계가 만나는 지역으로 무역과 정치 활동, 종교 의식의 중심지였다. 학자들은 여러 주거지에서 악기, 보석, 도자기와 의식 용품 등을 발견했는데 이는 거주한 사람들이 엘리트이자 부유층임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들은 음식 그릇, 보석이나 구슬을 포함해 죽은 사람들과 함께 묻는 실내 매장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푸에블로인들은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집단 거주지를 이루며 살았다. 초기부터 절벽으로 옮겨가 건물을 조각하고 만든 건 아니었다. 초기엔 수렵 생활을 하며 동굴에 살았고 , 바스켓 메이커 시대엔 버드나무 같은 식물로 바구니를 만들고 땅바닥을 파 움집을 건설해 음식을 저장하고 살았다. 중기엔 푸에블로인들이 더 깊은 구덩이를 파고 지하실과 지상의 방이 있는 집을 건설한다. 이후엔 석조 건축물, 지상의 주거지로 서서히 대체된다.
지금의 예배당 노릇을 했던 키바 /flickr |
키바가 등장한 것도 이때쯤이다. 의식적인 목적, 종교적 의식을 치루기 위한 커다란 키바를 짓기 시작했고, 후기에 들어 기후 변화와 적들의 침입을 피해 절벽으로 옮겨간 이들은 절벽의 주거지를 건설했다. 이들은 돌, 진흙과 다른 지역에서 가져온 재료들로 지금의 아파트와 비슷한 건축물을 짓거나 절벽에 새기고 조각해 집을 만들었다. 푸에블로인들이 만든 건물들은 다층적이며, 광장은 개방되어 있고 전망대는 건물 주변에 있었다
아마 수백에서 수천 명이 이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을 것이다. 절벽으로 옮겨가기 전 지어진 수천 개의 건물 사이로는 서로 직선 도로를 여러 개 만들어 주변의 다른 마을과 연결되게 해 놓았다. 방사형으로 뻗은 직선 도로망은 인근 150개 이상의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인근 부락과 그들의 세계관을 공유한 것으로 보이며 건물들은 시민들이 즐기는 문화 행사들도 개최하는 장소로 쓰였다.
아나사지 문명의 푸에블로인들은 지금의 미국 남서부의 고원 지대에 살았던 선사 시대 농경민족과 같았다. 이들은 크고 작은 마을을 이루며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했다. 수세기에 걸쳐 건축 양식이 진화해도 건물들은 몇 가지 핵심적인 특성을 유지했다고 한다. 거주지마다 평균 200개 이상의 방이 있었고 일부는 700여개가 넘기도 했다고.
절벽에 그려진 그림들 /flickr |
바구니 모양을 새겼다 /flickr |
푸에블로인들은 콜로라도, 유타, 애리조나, 뉴멕시코 등 각지에서 살았던 절벽에 암각화를 새겼다. 차코 캐니언에 보존된 암각화에도 푸에블로인들이 새긴 그림을 볼 수 있다. 도자기에도 손수 그림을 그려 만들던 사람들은 기후변화와 외적의 침입에서 쫓겨온 절벽에 건물을 짓고 창고를 만들면서도 넓은 벽에 그림을 조각해 두었고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다.
아나사지 문명 /flickr |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 마을을 이루고 살던 수천 명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누군가는 절벽으로, 누군가는 먼 지역으로, 누군가는 지하로 숨어들어갔다. 오늘날 미국 남서부 애리조나주, 미국과 멕시코를 통하는 리오그란데 강, 멕시코주에서 수만 명의 푸에블로인들은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는 옛날처럼 농사를 짓고 양과 소를 기르며 또 누군가는 의사, 선생님, 작가 등 다양한 직업을 갖고 사회에 존재한다. 과거에 푸에블로인들이 절벽에 지워지지 않는 그림을 새겼던 것처럼 남은 인디언들 또한 수천 년 된 문화를 지키며 과거를 지켜내고 살아간다.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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