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탐구] 보그 표지를 장식한 106세 필리핀 타투이스트가 잇는 전통 '맘바바톡'
아포 황옷 오가이 /Vogue Philippines 공식 SNS |
최근 패션잡지 보그 필리핀판 표지 모델로 106세, 필리핀 산악 부족 출신의 아포 황옷 오가이가 선정되었다. 그는 보그의 역대 최고령 모델로, 보그 필리핀은 북부 칼링가주(州) 산간 오지인 부스칼란에 살고 있는 그를 4월 표지 모델로 선정했다.
이유는 그가 부족 토착 전통인 ‘팜바바톡’의 계승자로, 문신법을 보전해 새 세대에게 영감을 준 공로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보그 필리핀판 편집인 베아 발데스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직원들이 만장일치로 그를 표지 모델로 정했다"고 전했다.
덧붙여 "우리는 그가 필리핀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대변한다고 봤다. 아름다움에 대한 개념도 진화할 필요가 있으며, 다양한 얼굴과 형상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며, "우리가 말하고 싶은 아름다움은 인간애"라고 설명했다.
영국 가디언지는 이번 보그 필리핀판 표지 모델로 선정된 황옷 오가이의 문신법을 소개했다. '팜바바톡'이라 불리는 칼링가족의 전통 문신은 가시와 그을음, 천연 염료와 대나무 막대기를 이용해 몸에 그림을 새긴다.
문신 작업 과정 /Vogue Philippines 공식 SNS 캡쳐 |
흔히 여성을 꾸미는 물건이라면 여러 액세서리 말고도 입술에 바르는 립스틱, 손톱에 바르는 네일, 눈화장할 때 쓰는 아이라이너 등이 있다. 그 이전에도, 아주 옛날부터 여성들은 자신들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썼다. 필리핀에는 오랜 세월 동안 전해져 내려온 전통이 있고, 막대기와 가시를 이용해 문신을 새기는 '팜바바톡'도 그 중 하나다.
팜바바톡은 적어도 역사가 천 년은 되었다고 하며, 어느 정도 성장한 필리핀 여성들은 이 전통을 잇는 데 참여했다. 분명한 건 이것은 여성들만 하는 일이 아니다. 옛날엔 원래 이 전통을 남자들만 이을 수 있었다. 지금은 남자도 상관없이 팜바바톡의 전통을 이을 수 있다. 화려한 문신을 가진 남성들은 주로 칼링가족의 전사로 부족의 적들과 싸운 전투를 나타내는 표시나 전통적인 마크를 몸에 지니고 있다.
전사들은 적을 무찌르고, 승리를 갖고 돌아오면 이들에 대한 용맹을 상징하는 문신을 받는 형태였다. 팜바바톡은 주로 여성들에게는 아름다움을 상징하지만 이 문신을 한 남성은 부족에서 용감한 사람으로 간주된다. 즉, 이 문신이 많은 칼링가 전사일수록 사람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고 적들에게는 두려움을 줄 수 있다.
황옷 오가이에게 보이는 빼곡한 문신들 /Whang Od 공식 SNS |
1918년에 태어난 황옷 오가이는 70년 이상 칼링가에서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문신 작업을 해 온, 살아 있는 마지막 맘바바톡이다. 맘바바톡은 팜바바톡의 대모라는 뜻이다. 황옷 오가이의 가슴과 팔에는 문신이 빼곡하게 덮여 있으며 별, 지네, 비단뱀의 비늘 같은 모양은 자연을 의미한다고. 막대기와 가시로 몸에 문신을 새기는 이 기술을 그에게 가르친 건 다름아닌 그의 아버지다. 그의 몸에 있는 문신 중 일부는 황옷 오가이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해 준 것이라고.
어렸을 때부터 황옷 오가이는 종종 문신 연습을 위해 자신과 친구들을 대상으로 문신을 하곤 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문신을 시작한 건 15세였다. 원래는 특별한 혈통을 가진 남자들이 주로 이 문신의 전통을 이어 왔다. 그러나 황옷 오가이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이 가진 재능과, 잠재력을 일찌감치 알아봤다. 황옷 오가이의 문신에 대한 참여는 어떻게 보면 세습되어 오던 전통을 깬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과적으로는 전통을 어긴 게 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옷 오가이는 팜바바톡 작업을 계속 해 나갈 수 있었다. 이후 그는 그의 남편이 벌목 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팜바바톡 수련에 일생을 바쳤다.
남성들의 몸에 새겨진 비늘 무늬의 문신 /Whang Od 공식 SNS |
그는 전쟁 후 돌아온 남성 전사들을 위해 문신 작업을 하거나, 여성들의 미적 목적을 위한 문신을 해 주었다. 칼링가 부족이 그렇듯이, 옛날의 그는 타투를 하며 가끔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가 만드는 문신 디자인은 고유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으며, 예를 들어 적을 죽이고 돌아온 전사는 독수리 모양의 문신을 받는 식이었다.
황옷 오가이는 처음 문신을 할 때 사다리와 비단뱀 모양으로 구성된 디자인을 선택했다. 비단뱀 무늬의 문신은 그들 부족 사이에서 내려오는 일종의 신성한 이야기가 존재한다. 이야기에 따르면 비단뱀 비늘 문신은 칼링가 마을의 아름다운 귀족 여성에게 처음 주어졌고, 이것은 인간과 사랑에 빠졌던 영웅의 신이 주는 선물이었다고. 이후로 문신은 여러 세대의 걸쳐 전해졌다. 옛날엔 여성이 문신을 하면, 여성의 가족이 문신 예술가에게 새끼 돼지나 추수한 쌀을 지불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전쟁도, 전사도 없어졌지만 황옷 오가이는 여전히 현지인들과 관광객들에게 문신 작업을 한다. 그리고 지금, 황옷 오가이는 더이상 관광객들에게 문신을 할 때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노래는 전투를 끝내고 돌아온 칼링가 부족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한 의미로 불렀던 것이기 때문에. 초기에 황옷 오가이는 문신 작업을 하며 별 소득을 얻진 못했지만, 마을에 점점 관광객들이 들어오면서 2015년 문신으로 하루에 최소 5000페소(한화 약 12만원)를 벌기도 했다.
황옷 오가이의 문신 작업 /Whang Od 공식 SNS |
그에게 타투를 받고 싶은가? 마닐라에서만 약 15시간 이상 소요되며 가이드는 필수다. 마을 주변에는 호텔이나 숙박 시설이 없어 최소 3일은 현지인들과 함께 생활해야 한다는 점도. 음식이나 상비약 등은 필수다. 또한 이 마을은, 와이파이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걸 참고해야 한다. 마을에 도착했어도 황옷 오가이의 문신을 받으려는 사람들로 줄이 길 수 있다. 대개 원래 있는 디자인들 중에서 선택해야 하며 가격은 300페소에서 1500페소(약 7,000원~30,000원)까지 다양하다.
작업은 우선 대나무 막대기와 주황색 가시, 그릇 등을 준비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가 사용하는 잉크는 전통적 재료로 만들어진다. 잉크는 깔라만시와 포멜로 나무의 가시를 이용해 숯과 물을 섞은 혼합물이다. 그는 잉크를 만들기 위해 벽난로에서 그을음을 가져와 물과 섞어 코코넛 그릇 안에서 잉크를 만든다. 이후 그는 풀잎을 잉크에 섞어 피부에 패턴을 그린다. 그러고 나서 황옷 오가이는 문신 작업을 시작한다. 주황색 가시를 잉크에 담근 후, 풀잎으로 그렸던 패턴을 따라 그린다.
이 과정은 대나무 막대기와 가시를 이용해 이루어진다. 그는 잉크가 바늘에 완전히 흡수될 때까지 같은 패턴을 계속 따라 그린다. 디자인이 작다면 시간은 30분 정도 걸리지만, 디자인이 크면 완료하는 데 2-3시간 정도 걸릴 수 있다. 문신을 위해 가시로 피부를 찌르는 건 고통이 있을 수밖에 없다. 가시가 일반 바늘처럼 매끄러운 편이 아니라서 더 아픈 것도 있는데, 팜바바톡이란 문신의 아름다움으로 인한 기쁨이 더 크기 때문에 견딜 수 있다고.
황옷 오가이와 전수자인 그레이스 팔리카스 /Voguemagazine 공식 SNS |
맘바바톡이 이제 황옷 오가이 하나로 천 년이 넘게 지속되던 고대 전통이 자칫하면 사라질 위기에 처했지만 황옷 오가이는 그의 손녀이자 전수자인 그레이스 팔리카스(Grace Palicas)와 엘리양 위건(Elyang Wigan)에게 기술을 훈련시키고, 전통을 잇도록 하고 있다. 지금은 더 많은 여성들이 이 예술에 관심을 갖고 있지만, 적어도 황옷 오가이의 복잡한 문신만큼은 따라하긴 어렵다고. 그의 견습생들이 이 정교하고 어려운 문신을 마스터하지 못한다면, 이 마을에서 황옷 오가이가 마지막 맘바바톡이 남을 수밖에 없다.
찍히는 점 세 개 /Vogue Philippines 공식 SNS 캡쳐 |
그는 매일 약 20-30명의 고객을 받으며, 요즘은 힘에 부쳐 복잡한 문신은 하지 않는다. 대신 제자들이 하는 문신이 완성되면 그가 세 개의 점을 찍음으로써 마무리를 한다. 보그 필리핀은 "이 세 개의 점은 자신과 그레이스, 엘리양을 나타내는 것으로 전통의 기원을 넘어 끝없이 확장하는 개방성과 지속성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가 가르친 제자들도 모두 여성으로, 현재의 전통을 잇고 있다.
필리핀 정부에서도 황옷 오가이의 문신법이 필리핀 문화에 미치는 영향을 알고 있다. 이 전통은 칼링가족의 지식과 전통 문화를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으며 젊은 세대와 외부 국가의 사람들에게도 알릴 수 있었다고 말한다. 필리핀 의원들은 황옷 오가이가 관광객들에게 문신 작업을 하고 있음으로써 지역 사회를 알리는 것을 돕고, 삶의 수단으로 전통적인 칼링가 예술을 실천하고 있다고 말한다. 2015년 9월부터 SNS에 올라간 해시태그 캠페인 '#WangOdNationalArtist'은 약 한달 만에 11,000여회 공유되기도.
전통 문화를 보존하기 위한 그의 경험과 노력을 인정받아 황옷 오가이는 필리핀의 무형 문화 유산을 지키기 위해 상당한 공헌을 했다고 인정하는 개인 또는 예술가 그룹에게 필리핀 정부가 수여하는 상인 '내셔널 리빙 트레저 어워드(National Living Treasures Award)'에 후보로 올랐고 ‘2018 무형문화유산 분야 공로상’을 받았다.
한가로이 커피를 마시는 황옷 오가이의 모습 /Vogue Philippines 공식 SNS 캡쳐 |
황옷 오가이의 하루는 아침에 밖으로 나가 닭에게 먹이를 주기 전 커피를 마시는 일과로 시작한다. 그는 문신 예술가라는 것 외에도 존경받는 마을 장로이기도 하다. 그는 코피리를 연주할 수 있으며, 돼지와 닭에게 먹이를 주고 농사를 짓는 일도 한다. 그는 현재 살아 있는 유일한 맘바바톡으로, 자신이 선택한 직업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는 고유의 문화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자신에게 주어진 독특한 예술을 지속해 나가고 있다.
황옷 오가이 /Vogue Philippines 공식 SNS |
이번 보그 필리핀판의 표지와 화보를 촬영한 필리핀 사진작가 아르투 네포무체노는 이번 촬영에 대한 소회로 "(황옷 오가이의)이 사진들로 식민지 이전의 필리핀 문화와 전통 문신에 대한 의미를 깨닫고, 이 전통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아야 하며 현대화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한다"며, "전통에 대한 철학과 의미를 전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이 프로첵트들이 더 많아지길 바란다"고 밝혔다.
황옷 오가이는 보그가 업로드한 영상에서 "내가 이 일을 그만두는 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라며, 그때까지 이 일을 계속할 것이라 전했다. 그는 이 타투라는 문신법이 끊어지지 않길 바라며 이 전통이 계속되길 바란다. 고령의 나이에도 오랜 시간 동안 이어진 전통, 예술, 문화를 지킨다는 것 하나만을 위해 노력하는 한 장인에게 감히 무한한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