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벵골 지방의 주택 양식으로 시작한 방갈로
방갈로 /flickr |
외국에 여행을 갔을 때, 또는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집이 있다. 아주 작은 집, 또는 오두막집으로 경사진 지붕과 넓은 베란다가 있는 집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을 '방갈로'라 부른다. 주택이지만 여러 계단이 있는 고층집에 비해 집 안에 계단이 따로 없다는 점에서 돌아다니는 데 매우 편리하며 특히 노인이나 휠체어를 타는 사람들에게도 간편한 구조다.
서양에는 방갈로만이 있는 동네도 있는데, 2-3층짜리 집들이 모여 있는 동네보다 프라이버시 보호가 수월하다고. 방갈로는 거의 1층이 최대인 건물이라 건물 주변에 심는 무성한 나무와 수풀은 이웃의 시야를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호주에 있는 방갈로는 내려쬐는 햇빛이 강해 실내를 가리기 위한 넓은 지붕이 특징이다. 다만 이 형태는 실내가 너무 어두워져 낮에도 실내에 불을 켜놓고 있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옛날엔 오두막, 요즘은 셰어하우스로
전통 방갈로 형태 /flickr |
'벵골 스타일의 집'을 의미하는 힌디어 'bangala'에서 온 방갈로는 벵골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로 지어진 집들을 의미했다. 통풍이 잘 되었던 초가집들은 자연스럽게 시골 느낌이 났다. 대개 방갈로들은 뜨거운 태양을 막기 위한 큰 지붕과 처마가 있었고 통풍을 위한 넓은 베란다가 있었다. 또 햇빛 때문에 최대한 지면에서 낮게 만들어졌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방갈로의 형태가 인도의 벵골 지방의 흔한 주택 양식에서 왔다고 추측한다. 벵골 지역의 집 구조는 초가 지붕과 개방된 베란다가 있는 1층 주택 형태가 흔했다. 원주민들이 쓰던 오두막들은 18세기 영국 관리인들이 쓰거나, 동인도 영국 회사의 영국인 선원들을 위한 곳으로 쓰였다. 또는 공무원들의 숙소나, 여름 휴양지를 위한 집을 짓는 데에도 쓰였다. 당시 인도는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영국인들은 그들이 머무는 동안 번듯한 가정집이 아니라 간편하게 쓸 수 있는 주택을 필요로 했다.
최초의 영국식 현대 방갈로는 지금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영국인 건축가 존 테일러가 설계했다. 이 집은 제2차세계대전 사이 영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존 테일러는 어느 건축가들이 그랬듯이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저렴하면서도 개방감이 있는 집을 설계하던 중에 방갈로 양식을 탄생시킨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한다. 이 양식은 특히 휴양지로 유명한 해안가들에 압도적으로 많이 만들어졌다. 1870년, 영국에서 해안 별장을 지은 사람들은 이 주택 형태를 'bungalows'라 불렀다. 이처럼 방갈로는 한동안 인도와 영국 사이의 산물로 남아 있었다.
일반적인 방갈로 /flickr |
이 실용적인 형태의 주택은 20세기 초 미국으로 들어왔다. 1910년대, 미국에서는 새로운 유형의 주택 구조가 나타난다. 그게 바로 방갈로다. 당시 900달러(한화 110만원 정도)밖에 안 됐던 이 작은 집은 나름의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었고, 자신의 집을 소유하고 싶은 미국인들의 소망을 이루어 주기에 충분했다. 시카고에서 몇몇 건축가들은 땅값이 비싼 지역에 장인 스타일의 캘리포니아 방갈로를 설계하고 건설하기 시작했다.
20세기 초반 주택 부족이 극에 달했을 때 방갈로는 주택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되어 주었다. 저렴한 집 하나에 담긴 단순함과 편의성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요소였다. 1920년 불었던 방갈로 열풍은 점점 새 건축 양식으로 바뀌기 시작했어도 소규모 지역 사회에서는 10년 정도 정통 방갈로 양식이 유행했다고. 작은 내부, 낮은 지붕, 넓은 현관의 단순한 방갈로는 화려한 빅토리아 양식에서 벗어난 소박한 디자인이었고, 쉽게 제작할 수 있어 어떤 지역에도 들어서기 편했다.
심지어 여러 회사들은 사람들이 직접 조립할 수 있는 '키트하우스'를 제공하기도 했다. 우편으로 주문하면, 구매자가 직접 조립할 수 있도록 두 대의 박스카로 실어 보내주는 식이었다. 한마디로 주택 소유자는 제조업자를 통해 방갈로를 만들 수 있는 키트를 주문하고 받으면, 목수와 노동자들의 도움으로 땅에 집을 짓는 식이었다.
방갈로는 노동자들이 많은 지역에 많이 세워졌고, 무엇보다 가격이 저렴해 제2차세계대전에서 돌아온 많은 참전 군인들이 방갈로 스타일의 집을 많이 구입했다고 한다. 미국 남서부 지역은 전쟁 이후 폭발적인 인구 증가가 있었고, 캘리포니아를 포함한 애리조나나 네바다 지역에서는 지금도 많은 방갈로를 볼 수 있다.
방갈로 /flickr |
방갈로 디자인은 20세기 초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에 의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당시 미술 공예 운동은 건축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자연 재료의 사용, 기존 양식의 재발견 등으로 거주자들에게 주택이 또다른 매력적인 스타일로 다가오는 데 기여했다. 방갈로의 성공 또한 이들의 열망에 대한 해결책 중 하나였다. 시골 오두막에 불과했던 방갈로는 이후로 도시나 교외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건축물이 됐다. 특히 장인 스타일(Craftsman style)의 방갈로는 건축과 조경 디자인 측면에서 자연주의로의 회귀를 원했다.
1930년까지 장인 스타일의 방갈로는 미국 전역에서 가장 많이 건설된 주택 양식 중 하나였다. 방갈로 건축은 미술 공예 운동의 영향을 받아 집과 주변 부지의 수평적 관계를 강조한다. 천연 재료, 지역에서 나는 재료를 쓰는 것도 동일한 맥락이다. 산업화된 기술보다 장인 정신을 더 우선시했다.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갈색과 녹색은 장인 스타일 방갈로의 전형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기술자들이 직접 손으로 깎은 대들보와 지붕 또한 장인 스타일을 뒷받침하는 디자인이었다.
1층의 공용 공간과 벽난로 /flickr |
캘리포니아 방갈로는 미국에서 특히 인기가 높았던 주거용 건축 양식이다. 미국의 방갈로는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경사진 지붕과 처마가 있으며 거실은 별도의 식당으로 개방되어 있는 형태가 많다. 공용 공간은 1층에 존재하며 천장은 낮은 편이고, 거실 중앙에는 벽난로가 있다. 중앙에 있는 넓은 생활 공간은 손님들을 맞이할 수 있는 적합한 공간이 되었고, 방갈로에 필수인 벽난로는 손님들을 위한 따뜻함을 제공했다.
이 스타일은 호주에서도 특히 인기가 많았는데, 호주 내에서 건축 잡지 수입이 증가하며 캘리포니아 방갈로 양식이 들어온 것이 계기였다. 호주는 온난한 기후라 여름과 겨울 모두 따뜻했는데, 캘리포니아도 호주와 비슷한 기후였어서 방갈로는 호주인들의 취향에 맞을 수밖에 없었다. 1920년대까지 호주에 지어진 거의 모든 주택은 캘리포니아 방갈로였을 정도로 엄청나게 늘어났다.
호주인들은 현지의 건축 자재를 사용해 방갈로를 지어 집 내부에 개방적인 생활 공간을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이 주택들은 주거지들을 조성했고 자동차가 많이 보급되면서 이 주거지들은 다른 도시로도 뻗어나갔다. 오늘날까지도 호주에서는 '방갈로 벨트'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캘리포니아 방갈로가 깔려 있는 거리를 볼 수 있다.
멜버른의 방갈로 /flickr |
캘리포니아 방갈로는 호주 말고도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인기가 많아 이 양식 말고 다른 스타일의 집은 거의 없었을 정도였다. 캘리포니아 방갈로는 마치 널빤지 지붕 아래 튀어나온 다락방 창문까지, 마치 아이가 도화지에 그린 집을 표현한 느낌이라 인기가 더 많았기도 했다. 지역마다 방갈로 외부의 벽돌 색도 달랐다. 멜버른은 붉은 벽돌, 시드니는 암갈색 벽돌,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는 석회암으로 방갈로를 만들었으며 퀸즐랜드주는 아연으로 도금한 철제 지붕과 목재로 지어졌다.
방갈로는 여러 장점이 많다. 어린 아이를 둔 가족에게 특히 좋은 점은 한 층에 모든 방이 갖춰져 있다는 편리함이다. 가끔 높은 층으로 올라간 아이들이 어른들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놀다 다치거나 하면 부모들이 바로 발견하지 못해 위험한 순간이 많았다. 그래서 방갈로는 어른들이 거의 모든 곳에서 아이들을 관찰하고 살펴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특히 나이가 많은 사람들, 이동 제한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인 집보다 계단이 없는 단층 방갈로가 더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다는 점도 한몫한다.
대체로 작은 형태인 방갈로 /flickr |
방갈로는 층수도 적어 청소할 곳이 적었다. 미국의 대부분의 집들이 2층 구조에 구조도 복잡하고 방도 많은 데 비해 방갈로는 유지 관리가 상대적으로 수월하다는 점이 편리하다. 비용이 많이 드는 냉방이나 난방 시스템의 비용이 저렴하다는 것도 장점이다. 무엇보다 평소 자신만의 공간, 자신만의 뒷마당이나 정원을 갖고 싶었던 사람들에게는 건축하는 데 넓은 부지가 필요한 방갈로가 제격이다. 뒷마당에 자신이 원하는 나무를 심을 수도 있고, 나무로 가릴 수 있어 프라이버시 보호도 쉽다.
물론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방갈로 특유의 낮은 지붕과 붙어 있는 방들은 소음이 많다는 불편함이 있다. 또 낮은 층이라 언제든지 누가 창문으로 침입할 수 있으며, 환기라도 하는 날에는 창문을 다 열어둘 수밖에 없어 또 이런 점에는 보안에 취약하다는 약간의 불편함도 존재한다.
방글라데시 시골에서 볼 수 있었던 방갈로는 벵갈 스타일 하우스라 부르며 골판지, 철판이나 황토 기와 등으로 건축했다. 과거에는 나무나 대나무, 짚 등을 사용해 방갈로를 만들었는데 이 재료는 주로 지붕을 만드는 데 쓰였다. 이 재료들은 더운 날 집을 시원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고.
인도의 방갈로 /flickr |
인도에서는 방갈로를 빌라라고도 부르는데, 중산층 도시의 표준 기준이기도 한 아파트와는 다르게 단독 가구를 가리킨다. 인도의 방갈로는 대체로 1층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거주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반려동물을 키우기 시작하며 2층으로 확대되었다. 1920년대에 세워진 뉴델리 방갈로 구역은 지역 유산 지역이기도 하다. 또한 인도 뭄바이 교외의 반드라엔 식민지 시대 지어졌던 방갈로들이 있다.
식민지 시대 지어졌던 방갈로는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에도 있으며, 제2차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만들어졌다. 대부분 고등법원 판사들이나 군대 고위직들을 수용하기 위해 영국이 지었던 것들이다. 두 나라 모두 방갈로에 대한 수요는 지금도 존재하며 대부분의 방갈로는 주거지로 쓰인다. 그 중의 일부는 사무실이나 호텔, 갤러리, 식당 등으로 바뀌기도 했다.
방갈로 /flickr |
요즘의 방갈로는 여러 사람들이 방 한 칸씩을 빌려 같이 사는 '셰어하우스'의 의미로도 쓰인다. 'Bangalow'라는 회사의 공동 창업자이자 CEO인 앤드류 콜린스는 직접 이사를 많이 다니며 최적의 주거 공간을 찾던 중 방갈로를 셰어하우스로 쓰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이 회사가 만드는 방갈로는 와이파이를 비롯한 청소, 잔디 관리 등을 모두 회사가 담당하며 임차인들은 한 달에 한번씩 관리비를 지불하는 것으로 운영된다.
이들은 방갈로가 제공하는 공용 공간, 주방, 소파와 TV가 있는 거실 등을 쓸 수 있다. 세입자들은 별도로 계약을 맺고 있어 한 사람이 이사를 가도 임대 수입이 남으며, 합산된 임대료는 일반적으로 단일 주택을 가진 집주인이 얻을 수 있는 수입보다 많다고 한다. 2017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한 이 사업은 뉴욕, 보스턴, 시카고 등 11개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일부 아파트에도 방갈로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단독 주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하나의 집으로만 사용되었던 방갈로는 현대에 들어 이렇게 또 새로운 용도로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