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 없는 사회
[김국현의 만평줌] 제77화
한국은행이 ‘동전 없는 사회’ 시범 사업을 4월부터 개시한다고 한다. 편의점 등에서 생긴 거스름을 화면에서 확인한 후 바로 선불카드에 충전하는 방식. 지속적인 인플레가 동전의 가치를 점점 떨어드려 이제 동전이 처치 곤란의 퇴물이 된 분위기다. 동전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데, 애써서 가지고 다니는 번잡함 만큼도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게 되니 생활 속에서 점점 사라지는 것도 당연하다. 계산대에서 동전을 주섬주섬 세고 있는 일이 언제부터인가 눈치 보인다. 한국이나 미국처럼 동전만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이 거의 사라진 나라일수록 더하다.
아예 ‘현금 없는 사회’로 달려나가는 곳도 있다. 스웨덴, 덴마크 등 북구에는 “No Cash Accepted"라는 팻말이 걸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외상 사절’이라는 글귀가 아직 귀에 익는데 저 나라는 ‘현금 사절’이라니. 통신사나 은행권이 모여서 만든 앱으로 간편하게 쓴다고 한다. 소위 핀테크다.
한국도 카드 선진국인 만큼 꽤 빠른 속도로 현금 결제 비중이 줄어들고는 있다. 곧 핀테크 천국이 찾아올까? 하지만 아무 나라에서나 따라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금융은 그 자체로 일종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좋든 싫든.
아무리 우리 사회가 카드 사회가 되었어도 여전히 현금을 손에 꼭 쥐고 있을 수밖에 없는 이들이 많다. 예컨대 고령자 등 정보 약자에게는 비현금거래는 낯설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노점상 조차 QR코드를 붙여 놓고 알리페이를 받고 있는 풍경을 목격하고 나면 미래란 알 수 없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한다.
그래도 현금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현금에는 아우라가 있고, 이것이 위세를 나타내기에 요긴하기 때문이다. 장지갑을 꺼내 펼칠 때 어렴풋이 비치는 노랑 초록빛 지폐의 존재감. 회식에서 부장님이 막내에게 꺼내주는 택시비도, 일식집에서 부하 직원 보는 앞에서 요리사에게 꽂아주는 팁도, “오늘은 내가 쏜다!”하는 허세도 역시 현금을 펄럭일 때 효과가 극대화된다. 현금은 “리더쉽은 사비에서 나온다”는 장면을 가장 확실하게 연출해 준다.
현금은 욕망이 구동하는 사회의 이면을 여실히 드러낸다. 뭐 지하 경제야 말할 것도 없지만, 시스템으로부터 측정되기 싫은(혹은 소소한 탈세를 하고 싶은) 모든 이들에 현금처럼 고마운 것은 없다. 마수걸이가 현금일 때, “아니 또 이렇게 현금을 주시고!”라며 고마워하는 자영업자의 웃음에는 중독성이 있다.
위세든 허세든 아니면 정이든 손길을 오가는 현금에는 아우라가 있다. 갑자기 꼬깃꼬깃 품에서 꺼내어 쥐여주던 할머니의 천 원짜리가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