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격은 유행이 아닌 차별 없는 평등에서
IT강국의 품격 – 아이슬란드편
빙하와 눈과 순록의 나라, 아이슬란드.
얼음이 녹아내리는 폭포. 오로라가 쏟아지는 피요르드 해안. 하지만 주말 저녁 글로벌 뉴스를 통해서나 기억하고 있는 아이슬란드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때 폭삭 망해 IMF 구제금융을 받기도 했던 시대착오적 금융입국을 꿈꾼 나라 정도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마불사 은행들을 망하게 내버려두면서까지 그들은 자의든 타의든 변신을 했다. 지난날의 허세도 털어버렸다. 금융입국의 꿈은 사실 포기했지만, 대신 최대산업이 어업에서 관광업으로 바뀌었다.
어느새 지난해 관광객 수는 2백만 명 이상, 2010년에 비해 3배나 늘었다. 아이슬란드에는 자국민보다 많은 미국인 관광객이 몰려들어 오고 있다. 30만 명이 겨우 넘는 인구. 사람보다 양(羊)이 더 많은 나라. 그들은 그렇게 평온히 새로운 시대에 나름대로 적응하고 있었다.
그런데 관광 이외에도 할 일은 또 있었다. 밤이 긴 북유럽답게 아이슬란드는 컴퓨터를 하기 좋은 곳이었다. 겨울에는 정오 가까이에 해가 떠서 3시가 넘으면 해가 진다. 3일에 이틀은 하늘에서 비든 눈이든 뭔가가 내린다.
서늘하고 고요한 밤, 인터넷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도 운치 있지만, 기계에게도 아이슬란드는 쾌적한 곳이다. 기계에게는 필수적인 냉방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늘 시원하게 낮은 연평균 온도, 그리고 유럽과 북미대륙으로 두텁게 연결된 인터넷 회선 등 사람만큼 기계도 살기 좋은 곳이다.
다행히도 좁은 땅이지만 지리적 위치에 따라 여름은 15도를 넘지 않고 겨울도 추워 봐야 영하 5도 정도로 온도의 진폭이 작아 사람이 살기 좋은 곳, 아예 영하 10~20도로 충분히 추워서 기계가 살기 좋은 곳까지 골고루 갖추고 있다.
또 아이슬란드에는 지열과 수력발전 등 재생에너지가 풍부하다. 협상만 잘하면 산업용 전기요금은 꽤 저렴해질 수 있다. 이와 같은 쾌적함에 유난히 끌렸던 기계들이 있었으니 바로 비트코인 채굴 장비들이었다.
아이슬란드가 대규모 채굴업자의 클라우드 채굴 사업의 1번지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 발전소 옆에 서버팜을 마련하여 특가로 제공받고 있는데, 워낙 큰 손이니 공항에 헬기까지 보내주며 VIP 대접을 한다고 한다.
이미 전세계적으로 비트코인 채굴에 들어가는 에너지는 불가리아나 덴마크의 국가 소모량과 비슷한 수준이 되어 버렸다.
이처럼 클라우드를 구성해, 그 규모의 경제로 밀고 들어오니 이미 자기 방에서 채굴하는 일은 어리석은 날이 되었다. 그렇지만 아이슬란드의 클라우드도 아직 비트코인의 정글에서는 갓 피어난 싹일 뿐이다.
대개의 에너지를 화력발전에서 만들어내는 중국에서 현재 가장 많은 비트코인 채굴이 일어나고 있다. 추정치이지만 무려 70% 이상이다. 아이슬란드가 각광을 받고 있다지만 겨우 2%에 불과하고, 미국도 1% 수준. 우리가 마시는 미세먼지에 어느 정도 비트코인의 책임이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셈이다.
하지만 IT강국의 품격은 이런 카지노 지원 산업에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아이슬란드는 지난해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의 ICT 발전지수 176개국 중 1위를 할 정도로 IT강국. ITU의 이 지수는 전통적으로 한국이 단골 1위였을 정도로 인터넷 대역폭 위주의 지표이긴 하므로 그다지 큰 의미는 없다. 하지만 인터넷 이용자대비 국제 인터넷 대역폭이 한국보다 18배 가까이 높다는 점은 신경 쓰인다.
한국과는 달리 인터넷상에서도 외국과의 교역이 꽤나 흥한 나라인 셈이다. 한국은 가만히 두면 쇄국으로 치닫기 쉬운 사회인만큼 18배까지는 아니더라도 1.8배 정도는 노력해야 할 일이다.
한국이 정말 부러워해야 할 일은 또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남녀가 평등한 사회라는 점. 1980년에 직접 선거로 여성대통령을 배출한 나라인데, 민선으로는 세계 최초였다. 무려 3번 더 당선, 재임 기간은 16년. 여성 사회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여성쿼터제 덕에, 여성의원이 47%, 여성취업률은 무려 83%나 된다. 올해 1일부터는 세계최초로 남녀평등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법으로 구조화하기로 했다. 아이슬란드 회생의 비결로 꼽는 아이슬란드 정신은 여기에 있었다.
그렇지만 차별 없이 고르고 한결같은 평등으로의 길은 그곳에서도 아직 멀다. 관광업 붐이 일면서 기득권층이 에어비앤비용으로 부동산을 사들이며 집값을 올려놔, 청년층이 살 공간이 줄어드는, 그 친근한 불평등이 이곳에서도 시작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