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마흔의 생일에: x86 에뮬레이트 소동
컴퓨터를 쓰는 이들이라면 누구에게나 친숙한 인텔 CPU. 집집마다 한 두세 개는 어딘가에 박혀 있을 듯싶다. 그 원천 기술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x86 명령셋이 처음 세상에 등장한 것은 1978년. 1978년생이 올해 한국 나이로 어느덧 마흔이니, 세월은 유수와도 같다.
그 x86 아키텍처의 생일은 지난 6월 8일. 인텔은 자축 중에 약간 뜬금없는 성명을 하나 발표했다.
“몇몇 회사들이 최근 인텔의 독자적인 x86 명령어 셋을 인텔의 승인 없이 에뮬레이트하려 한다는 리포트가 있었습니다.”로 시작하는 문단이 특히나 상당히 의미심장한데, 문장에 직접 표현은 안 했지만 몇몇 회사란 바로 윈도우 10의 ARM 버전을 만들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를 말하고 있음을 누구나 눈치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에 본 만평에서도 이야기했던 바와 같이 x86도 아니면서 x86인척할 수 있는 윈도우 10 ARM이 발표된 것은 이미 작년 연말. 게다가 그 발표 자리에 인텔이 있을 정도로 화기애애하기도 했다. 가능성 있는 일은 결국 현실이 되고 마는 IT업계답게 당연히 벌어질 미래가 당겨진 것 같은 느낌이었으나, 실은 그렇게 평온한 것만은 아니었나 보다.
인텔로서는 집에 돌아가 다시 생각해 보니 울컥했을 수도 있다. 스냅드래곤이라는 남의 몸에 내 정신이 얹히다니 인정받은 듯하여 우쭐했지만, 그렇다면 나의 몸은 결국 필요 없어지는 것이 아니던가. 게다가 잘 나온 경쟁작 퀄컴 스냅드래곤 835 같은 몸을 그간 만들 줄은 모르던, 혹은 애써 무시하던 인텔로서는 간담이 서늘했을 수도 있다. 윈텔이라는 지난 세월의 파트너십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사실 지금까지 공식으로 x86 라이센스를 받은 회사는 AMD와 VIA뿐이다. 마이크로소프트나 퀄컴, ARM 등 이번 사건의 이해당사자는 그간 일언반구 없었다니 서운한 마음도 이해는 간다. 물론 역할이 분명한 혈맹이었는데 무슨 계약서가 필요했으랴.
그러나 윈텔이라는 맹약 하에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나누어 지배했던 시절은 진작 가버리고, 맥에 인텔이 들어가고, ARM에 윈도우가 올라가는 세월을 넘어, 이제는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뒤섞이는 시대가 와버렸다. 언제까지나 정(情)만 믿고 살 수는 없는 일인가 보다. 앞으로도 할 일이 많은 윈텔 혈맹이 과연 법정에서 다툼을 실제로 하게 될지는 별개의 문제라고 해도 말이다.
그나저나 인텔이 이런 식으로 걱정할 정도라면 정말 이번 윈도우 10 ARM의 x86 에뮬레이션은 쓸만할 것인지도 모르겠다. 급작스레 찾아온 구매욕이라니 x86 마흔 생일 소동에 덤으로 찾아온 부작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