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크패드 25주년
[IT강국의 품격] 일본 편
기계란 얼마든지 더 작아질 수도 있고, 더 강해질 수도 있겠지만, 노트북은 굳이 그러지 않는다. 그 어중간한 화면 크기도, 키보드 면적도, 무게도, 성능도 모두 모두 지난 역사가 한 취사선택의 밸런스, 그 균형이 노트북의 핵심 기능이다. 따라서 여전히 국지적 개선은 있어도 그 모습의 근본적인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이 변치 않는 전통. 노트북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그런 노트북의 존재감을 탐하지는 못하고 관찰만 하던 91년 겨울 즈음이 새삼 기억난다. PS/55노트라는 노트북이 IBM 호환 기종이 아닌 한국 IBM에서 출시되었었고, 꽤 큰 신문 광고도 하곤 했다. 물론 1989년경부터 3kg급 노트북인 도시바 다이나북이 등장하는 등 노트북 시장은 영글기 시작했지만, 얼추 데스크톱과 성능상 대동소이하면서도 휴대기기로서의 완성도가 상당한 일품(逸品)이란 귀했던 시절이었다.
바로 올해 25주년을 맞은 싱크패드의 전신, PS/55노트는 그런 명품의 전조였다. A4사이즈의 386(SX)노트북. (IBM의 PS/55는 일본향으로, 영어권용은 PS/2로 불렸다.) 이 PS/55노트는 꽤 성공했고, 이 성공에 힘입어 글로벌 브랜드로 싱크패드가 전격 출시된다.
1992년. 윈도우 3.1이 출시되고, 세계최초의 문자 메시지(SMS)가 발송되고, CD 판매량이 카세트테이프를 뛰어넘던 그 해. 4반세기가 지난 지금 돌이켜보건대 역시 최고의 뉴스는 싱크패드의 출시였다.
싱크패드는 일본 IBM의 작품이었다. 이렇듯 현대 노트북의 산실(産室)은 일본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컴퓨터 내부란 일본 부품 천지였던 것. 물론 초기 아이디어나 원천 특허는 미국이 많았지만, 이를 구현하는 기술만큼은 일식 장인정신이 빛을 발하던 시절이었다. 일본 IBM ‘야마토 랩’의 명성은 외부인에게도 드높았다.
매트한 칠흑의 보디, 빨간 트랙포인트로 액센트를 둔 싱크패드의 미의식은 ‘빨콩’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서도 적잖은 사랑을 받았고 마니아도 만들었다. 7열 배열의 풀사이즈 키보드의 인기도 높았는데, 인서트, 딜리트, 페이지업·다운을 데스크톱 기분으로 쓸 수 있던 소중한 체험이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맥북에는 세상에나 이 중 어느 키도 없다.)
싱크패드 초기 모델 700시리즈는 그 가격도 성능도 마치 BMW 700시리즈를 연상시키며 서민들의 관심을 범접하지 못하게 하곤 했다. 마음껏 격이 달랐던 당시의 씽크패드는 NASA의 애용품이었는데 등장 이듬해인 1993년 스페이스셔틀 엔데버에 일반제품 거의 그대로 탑재되면서 유명세를 쌓았다. 우주왕복선에는 보통 7대의 싱크패드가 실리곤 했다는 후문이었는데, 무중력 우주에서 (당시의 볼) 마우스를 쓸 수는 없었을 테니 합리적인 선택인 듯 해 보인다.
하지만 세월은 흐른다. 혁신은 싱크패드만의 것이 아니었다. 스포트라이트는 소니 바이오 등 시류에 따라 옮겨가기도 했다. 변화의 조바심에 BMW식 모델링에서 T, X, R, I 등 벤츠식 모델링으로 품명을 바꿔보기도 했다. 휴대성이 뛰어난 X시리즈가 그럭저럭 관심을 끌 무렵이던 2005년 싱크패드는 IBM PC 사업부와 함께 전격적으로 레노보로 넘어가며 중국회사가 된다.
이 중국행에서 유난히 강조되었고, 지금도 틈날 때마다 강조하던 일은 바로 ‘야마토 랩’의 계승이었다. 싱크패드는 어느덧 ‘메이드인 재팬’의 상징이었던 것. 생산라인은 전부 중국으로 넘어갔지만, 그중 일부가 일본으로 되돌아온 것도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레노보의 일본 홈페이지에는 자국(요네자와·米沢)생산모델만을 다루는 특설 페이지(링크)가 있을 정도다.
싱크패드 이후 현대 노트북의 전형이 된 맥북의 알루미늄 유니바디. 예쁘기는 하지만 수리도 업그레이드도 힘들어지니 이제 노트북은 자산이 아닌 소모품이 된 느낌이다. IBM에서 직접 배포하던 유지보수 매뉴얼을 뒤적이며 간단한 수리는 누구나 직접 할 수 있었던 실용주의가 그립다.
유행은 시대를 반영한다. 요즈음에는 너도나도 자갈 모양의 치크릿(chiclet)키보드를 만드는데 빠져 버렸고, 7열은커녕 6열조차 위태로워진 시대. 갑자기 싱크패드의 키보드가 그리워졌다. 특히 600시리즈의 키보드는 상당한 명품이어서 이걸로 타이핑을 하고 있노라면 ‘아아, 영원히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아.’라며 착각에 빠지곤 했다. 싱크패드가 없었다면 글을 쓰지 않았을 이들, 몇 명은 있었을 것이다.
그 시절의 키보드가 그리워, 광에서 먼지를 먹고 있던 싱크패드 600을 끄집어내 오래간만에 키를 눌러 보았다. 그런데 과거 느꼈던 감동은 온데간데없다. 역시 추억은 미화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