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마우스 90주년을 기념하여 해볼 만한 이야기들
올해는 미키마우스 탄생 90주년이다. 미키마우스는 1928년생. 당시 26세였던 미키마우스의 아버지 월트 디즈니는 헐리우드에서 일종의 하청 만화영화회사를 경영중이었다. 그들의 갑이었던 유니버설사를 위해 그린 '오스왈드 래빗(Oswald the Lucky Rabbit)'이라는 귀여운 캐릭터는 꽤 인기도 끌었다. 그는 제작비를 좀 올려 달라기 위해 뉴욕으로 향했다. 그러나 교섭은 실패하고 권리마저 자신의 손을 떠났음을 깨닫게 된다. 오스왈드를 잃은 실의에 빠져 돌아오던 그 열차 길, 오스왈드의 토끼 귀 대신 동그라미 두 개를 그려 보게 된다. 미키마우스는 그렇게 좌절에서 피어난 전설이었다.
90주년을 기념하여 세계 각국에서는 다양한 콜래보가 진행 중이다. 최초로 한국을 방문했다고 언론에 나오는데, 누가 온다는 것일까. 등장한 것은 미키 탈 인형이었다. 그래도 청중은 열광했다. 서울시와는 'I·미키인서울·U'이라며 홍보를 했고, 삼성전자와도 AR 이모지를 함께 만들었다. 이처럼 미키는 밋밋한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연봉 6조 원의 몸값이 괜히 되는 것이 아니다.
IT를 돌아볼 때 미키마우스와의 콜래보레이션하면 역시 다양한 게임들이 생각이 나지만, 근래 강렬했던 것을 꼽자면 애플워치의 워치페이스가 있다. 시계의 역사에 있어서도 미키마우스는 중요한 챕터를 차지한다. 생쥐의 그 두 손(?)으로 시와 분을 가리키는 그 워치페이스는 대공황 시절 처음 등장했다. 자금난에 허덕이던 디즈니에 잉거솔(Ingersoll-Waterbury)사가 시계를 만들어 보자며 접근한 것. 잉거솔 사에 의해 그 후 특허까지 출원된 이 시계는 대성공이었다. 디즈니도 이 시계 회사도 미키 덕에 대공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들의 콜래보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캐릭터 상품 탄생 순간이라 인정받게 되리라는 점을 당시는 몰랐을 것이다. 아마도 애플이 기리고 싶었던 것은 그 순간이었던 것 같다. 그 후 세이코는 물론 롤렉스에까지 미키마우스 시계는 이어졌고, 셀럽 인스타그램의 단골 메뉴가 된 애플워치 미키마우스에 도달한 것. 미키마우스의 매력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디즈니 주니어 채널의 미키마우스를 온종일 보다 보니 미키마우스의 매력 공식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는 천진난만한 리더쉽을 지니고 있다. 남을 배려하면서도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 낙천성. 친구들의 희노애락에도 언제나 함께 했다. 주위에 있으면 좋겠지만 실제로는 드문 캐릭터는 이처럼 사랑을 모은다.
가장 미국적이면서도 국경이 없이 사랑받는 존재. 2차대전시 적국에서도 아이들은 미키마우스를 보고 있었다. 미키마우스와 같은 해에 태어난 데즈카 오사무는 9살부터 미키에 빠져 있었다 한다. 후일 그린 우주소년 아톰은 미키마우스가 모델이었다. 아톰의 뿔인지 삐친 머리인지는 미키마우스의 귀에서 착안한 것이라 고백했다.
지난 2012년에는 북한 모란봉악단 창단 공연에서 무대 뒷 화면에 미키마우스가 등장하는 장면이 조선중앙텔레비전에 비쳐 화제가 되었다. 미키마우스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북한 주민의 사진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체제 변화의 희망을 알리는 신호 같은 것이라 해석되었다.
그러나 정작 미키마우스가 제도적으로 상징하는 것은 변화와는 거리가 멀다. '미키마우스법'이라 야유받는 1998년의 저작권 연장 법률화 때문이다. 미키마우스도 저작자 사후 저작권 시효를 20년 더 연장받아 70년이 되었다. 이미 고인이 된 디즈니는 어찌 생각할지 모르나 미키마우스가 기득권 지키기의 상징이 되어 버린 것.
혹시 또다시 1998년처럼 갑작스레 저작권 연장이 법률화되면 어떻게 하나 싶지만, 그때와는 다르다. 우선 지금은 구글과 같은 인터넷 기업들이 저작권 연장에 극구 반대하고 있으며, 소비자들의 여론 또한 가만있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100주년에는 미키마우스는 퍼블릭 도메인이 되어 있을까? 저작권은 풀려도 디즈니사는 이미 상표권 등록을 해 두었다. 초기작을 복제해 배포할 수는 있겠지만 캐릭터의 상업적 이용은 여전히 힘들 것이다.
오스왈드 래빗의 권리는 2006년이 돼서야 디즈니로 되돌아왔다. 그때처럼 미키를 잃고 싶지는 않은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