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리즘 대청소
[김국현의 만평줌] 제23화
내년에는 한층 더 성숙한 저성장시대로 접어들면서 미니멀리즘이 유행할 것 같다.
저성장 선배 일본에서 한 때 유행했던 다양한 ‘정리의 기술’이 요즈음 수입되고 있고, 집착을 끊고 버리고 멀어지자는 ‘단샤리(斷捨離)’의 신앙이 이곳에서도 붐이 될지 모르겠다.
물질적 풍요나 방탕이 꼭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굳이 유행이 아니라도 인생의 지혜가 알려주는 일이다. 새 컴퓨터의 차세대 CPU와 초고속 메모리가 주는 쾌감은 이상하리만큼 잠시뿐이다. 새 폰도 상자에서 꺼내 이런저런 앱들을 설치하고 나면 결국 그냥 다시 폰일 뿐이다. 각각의 앱들도 언제부턴가 초심을 잃고 사람들의 평가에 일희일비하며 방만한 기능 업그레이드 끝에 무거운 몬스터가 되어 있곤 하니, 무어의 법칙은 금방 상쇄된다.
간만에 방청소를 하고 나면 방이 이렇게 넓었나 깨닫게 된다. 찬밥이 되어 버린 기계라도 초기화를 하고 나면 여전히 첨단기술의 총아임을 깨닫곤 한다. 청소의 힘이다.
한때의 하드디스크 용량보다 광활한 공간을 폰의 메인 메모리로 쓰게 된 세상이지만, 우리는 여기저기에 관심을 분산하다 보니 크게 생산적이지도 또 월등히 행복하지도 못한 사용자가 되어 있었다. 정리하지 못해, 버리지 못해 엉망이 되어 버린 우리 방처럼, 우리들의 컴퓨터는 앱과 파일로 엉망진창이다.
최근 일리노이대의 한 연구는 결핍이 창조력의 원천임을 다시 확인했다. 실험 참가자들은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각 자원의 원래 기능을 뛰어넘는 대안적 효용을 고안하게 되고, 그것이 곧 우리를 창조적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창조자들의 여러 일화를 돌이켜 봐도, 위대한 예술가가 결핍을 연료로 삼은 것은 어쩔 수 없는 필연인듯하다.
소비주의가 소비를 쉽게 할수록 우리는 과소비의 유혹에 빠져 소비하지 않으면 불안해한다. 여유야말로 창조의 원천이라 믿고, 고대 그리스 귀족이 아닌 바에야 찾아올 리 없는 허상의 여유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인생의 행복도 컴퓨터를 하는 행복도 차고 넘치는 곳에서만 오지는 않는다. 기능의 수가 많아질수록 무거워지고, 마음은 더부룩해진다. 사실 사람들이 갖는 이 더부룩함이야말로 시장의 갈증이자 혁신의 계기다.
구글도 애플도 당대의 주도적 경쟁사와는 차별화한 미니멀리즘으로 승부를 겨뤘다. 제품으로 잘 드러나지 않을 때는 경영자의 라이프스타일로 어필하기도 한다. 스티브 잡스와 마크 주커버그는 검은색 터틀넥이나 회색 반팔티 등 유니폼처럼 늘 같은 옷을 입었다. 매번 옷을 고르는 일 따위는 본질이 아니라는 듯.
생각처럼 잘 안 풀리는 연말이라면, 내 인생의 본질은 무엇인지 망년(忘年) 대청소와 함께 생각해 봐도 좋다. 잡동사니로 어지러운 책상도 아이콘으로 빼곡히 가득 찬 폰과 PC의 바탕화면도 나름의 변명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변명이 미래로 가볍게 나아가려는 나의 발목을 잡고 있을 수도 있다. 성장이 힘든 시대, 갖고자 하는 욕망은 좀처럼 이룰 수 없어 우리를 괴롭게 하지만 내려놓는 개운함은 우리를 창조적으로 만들 수 있다고 각종 연구결과는 속삭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