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빙 TV
[김국현의 만평줌] 제27화
언젠가 자율 운전의 세상이 오면 운전자는 무엇을 해야 하나.
의자를 돌려 뒷좌석 승객과 담소를 나누는 것도 좋지만, 뒤에 사실 굳이 화기애애해지고 싶지 않은 상사가 앉아 있을 수도 있고, 그 누구라도 밀폐 공간에 무릎을 맞대고 앉아 있으면 어색하고 뻘쭘하다. 무엇보다도 역방향 좌석은 쉽게 피곤해지기 마련이다. 작년 봄의 벤츠 컨셉 모델 F 015는 두런두런 둘러앉는 차의 꿈을 정말 꿨지만 역시 낯설었다.
이와 같은 문화적 이유, 또는 규제상 제약 때문에, 아무래도 상당 기간은 앞을 보고 앉아야 할 듯싶다. 구글은 핸들을 없애고 싶어 하지만, 이를 금방 허용해 줄 입법부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에 대한 통제권을 내려놓고 멍하니 앞창만 바라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일상이 되고 나면 무언가 할 거리가 필요하다.
최근 볼보에서 컨셉 26이란 것을 내놓았다. 26은 미국인들이 출근시 편도로 도로에서 보내는 26분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 차가 자동 운전을 하면 운전대는 쑥 빨려 들어가고 트레이가 문짝에서 나와 작업 공간을 마련해준다. 한술 더 떠 보조석의 대시보드는 뒤로 넘어가며 대화면 TV를 드러낸다.
드라이빙 뮤직이 20세기 문화의 한 조각이었다면, 드라이빙 TV가 21세기의 한 풍경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신호다.
“드라마 한 편과 함께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도착 예정 시간에 맞춰 적정 길이의 프로를 추천할 수도 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차는 알아서 주차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잠깐, 편도 26분이라니 이 차보다 이 수치가 더 부럽다.
한국은 편도 평균 58분으로 OECD 회원국중 가장 긴 통근 시간의 나라. 터키에게 1위를 뺏긴 적도 있기는 하지만, OECD 평균 28분의 두 배도 넘으니 길 위의 인생에 대해서라면 이 나라는 세상 누구보다 일가견이 있다. 그래서일까. 한국은 이미 미래를 살고 있다.
미래를 사는 한국에서는 자가용이라니 언감생심,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밖에 없으니 운전하지 않아도 된다. 서민들의 자율 주행이다. 조수석에서 TV는 튀어나오지 않지만, 주머니에서 튀어나온다. 스마트폰이 나오기 이전부터 PMP와 DMB를 유달리 사랑하는 나라이기도 했다.
몰입감이 뛰어나 보이는 큼지막한 모니터를 눈앞에 장착하고 있는 대형 트럭을 고속도로 옆 차선 차창 너머로 본 적이 있다. TV를 보는 시청자의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잠시나마 그곳이 운전자가 앉아 있는 운전석이란 생각을 들지 않았다.
아아, 드라이빙 TV는 현재진행형이었다.
그 날 이후 나는 자율 주행 기술을 간절히 바라는 기술 예찬론자가 되고 말았다.